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8)
필립은 부랴부랴 호텔을 나섰다.
샬롯은 낮부터 없었다.
역시 젊은 게 좋기는 좋았다.
필립은 이렇게 하루 사이에 시차적응을 끝내는 할리우드 배우 샬롯이 부러웠다.
호텔 앞엔 샬롯의 매니저가 서 있었다.
“왜 자네만 여기 있어?”
“갤러리에 주차 공간이 없습니다. 우선 빨리 이동하시죠. 감독님까지 데려다드린 뒤 다른 주차 공간 찾아야 해요.”
도슨트 일정에 맞추려면 지금 바로 출발해야 했다.
매니저는 차내에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갤러리에 먼저 도착한 샬롯이 곧 필립이 올 예정이라고 사람들에게 공언했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 말이 사실인지,
차가 갤러리 앞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필립’이라는 단어를 외치는 것도 들렸다.
“뭐야. 이 차 지금 선팅된 거 아니야?”
“아까 샬롯 데려다주면서 이 차로는 얼굴도장 제대로 찍었죠. 안에 누가 들었는지 모르는 사람 없을 걸요?”
통역사와 샬롯의 매니저는 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물렸다.
갤러리 반대편엔 제법 넓은 주차장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온갖 차량으로 들어차 더는 공간이 없었다.
기자들 틈을 잘 지나 용도를 알 수 없는 라인 바깥으로 서자 공간이 넉넉해졌다.
그곳엔 샬롯이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라고 도슨트 일정표를 미리 보내준 게 아닐 텐데.”
“미리 그림부터 보고 해설을 들으면 좋잖아요?”
샬롯은 지친 동시에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한 여성이 무언가를 크게 안내했다
통역가가 전달했다.
“2차 도슨트 시작한답니다. 이제 들어가면 됩니다.”
샬롯에게 프린트된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특별 전시장 앞에서 윤예준이 관람객들을 맞았다.
윤예준이 말하면 통역가가 동시에 통역했다.
첫 작품은 라는 작품이었다.
필립은 눈을 의심했다.
‘뭐야······?’
에두아르 마네의 <에밀졸라의 초상>이 변형된 형태였다.
유명한 작품을 함부로 변형하면 변형된 부분이 눈에 띄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원작을 알고 있는 필립이 의식해서 차이점을 찾아야 했다.
세부적인 부분들이 똑같다 못해 원작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완벽히 흉내낸 게 아니라 애초에 같은 화가가 그린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다음으로 소개된 작품은 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붓의 얼룩과 붓털의 사실적인 묘사가 일품이었다.
‘우선 테크닉은 우월하다. 이 그림 하나만으로 모든 그림에 대한 신뢰감을 쌓고 있어.’
단순 모사를 부탁한다면, 적어도 지금껏 필립이 만나본 모작 작가들 이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샬롯이 강조한 장점은 묘사력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윤예준에게 있었다.
이후 <환생>과 <모란> 연작을 소개했다.
필립은 <모란>에 주목했다.
필립이 알기로 색깔에 따라 물감의 질이 조금씩 다른데,
조명을 그림 전체에 반영하면서 질감까지 완전히 똑같이 그렸다.
이 정도면 복사기 수준이었다.
‘그림을 대상으로 한 모사에도 탑급일 것이다.’
앞서 을 봤을 때 느꼈던 생각에 확신을 얻었다.
윤예준은 필립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화가였다.
예술가의 시각에서 말이다.
필립은 예준을 모작 화가로 기용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아직 도슨트는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은 <작업실에서의 오후>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에서 윤예준의 마네적인 면을 발견했겠지만 필립은 달랐다.
이 작품은 마네의 <작업실에서의 오찬>을 오마주한 것이었다.
윤예준 자신도 마네의 그 빛 활용 기법을 충분히 구사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이미 마스터 레벨이었다.
마지막으로 윤예준은 관람객을 간이 암실로 이끌었다.
