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34화 (34/241)

나를 찾아서(9)

작품 구매 희망자가 나타났다며 관장이 민제를 불렀다.

민제는 함께 있던 연희와 장피에르와 함께 즉시 관장실로 들어갔다.

안엔 관장과 예준, 그리고 비싸보이는 복식의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총 여섯명의 사람들이 관장실에 모인 것이었다.

관장은 여성을 ‘양회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을 얘기하시는 겁니까?”

양회장이 되물었다.

“총 몇 작품이 있었죠?”

“여덟 작품입니다.”

“예, 여덟 작품. 그럼 여덟 작품 전부 다요.”

양회장의 깜짝 선언에 모두가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처음으로 입을 연 건 장피에르였다.

“여덟 작품 전부 다라니······ 적정 가격을 어느정도로 생각하고 오신 거예요?”

“다 해서 한······ 25억 정도면 되겠습니까?  아니. 특히나 <이방인의 집> 너무 좋았으니 더 불러야겠군요. 이런 자리를 얻는게 쉬울 것 같지도 않고, 경쟁자가 많을 것 같기도 하고. 30억으로 할까요?”

“30억······”

이 정도면 경매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30억이라니······

민제는 잠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민제를 당황하게 한 건 그 높은 액수뿐만이 아니었다.

그 억단위의 비싼 금액을 적당히 맞춰서 부르는 태도가 더 무섭게 다가왔다.

“예준아. 예준이 그림 전부를 30억원에 사겠대.”

“30억이요? 아니, 전부 다요? 여덟 점?”

“응.”

예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 중 <작업실에서의 오후>는 제 것이 아니에요. 일섭 할아버지께 이미 선물한거잖아요.”

“아아······ 그렇지.”

민제가 대신 정정해주었다.

“작품 여덟 점 중 하나는 윤예준에게 판매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것 제외하고 팔아야 하는데, 상관 없으시겠습니까?”

“그거 아쉽네요.”

양회장은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야 어쩔 수 없죠. 그럼 일곱 작품에 25억으로 할게요.”

양회장이 말하는 즉시 예준이 끼어들었다.

“장피에르 아저씨. 저 조건이 있는데 혹시 전달해주실 수 있나요?”

장피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점에 30억 유지시켜주세요. 거기에 추가로, 가져가시는 것 외의 다른 권리는 여전히 저에게 남도록 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장피에르는 잠시 놀랐지만 통역했다.

“윤예준 화가가 판매하고자 하는 권리는 작품 일곱 점에 대한 소장권뿐입니다. 값은 낮추지 않고 30억을 유지하고요. 저작권을 포함한 기타 권리는 30억 값에 포함하지 않겠습니다.”

설명을 마치자 양회장이 크게 웃었다.

“30억이야 뭐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작권 문제는······ 저 같은 수집가들은 작품을 온전히 수집해야 마음이 놓여요. 법적으로 권리란 권리는 모조리 챙기고 싶죠. 하지만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 화가님 작품들을 구매할 수만 있다면 더한 조건도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신 저도 조건을 하나만 달아도 될까요?”

“말씀해보세요.”

“제 조건은 ‘지금 즉시’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계약서 완성하고, 입금 끝내고, 그림 거래 마감하는 걸로.”

양회장의 말이 끝나자 관장이 계약서를 챙겨왔다.

영문 계약서였다.

양회장은 계약서 세목을 살피거나 사인을 진행하지도 않았다.

대신 입금자명과 계좌번호만 확인하곤 바로 휴대폰을 주섬거렸다.

때맞춰 민제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쪽이 대리인이신가보군요. 저는 계약서 작성하고 있을 테니 입금 확인하세요.”

그리고 양회장은 계약서의 공란을 채우기 시작했다.

민제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30억이 입금되었다는 은행 안내 문자였다.

‘이게 다 뭔 일이냐······’

일곱 점을 팔았으니 3억5천은 갤러리 몫이었다.

‘양회장······ 배포가 커서 먹힐 만한 승부이긴 했지.’

애초에 갤러리 몫 상한을 작품 당 5천만원으로 한정한 건 장피에르의 조언 덕분이었다.

잠시 관장을 보았다.

민제와 눈이 마주친 관장은 숟가락질하는 시늉을 했다.

밥을 사라는 뜻이었다.

