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38화 (38/241)

시간을 되돌리는자(3)

필립은 예준이 붓을 드는 즉시 직원들의 모든 행동을 정지시켰다.

‘예술적 영감은 야간 기습을 감행하는 적군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 순간을 놓치는 건 명작 하나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어.’

필립이 작업을 중지시키자, 직원들은 그림을 그리는 예준의 뒤로 걸어와 작업을 구경했다.

필립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계획하고 깐깐하게 진행하는 게 필립의 방식이었다.

그건 세트 작업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돌발 상황으로 작업이 느려지는 걸 허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촬영 일정을 수도 없이 바꾼 필립이었다.

전혀 필립 답지 않은 면모였지만, 요즘들어 몇 번 경험해본 직원들은 군말없이 이 자투리 여유를 즐겼다.

‘그림을 그리는 모습부터가 하나의 퍼포먼스 같다.’

예준의 붓질은 굉장히 현란했다

잡혀가는 구도를 보아 현재의 세트장을 옮겨 그리는 것 같았는데,

예준은 오로지 캔버스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이번 촬영 장소 변경 건 중에는 일정 조율 가능한지와는 상관 없는 곳도 있었다.

미술품 복원과 관련하여 말다툼을 빚은 두 남녀가 이별하는 장면이었다.

원래는 아무런 부속도 없는 허름한 찻집에서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필립의 머릿속에 예준의 <이방인의 집>이 강렬하게 남아버린 것이었다.

‘표현력이 굉장히 뛰어나. 그래서 자신의 인상이 작품에 완전히 드러나는 것일 터다.’

예준의 작품이 필립에게 다시 그 자체로 뮤즈가 되어버리는 셈이었다.

예준의 그림이 조금씩 형태를 잡아갔다.

형상 하나하나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질 때바다 직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필립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준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전체 퇴장.”

필립은 일어나서 직원들에게 속삭였다.

예준을 위해 세트장을 비워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다간 필립이 나서서 예준을 방해하게 될지도 몰랐다.

작업하는 동안엔 차라리 그림을 보지 않고 기다리는 게 옳았다.

작업이 끝난 것인지 예준이 세트장을 나왔다.

그 즉시 필립은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직원들도 필립을 우르르 따라 들어갔다.

예준의 그림은 그 분위기만으로 세트장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는 작품마다 명작이구나.’

화담 미술관에 함께 있었어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그 정도 감상으로는 부족했다.

마네가 자신만의 공간을 남겨 놓았다면 예준의 그림과 같은 분위기가 풍길 것이었다.

필립이 제작하고자 했던 모든 아이디어와 내용이 예준의 그림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벽시계가······’

벽시계엔 시계침이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

두 주인공이 시간을 거스르는 장소가 바로 그 작업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표현의 디테일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트장은 여자 주인공의 작업실이자 <식물원에서>를 완성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의 분위기에는 두 인물의 과거 회상과 마네의 작업실이 모두 표현되어야 하는데,

예준은 한 폭의 그림에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스탭.”

예준의 그림을 보며 넋을 놓고 있던 직원들이 저마다 대답했다.

“저 그림을 충분히 살릴 수 있게 세트장 다시 세팅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윤화가님?”

“그게 좋다고 판단되신다면, 저야 환영이죠.”

세트장 직원들이 예준의 그림을 충분히 살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이 서로 논의하며 세트장 도면을 수정하는 것을 보며 필립은 느꼈다.

영화 디테일의 완성은 윤예준에 의해 이루어지겠다는 것을.

“정말 대단하시네요. 미술관에서도 느꼈지만······ 저 그림은 제 작품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모두 의도하고 그리셨을 테니 충분히 아실 텐데요. 가능하다면 영화의 포스터로도 사용하고 싶은데······”

저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면 여자 주인공의 작품 중 하나로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건 필립만의 욕심이었다.

저 정도 역작은 미술관으로 가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포스터로나마 영화에 사용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이죠.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예준의 허락에 필립은 뛸듯이 기뻤다.

“제가 그렸다는 것만 명시해주시면 돼요.”