<이방인의 집>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쓸쓸한 감정에 필립의 가슴이 북받쳤다.
‘리틀 마네라······ 하지만 나는 윤예준과 마네의 차이점을 알 것 같다.’
마네가 인상주의의 시작이었다면, 윤예준은 인상주의의 완성이었다.
<이방인의 집>이 주는 인상은 너무 강렬해서 제 아무리 뛰어난 비평가라고 할지라도 쉽게 첨언하기 어려웠다.
그림의 학문적 권위를 구상하려 노력할 때마다 압도되어버렸기 때문에.
윤예준의 별명을 필립이 지었다면, 아마 리틀 마네가 아니라 ‘포스트 마네’라고 했을 것이었다.
아직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전시장은 조용했다.
그러나 잠시후 돌연 조명이 켜졌고,
눈물에 젖은 샬롯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조명을 받아 빛났다.
그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처음부터 윤예준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했다면
지금과는 내용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라는 걸.
특별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눈이 부셨지만 필립은 재빨리 예준을 찾았다.
불러세우는 데엔 간신히 성공했지만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말씀하시죠!”
전시장을 다급히 빠져나온 통역사가 말했다.
대화할 준비는 끝난 듯했다.
“어······ 우선 그림 정말 잘 봤습니다.”
예준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하답니다.”
“음. 그래.”
모작을 제안해야 했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 어수선했다.
분위기를 보니 굉장히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듯했다.
다시 이렇게 대화를 나눌 기회는 다시 안 올 수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필립 뷔르티라고 합니다. 이번에 미술 관련 영화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괜찮다면 예준군의 자문을 구하고 싶어요.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오늘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없겠습니까?”
예준은 웃었다.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초대장을 미리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신 곳을 알려주시면 약속 시간까지 찾아뵙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지. 이쪽에서 차량을 보내드리겠다고 전달해줘. 저희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통역사의 동시 통역은 한 3초쯤 느렸다.
그런데 윤예준은 마치 필립의 말을 먼저 이해한 듯 앞서 감사해하는 기색이었다.
‘뭐지? 화가 눈썰미로 짐작하는 건가?’
프랑스어를 알아들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그렇게나 대단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였다.
*
필립이라는 남자가 정말로 차량을 보내준 덕분에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장충동에 있는 유명한 호텔이었다.
내부 조명이 너무나도 화려해 어두워진 호텔 입구에서부터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1층에 있는 식당으로 즉시 들어섰다.
그러자 한쪽에 미리 앉아 있던 필립과 샬롯이 벌떡 일어섰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가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안 그래도 알아들었다.
“이젠 제가 동시통역까지 해야 합니까?”
“통역사가 퇴근했는데 어떡해? 그들은 외부인이기도 하고, 자네도 한국어가 되니까 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은 잠시 프랑스어로 떠들었다가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필립의 경우 보통의 정중함 정도였지만, 샬롯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니저 아저씨. 편하게 식사하세요.”
내가 말하자 셋은 모두 놀랐다.
“프랑스어를 하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냥······ 어릴 때 프랑스에서 잠깐 살았는데, 언어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결국엔 받아들였다.
통역이 있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님도 없는 참에 오랜만에 프랑스어를 사용해보고 싶었다.
“제가 사실 오는 길에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하지만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사진이라는 정도 말고는 크게 와닿는 게 없더군요. 영화가 도대체 뭡니까?”
최초의 영화라고 할 만한 게 프랑스인에게서 발명되긴 했지만 내가 죽은 직후의 일이었다.
예준의 10년치 기억을 더듬어봐도 영화라는 것에 대한 조예는 없었다.
종종 텔레비전으로 영상물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 모든 걸 통틀어 영화라고 일컫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화가 무엇이냐······ 솔직히 30년이 넘도록 영화만 해온 저지만, 아직 그 정의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움직이는 사진이고, 거기에 서사가 있다는 정도가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정의를 추가하더라도, 영화 중엔 항상 그의 반례들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필립은 그 말을 시작으로 영화라는 장르에 대해 깊이 천착해나갔다.