표정은 좋아보였다.

‘3억5천만원도 충분히 큰 돈이기는 하지.’

아마 그걸로 오랫동안 원해왔던 특별전 전용관을 하나 더 지어올릴 터였다.

항상 그림을 더 많이 전시해 제공할 수 없다고 아쉬워했던 그였으니.

‘남은 26억5천만원에서, 어디보자······’

기타소득세는 수익 금액의 20%에 대하여 적용되었다.

기타소득세가 22%니까, 20%에 대한 22%면······

계산기를 활용했다.

마지막에 표시된 숫자는 25억3천3백4십만이었다.

관장과 양회장이 계약서 작성을 맞춰보는 동안 민제는 예준에게 수익금을 보여주었다.

예준은 이번에도 수익금을 보며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예준아. 너 돈 엄청 번 거야!”

“그러게요.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될 줄은······ ”

양회장은 그림을 흔쾌히 샀다.

그 정도가 너무 크다는 건 그렇다 쳐도

그림을 하나 빼기로 했을 때 그 그림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준아.”

“네.”

“아까 그 저작권 얘기 있잖아. 소장권만 판다는 얘기. 타당한 조건이긴 한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한 거야?”

소장자에게 저작권이 없을 경우, 언론 외의 어디서든 그 그림의 복사본에 대한 금액을 원작자에게 지불해야만 했다.

양회장 정도 되는 부자라면 거절했을 법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예준은 양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저 양회장이라는 사람. 같은 값에 그림 한 점을 빼겠다는데도 그게 어떤 그림인지 묻지도 않았어요. <이방인의 집>이 빠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대충 5억을 낮춰서 불렀잖아요.”

예준도 민제와 생각이 같았다.

“수상하죠. 그렇다고 안 팔 수는 없으니, 판매 최소 조건인 소장권만 넘긴 거예요.”

예준의 생각이 옳았다.

지금으로서는 양회장만큼 비싼 값을 불러줄 사람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림 한 점을 뺀다는데, 마치 당근값이나 흥정하듯 굴었다.

양회장에겐 최소한의 권리만 넘기는 것이 어찌되었든 예준에게 이익이었다.

“그나저나 이 돈으로는 뭘 할 거야?”

예준은 이미 생각해둔 사용처가 있는 모양인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나는 이번 수익금으로 집을 짓겠다고 대답했다.

완전한 작업실이자, 안식처인 집.

그것도 <이방인의 집>을 그렸던 바로 그 공터 자리에 말이다.

입지가 좋은 마을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그곳의 매입을 도왔다.

중도 취소된 공사 건이 엮여 있어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땅을 사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림 판매에 대해서는, 관장과의 협의 이후 계약 내용이 확정되었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그림들을 보며 양회장의 감상들을 떠올렸다.

‘어느것 하나 거짓되어 보이는 감상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모든 그림을 공평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일까?

말로는 <이방인의 집>이 가장 좋다고 했지만, 이후 태도는 그와 썩 어울리는 편은 못되었다.

작품 하나가 빠져도 금액상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화가의 가능성을 보고 그림을 사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건 모두 얻어냈다.

나중에 그림 가격이 더 오를 것 같다고 하더라도

당장 그림들을 팔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일곱 점에 30억이면 그림들 각각이 <블랑쉬 네즈>보다 비싸게 팔린 것이었다.

경매도 거치지 않고 이틀만에 말이다.

이는 분명한 성장세였다.

나는 <이방인의 집> 앞에 섰다.

양회장은 이 그림에서도 나의 화풍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 나무만 제외하면 모든 게 현대적 구조물이었는데도 말이다.

‘인상주의의 열렬한 팬이라고 했지.’

그 점은 확실히 그래보였다.

그러니 나의 그림을 고평가한 것이겠지.

어쩌면 나의 인상주의적 화풍이 미술품 애호가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인상주의가 아니다.’

현재의 모든 화풍을 통달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조를 여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지금의 ‘리틀마네’라는 별명은 결과적으로는 내가 벗어나야만 하는 옛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목적 달성에 꼭 필요한 별명이기도 했다.

‘우선 유명세가 중요해. 그렇지 않다면 내 그림을 모작하러 프랑스까지 갈 이유도 없지.’

“아직도 얼떨떨한가보구나?”