예준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처럼 덧붙였지만, 오히려 필립으로서는 환영이었다.

너무나도 큰 환영이기 때문에 나서서 반길 수는 없을 만큼 말이다.

같은 이유에서 예준을 <반다이크>로부터 숨겨주려 했으니.

“영화를 홍보할 때 여러 방송사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될 겁니다. 그때 저 작품의 화가는 물론이고 오늘의 이 일화까지 충분히 알려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오히려 기자들이 예준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면 섭섭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

세트장을 방문한 뒤 예준과 민제는 작업실로 안내되었다.

'필립영화사' 내부에 꾸려놓은 작업실이었다.

아마 예준을 섭외하면서 급하게 지어놓았을 테지만 내부 시설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필요하실 만한 건 여기 다 있습니다. 그리고.”

로즈는 한쪽에 걸려 있는 <식물원에서>를 가리켰다.

“원작을 최고해상도로 찍어놓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 정도 크기의 태블릿을 꺼내 <식물원에서>를 화면에 표시했다.

로즈가 태블릿 속 그림의 어디쯤을 터치하자 로즈가 터치한 부분의 명도와 채도값이 표시된 창이 활성화되었다.

“그림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으실 경우엔 저기 걸린 사진을 보시면 되고, 구체적인 색깔 정보가 필요하시면 이 태블릿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장비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로즈는 작업실 구석에 구비된 데스크탑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문의사항은 전부 제게 전달해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죠. 집중력을 위한 군것질이나 쪽잠이 필요하시면 바로 저기 있는 휴게 공간을 이용하세요. 물론 작업을 일찍 마치고 돌아가고 싶으셔도 제게 연락하시구요.”

컴퓨터가 완전히 켜지자 로즈는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 하나를 실행시켰다.

마찬가지로 <식물원에서>의 사진이었지만, 이번엔 자연광을 쬐었을 때, 백열 조명을 쬐었을 때, 직사광선을 쬐었을 때 등의 수많은 그림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작품 안에 있는 인물과 사물들의 모든 비율 정보, 그리는 당시의 마네가 서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점의 정확한 시야각, 그림에 있는 난간 기둥의 비율이 일정치가 않은데 그것들의 부위별 지름과 간격까지. 전부 있습니다.”

로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해당 장면 촬영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속도보다는 정확성에 초점을 맞춰달라는 아트 디렉터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두 달, 세 달이 걸리더라도 일정은 윤화가께 맞춰 그때그때 조율할 예정이니 편안하게 작업하시면 됩니다.”

“두 달, 세 달이라뇨?”

“아, 평균적인 작업 시간을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네 달이든 다섯 달이든······ 너무 터무니없이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 마감 기한은 없습니다.”

구성을 처음부터 고안하며 그려도 한 달이 안 걸린 그림이었다.

그대로 그린다면 앞서 세트장에서 그린 것 이상의 시간이 걸릴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저대로 그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듣던 로즈가 다시 <식물원에서> 사진 앞으로 가서 섰다.

“자세히 봐주십시오. 단순히 같은 그림을 그려달라는 게 아닙니다. 명암 정보부터 붓의 질감까지 최대한 똑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전체 색채 대비가 원작과 똑같아야 해요. 세공 수준의 모작이 되어야 합니다”

설명을 마친 로즈가 작업실을 나갔다.

작업실 창고엔 <식물원에서>의 비율로 만들어진 캔버스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내가 표현하려 했던 것은 단절의 불가능성이다.’

애초에 단절된 인물들이라면 같은 캔버스에 넣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두 남녀를 떠올렸다.

그날의 식물원을 머릿속에 그리자 그 특유의 풀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의자를 사이에 두고 한 명은 앉아 있었고, 한 명은 서 있었다.

초록 색감의 생기가 작품을 지배하도록 물감을 아끼지 않았다.

대화 없이 조용했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단절되어보이는 그들을 연결하는 건 함께 끼고 있는 한 쌍의 반지였다.

‘마주치기 직전에 엇갈린 둘의 시선. 단절의 불가능을 암시하는 둘의 반지.’

위작 화가들처럼 사소한 부분에 골몰해선 안 됐다.

골몰하면 실수하고 틀리기 마련이었다.

설령 실수 없이 모사에 성공했다고 해서 원작의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셈이었다면 애초에 저 사진을 그대로 가져다가 쓰면 될 일 아닌가.

인물 관계를 생각한다면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인물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그들의 관계 자체가 흥미로운 상황으로서 계속 해석하는 재미를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반지와 시선은 이 작품의 주요 모티프였다. 마지막까지 끌고 가다가 완성 직전에 그려넣는다.’

그림은 막힘 없이 진행되었다.

인물들의 뒤를 장식하고 있는 식물들은 그 이파리의 배치가 상당히 복잡했지만

복잡해서 못 그릴 바였다면 애초에 <식물원에서>를 그리지도 못했을 터였다.

계획했던 대로 마지막에 반지와 눈동자를 그려넣었다.

이미 전에 한 번 완성해본 작품이었기 때문에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완성했습니다.”

작품을 완성한 즉시 다시 로즈를 불러왔다.

로즈는 완성했다는 나의 말에 어리둥절하며 <식물원에서> 모작을 멍하니 보았다.

“매니저님?”

“......아! 죄송합니다. 이게, 그러니까······”

로즈는 우왕좌왕하더니 수평 작업대 밑 서랍에서 장치 하나를 꺼냈다.

장치를 작동시켰고, 완전히 작동할 때까지 로즈는 계속 나의 모작을 살폈다.

줄자를 꺼내 그림에 닿지 않도록 조심히 비율 이곳저곳을 체크했다.

“햇볕, 바람 없이 건조한 실내에서 일주일만 말리면 완전히 완성될 겁니다.”

당시에 내가 그렇게 말렸기 때문이었다.

로즈는 얼떨떨해 하는 얼굴로 어떤 기계를 끌어와 나의 모작 앞에 대었다.

장치에도 모니터가 있었는데, 실내 조명과 밝기를 인식해 대상의 실제 명도와 채도를 감별하는 장치인 듯했다.

로즈는 장치를 통해 모작을 이곳 저곳 찍어보며 명도와 채도를 확인했다.

“소수점까지 들어가도······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모작입니다. 물론 감정소를 다녀오긴 해야겠지만, 제가 본 바로는······”

차갑고 기계적인 모습만 보이던 로즈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뿌듯해졌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림이 마르자마자 정확히 일주일 뒤 로즈에 의해 감정소로 보내졌다.

“영화사에서 완전히 난리가 났다더라.”

“네? 어떻게요?”

“모작 기간으로 최소한 두 달에서 반 년까지 봤다나봐. 필립 감독은 너를 고평가하면서 기간을 굉장히 짧게 봤는데, 그마저도 한 달이었대. 근데 그걸 반나절만에 해버렸으니······”

호텔에서 식사하던 아버지가 짓굳에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로즈 매니저가 아무도 건조장에 못 들어가게 했대. 필립 감독까지도. 그래서 다들 궁금한 거지. 감정소 정밀 감정은 유사도가 40%만 나와도 완벽한 모작이라고 한다던데. 예준이꺼는 얼마나 나올까?”

위작을 감별할 땐 사소한 부분을 감정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정확히 똑같아보여도 유사도 평가치는 낮다고 했다.

80%가 넘을 경우 즉시 촬영한다고 들었다.

어차피 내 그림인데, 100% 가깝게 나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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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는자(4) [수정]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지금 CEEA로 함께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오전부터 호텔을 찾아온 로즈가 말했다.

CEEA(Chambre Europeenne des Expert d’Art)는 유럽 미술 감정 전문가 협회의 약자로, 필립이 예준의 모작 감정을 의뢰했다는 공인된 감정소였다.

오늘이 감정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고 했는데, 무언가 잘못된 듯했다.

“무슨 일일까요?”

아버지가 긴장한 게 보였다.

“글쎄요. 저도 빨리 두 분을 모셔와달라는 연락만 받은 상태라서요.”