장피에르가 예준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네, 그렇죠 뭐.”

장피에르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명함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아까 너희 아빠랑 하는 이야기 들었다. 이거 주려고 너를 찾은 거야.”

‘진현재’라는 사람의 명함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야. 내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아티스트이기도 하지.”

건축가?

장피에르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나에 대한 태도가 프랑스에서완 사뭇 달랐다.

당시엔 그냥 친구 아들을 대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정중해졌다고 해야 할까?

미술품을 거래하는 그가 프로 화가와 대화할 땐 딱 지금과 같은 태도일 것 같았다.

*

필립은 파리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온갖 전화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호텔 식당에서 사진을 찍혀버린 것이었다.

윤예준에 관련된 건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는 모습까지 찍히다니.

‘혹시나 조용히 지나갈까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기야 필립 본인이 FC코리아의 기자였어도 유명 감독과 배우의 방한 건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것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에 잠복을 배치해서라도 말이다.

[프랑스 영화계 명장 필립 뷔르티, 한국의 리틀 마네와 손을 잡다.]

[필립 감독 신작 <시간을 거스르는 자>, 리틀 마네 윤예준의 역할은?]

언론사의 연락이 잦아들어 휴대폰이 조용해질 때마다 영화 제작 관련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예준 측과 협의한 일정을 통보했다.

그 일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오면, 즉시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협약을 진행했다.

이미 섭외해둔 위작 화가와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이나마 무조건 윤예준의 일정에 맞추겠다고 선언했으니 그 걱정은 하나 덜었다.

‘윤예준의 그림을 확보하는 것 외에는 모두 사소한 것들이다.’

애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계약건들이었지만

이번 한국 방문 이후 필립의 머릿속에서 윤예준이 첫번째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했다.

야외촬영 일정은 관공서와의 협의였다.

관련 건을 조율을 준비하기 위해 우선 영화사로 향하려는데, 또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

“글쎄, 그 기사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굴 일은 못됩니다.”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필립은 전화를 받는 즉시 그렇게 말했다.

현재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윤예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나치게 상승하고 있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기대를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필립은 조금 양심이 찔렸다.

이래선 마치 노린 것 같지 않은가.

-......<반다이크지 사회문화부의 요나스입니다.

<반다이크>

독일 언론사의 이름이었다.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했다.

<뉴욕타임즈> 다음으로 세계 디지털 구독자 순위 2위에 빛난다는 바로 그 언론사.

-기사가 사실이라는 건 윤예준 화가와 협업한다는 그 소문 이야기 맞습니까?

“협업은 맞지만 소문엔 과장이 많습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지금으로서 저도 몰라요. 경우에 따라선 소품에 참여할 수도 있고 미술품에 대한 각본상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는 겁니다. 이번 작품에 한해서요.”

-개인적으로도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감독님이 고르고 고른 화가가 누구인지. 시끄럽게 굴 일이 못 된다고 하기엔 감독님께서 모작 화가 구하는데 공을 너무 들이셨죠. 그리고 저희가 감독님 영화 충분히 도와드릴 수 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랬다.

지금 필립에게 전화를 했다는 건 윤예준에 대한 기사를 쓸 계획이라는 것이고,

<반다이크>가 윤예준의 기사를 쓴다면 유럽 전체가 윤예준을 알게 될 터였다.

필립이 침묵하자 요나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좋습니다. 그럼 윤예준 화가가 프랑스에 오는 건 정확히 언제쯤이겠습니까? 그 정도는 알려주시죠.

'필립영화사'는 여론의 관심을 여러번 경험해봤지만, 윤예준은 어린 아이였다.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관심은 종종 독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정도 아닐 뿐더러, 뭐든 쉽게 알려줘선 안 됐다.

“워낙 바쁜 친구라 일정도 좀 그렇습니다. 저희도 그쪽 일정 통보를 기다리는 입장이라서. 그럼 더 할 말 없으니 끊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필립은 가차없이 전화를 끊었다.

필립은 예준이 영화의 마케팅 수단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꽁꽁 감춰둘 수 있는 범재도 아니다.’

그 수준급의 그림들과 <반다이크>의 파급력.

어쩌면 <반다이크>가 윤예준이라는 존재를 눈치챈 순간 이미 확정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머지 않아 세계적인 화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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