우리는 즉시 협회 건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있는 협회 직원들이 보였다.

예준이 도착하자 직원들은 웅성거리며 저들끼리만 들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궁금증이 커진 우리는 빠르게 필립이 있는 장소를 향해 걸었다.

“오, 윤화가님. 이렇게 될 줄이야!”

필립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협회 소속 감정사들 틈으로 복잡한 기계장치가 들여다보였다.

통유리로 연결된 옆방이었다.

그곳에서 장치가 작동되면 이곳에서 지켜볼 수 있는 구조 같았다.

그리고 장치 위에 놓인 건 나의 <식물원에서> 모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아버지가 묻자 필립이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쳐 보였다.

감정 결과 통보서였다.

“유사도가 98%랍니다, 98%! 이 정도면 아예 같은 작품이라는 거예요!”

“네?”

“지금 어떤 위작에 대해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 협회에서 회의에 들어간 상태예요.”

우리는 통보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채도와 명도뿐만 아니라 협회만의 계산법으로 보이는 모든 평가치가 100% 에 가깝게 기입되어 있었다.

“예준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나를 끌어 안았다.

살롱전에서 입상했을 때에도 이 정도 축하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림을 흉내내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릴 때 당시의 화가의 감정과 모티프까지 흉내내야 했다.

그래야 손 크기와 근육량이 다르더라도 같은 그림이 나올 수있는 것이었다.

원작 화가가 한번의 붓질로 끝낸 부분을 가느다란 붓으로 자세히 흉내 내면, 그 부분은 한번에 붓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다른 그림인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고 듣고 왔는데요. 무슨 문제예요?”

내가 묻자 필립은 기쁜 마음을 추스르며 답했다.

“아, 그게. 이 정도로 완벽한 모작이라면 원작의 오차범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장은 사용 허가를 낼 수가 없다고······”

“네? 아니, 그럼 우리가 바꿔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원칙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오르세 측에서도 현재 원작 감정에 들어갔다더군요. 다행인 건 오늘 안에 통보를 준다고 했으니 조치는 바로 취할 수 있을 겁니다.”

협회의 그 대응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만약 유사도가 100%로 나온다면 감정사들은 그 그림에 대해 사용 허가를 내기 힘들어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의미 없는 붓질을 추가했다.

아마 그 붓질 때문에 유사도는 98%로 낮아졌을 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원작의 오차범위에 들어간다니.

“오르세의 원작 감정이 끝난 뒤의 얘기지만, 협회 측에서는 이 그림에 모작 표식을 해둘 것을 권고하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히 항의했습니다. 나쁜 의도로 그려진 게 아닌 이상 저 그림도 윤예준 화가의 작품인데 협회에서 그렇게 강요할 권리가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쪽에서는 공익성을 들먹이고 있어서 대화가 고착화된 상태죠.”

모작 표식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해놓은 2%의 표식이 바로 모작 표식 아닌가?

협회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당황했을 것이었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저도 이 작품을 의뢰를 맡길 때에나 잠시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필립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이번에도 솔직하게 답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냥 인터넷으로 평론 좀 찾아보고, 저 인물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지 상상하면서 그린 거예요. 자세히 따라 그린 건······ 최대한 자세히 따라 그린 것뿐이구요.”

나의 상상은 최대한 자세할수록 필립의 납득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실제로 두 모델이 어떤 사이에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듣던 필립이 박수를 쳤다.

“화가님의 작품엔 스토리까지 있습니다. 지난번 세트장 그림 때에도 느꼈지만······ 정말 상상 이상이군요.”

“그나저나 감독님 촬영해야 할 텐데 이를 어쩌죠?”

필립은 고민이 큰 것 같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야 협회의 요구에 협조할 도리밖엔 없으니 그렇다고 쳐도, 윤화가님이 문제죠. 작품을 망치지 못하도록 저도 힘껏 싸우겠습니다.”

그때였다.

감정실 안으로 한 위작 감정사가 걸어들어왔다.

“아, 화가님이 오셨군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도 이례적인 일이라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오르세에서는 연락이 왔습니까?”

“네. 절차적인 확인이었습니다. 오르세 측에 있는 작품이 원작이 맞습니다.”

감정사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연락을 기다리면서 협회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역시나 표식 건은 배려해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촬영용 소품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니,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저 그림을 저희쪽에서 관리해 표식 기입을 미룰 수는 있습니다. 감정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고 하니 저희 직원들도 감독님 영화를 굉장히 기대하고 있거든요.”

이례적인 일로 작품에 표식을 권고받다니.

필립의 반응을 보면 그 사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오차범위라는 건 어떻게 설정하는 건가요?”

감정사에게 물어보았다.

“유사도가 90%만 넘어도 오차범위로 봅니다. 원작의 보관 상태에 따라서 90%까지는 원작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게 합의된 의견이거든요.”

붓질 한 번에 2%였다.

거기 최소한 89%까지 유사도를 내리기 위해서는 같은 붓질을 다섯 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다른 그림이 아닌가?

한두 번이라면 어떻게 양보할 수 있겠지만, 90% 이하라면······

필립은 만족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표식은 이미 해뒀습니다.”

“네? 그게 무슨······”

나는 감정사에게 그림을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는 가져다주지 못할 것 없다는 듯 우선 감정실을 나섰다.

필립이 물었다.

“표식을 이미 해두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림이 도착하면 설명드릴게요. 일단 기다려보죠.”

감정사는 다른 감정 사 두어 명과 함께 내 모작을 가져와 책상에 올렸다.

“여기 여자의 치맛자락을 한 번 보시죠.”

나는 벤치에 앉은 여자의 치마 한 부분을 손으로 직접 집었다.

모두가 놀랐지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유사도를 내리기 위해 일부러 표식을 해둔 부분이 그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제가 일부러 붓질을 하나 추가해뒀습니다. 그것 때문에 질감이 조금 바뀌었겠죠. 그래서 유사도가 2% 정도 덜 나온 걸 거예요.”

“네? 그럼 100%가 나올까봐 일부러 미리 표식을 해뒀다는 건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감정사는 태블릿으로 원작 사진을 보았다.

둘을 자세히 비교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네요······ 그럼 이 표식이 있는데도 유사도가 그렇게나 높게 나온 겁니까?”

오히려 낮게 나온 것이었다.

“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참을 들여다봐도 차이점 구분이 쉽지 않겠지만 감정사분들이 보기에는 나름대로 극명한 흠집이겠죠. 유사도는 높아도 이 정도면 확실한 표식 아닌가요?”

감정사는 고민에 빠졌다.

“육안으로 검사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위치까지 알면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필립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표식은 해둔 걸로 치죠. 작품 등록을 한 후 이력에 그 특이사항을 적어놓으면 문제 없을 겁니다. 협회 사람들에겐 그냥 통보만 해도 되겠네요. 작품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

로즈는 촬영 전에 계약서를 완성해야 한다며 협회 건물 내 대기실로 우리를 이끌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까 감정사도 놀라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더군요. 그걸 미리 생각하고 표시를 해두시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거의 구분할 수 없는 표식이었는데······ 그 정도면 완벽한 모작입니다!”

둘은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오래 사설을 늘어놓은 뒤에야 본론을 이야기했다.

“......지난번 세트장 그림은 감독님께서 구입하셨고, 이번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작권은 저희측에 없으니 지금 보완해야 할 부분은 그림에 대한 러닝 게런티입니다.”

포스터로 사용되는 그림은 따로 사용료를 정하면 되었다.

하지만 영화 장면에 직접 들어가는 <식물원에서> 모작에 대해서는 ‘러닝 게런티’라는 금액을 내게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러닝 게런티란 작품의 흥행 정도에 따라 나의 수익에 차등을 두는 방식의 게런티를 의미했다.

“보통 어떻게 설정하죠?”

“작품 속 노출 빈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그림처럼 오리지날리티가 있는 작품을 활용할 경우엔 0.01%에서 0.1%까지 천차만별입니다.”

모작에 대해 오리지날리티가 부여된다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럼 0.5%는 어떠세요?”

내가 제안하자 로즈는 말을 잃었다.

너무 높은 수치라고 느꼈는지 필립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로즈와 아버지 모두 당황했지만, 필립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리곤 입을 뗐다.

“윤예준 화가님은 이번 영화의 뮤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상이 다 끝나고 뒤늦게 참여했는데요, 뭘.”

내가 과찬이라고 마다했만 필립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참여했느냐 하는 그 시간 순서가 중요하겠습니까? 저희 작품 이름이 <시간을 거스르는 자>인데요.”

그리고 호탕하게 웃으며 펜을 들었다.

계약서 금액 공란에 0.5%라는 숫자를 기입했다.

“서명하시면 됩니다.”

펜을 받아 계약서에 서명했다.

흥행 정도에 따라 내게 돌아오는 수익금이 커졌다.

그림은 완벽하게 그렸다. 아마 흥행할 것이었다.

“흥행하길 바랍니다.”

영화가 크게 흥행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바랐다.

*

영화 관련 인터뷰 요청들도 대부분 일단락되었다.

언론에 대해서는 '필립영화사' 측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로즈는 필립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바로 나를 언론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지낼 시간이 그러고도 꽤 남게 되었다.

로즈에게 관광을 부탁하자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정말 혼자 가도 되겠어?”

“괜찮아요. 휴대폰도 있고, 영화사에서 엄청 잘 해주시잖아요.”

일부러 아버지가 장피에르를 만나야 하는 날에 맞췄다.

여전히 불안했는지, 아버지는 실제로 부탁할 생각은 없었던 가이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로즈는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 한 명을 불렀다.

그가 가이드를 해줄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기도 했고,

그간 불어를 쓰면서 아버지가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마음 놓고 불어를 사용하며 프랑스를 둘러보고 싶었다.

로즈가 소개해준 직원에게는 몽마르뜨로 가달라고 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찾기 시작하며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가 된 곳이었다.

지금은 인상파라고 불리게 된 바티뇰파 화가들과 교류를 했던 카페 ‘게르부아’도 그곳에 있었다.

‘그곳도 많이 변했겠지, 아무래도.’

기대가 되는 한편으로 아직 여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전생의 삶을 마음껏 돌이켜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풍경까지 그대로이기는 힘들겠지.’

현대적으로 변했다면 조금 실망스럽긴 하겠지만, 현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내가 상상하기로 <미드나잇 파리스>와 같은 교류의 장소로는 게르부아만 한 곳이 없었기에.

하지만 직원이 데려다준 몽마르뜨는 내 생각과는 너무나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여기가······ 몽마르뜨?”

“네. 굉장히 유명한 곳이죠. 찾는 관광객들도 꽤 되고.”

옛풍경이 조금 남아있기는 했지만, 직원의 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돌아다니고 있을 뿐 그냥 죽은 거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한적했다.

어느 일대는 완전히 허허벌판이 되어 있기도 했다.

어머니와 벽화를 그리러 갔던 마을이 생각날 정도였다.

“혼자 좀 구경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직원은 골목 분위기를 조금 살폈다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지금 이 위치에서 그래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슨 일 일으면 전화주십시오.”

“네.”

나는 직원과의 대화를 마친 후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변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조금 심하다 싶을 만큼의 변화였다.

실향자의 심정으로 거리를 걷다 언덕이 시작되는 바티뇰 거리에 닿았다.

‘응? 저곳만 사람이 좀 많네.’

Le Consulate(르 콩슐라)라고 적혀 있는 카페였다.

먼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카페 바깥에서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카페 내부에도 사람이 꽤 되었다.

나의 붓이 1700만 유로로 팔렸던 때를 떠올렸다.

이후로도 사람들이 에두아르 마네에 대해 하는 온갖 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나는 어느 정도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그럼 이곳 사람들도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요즘 유행하는 미술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또, 윤예준이라는 이름 석자도 꽤 알렸다.

드가와 같은 괴팍한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명한 윤예준으로서, 현대미술과 거장 에두아르 마네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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