영상 서사물이라고 한다면 드라마와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또 단순히 서사물이라고 한다면 음악영화들은 가치가 없는 것이냐, 등등.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필립 스스로가 내놓은 답은 모두 ‘알 수 없다’였다.
필립의 그 고민과 함께 영화라는 게 무엇인지 어느정도 알 법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가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건 그 ‘알 수 없음’ 때문입니다. 정의를 알 수 없다는 건 모든 걸 담아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담아내고자 하는 건······ 바로 미술입니다.”
뭐든 담아낼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조류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새로운 미술 사조.’
나의 생애 목적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필립과 영화에 대한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필립은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주인공이 마침내 복원해낸 작품입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식물원에서>인데, 영화에 사용할 모작들이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아서······ 사실 그걸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에두아르 마네, <식물원에서> 그림, 각주
“그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내면 되는 겁니까?”
“네. 정확히 똑같이 그리면 됩니다. 아마 성공한다면 마네가 처음 그렸을 때와 같은 작품이 되겠죠.”
내가 그렸던 그림이었다.
그렸을 당시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나마 말년에 그렸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근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보았다.
“최근에 오르세에 있는 것 봐서요. 문제 없을것 같아요.”
필립과 샬롯이 놀라서 물었다.
“원본을 안봐도 괜찮겠어요?”
“한번이면 충분해요.”
필립은 휴대폰으로 <식물원에서>의 사진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갈곳을 잃은 손을 어쩌지도 못했다.
그저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
필립이 건넨 계약서엔 한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우선 따로 연락을 주겠다고 한 뒤 연락처를 받았다.
다음날, 갤러리 오픈을 준비가 끝나자마자 부모님에게 계약서를 보여줬다.
“전시회 초기 일정이 마무리되면 바로 해외로 가게 될 것 같아요.”
부모님은 계약서 내용을 나보다도 더 자세히 살폈다.
“필립이랑 같이 영화 작업을 하는 거야······?”
“영화에 나오는 미술 소품들 제작에 참여하는 정도일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제작하는 소품에 대해서는 사용료도 따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또 프랑스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전생의 고향이자 윤예준으로서도 좋은 인상이 남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그리는 건 내게 오로지 즐거운 일이었다.
프랑스에서의 계획, 이동 동선 등 부모님과 대화가 잘 마무리되자 개방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첫 번째 도슨트를 마치고 다시 갤러리 로비로 나왔다.
뒤이어 나오는 관람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어제도 몇 번 봤던 중년 여성이 오늘도 보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어제도 뵀죠?”
“오우. 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주시는 건가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언어는 영어였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모님도, 주목하는 이들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또 찾아와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응? 영어도 할 줄 아시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영어 배워요.”
아직 초등학교 2학년 수준에서는 배우고 있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교육과정까지는 여자도 모를 것이었다.
필립과의 대화 이후 고민해놓았던 핑계인데.
이렇게 하루 사이에 바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저는 양다오예라고 합니다.”
“윤예준입니다. 전시는 어떠셨나요?”
“리틀마네라는 별명에 충분히 동의하고도 남게 되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이방인의 집>.”
양다오예가 암실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조심히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저 나무 말이에요. 저건 마네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살았던 생가의 것과 구도가 굉장히 닮아 있어요. 이 사소한 디테일들이 제게 너무나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그리는 데에 집중했다.
전에 살던 집에서 내다보이는 나무의 구도라니.
그런 구도가 무의식에서 나왔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날카롭고 자세한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까지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선생님은 뭘 하시는 분이죠?”
“저는 그냥······ 중국에서 소일거리나 하며 벌어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을 굉장히 좋아하는 수집가이기도 하죠.”
환생한 이후로 비싸보이는 물건은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양다오예의 차림새는 매우 고급스러웠다.
그녀를 몇 번 봤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이유도 그녀의 차림새가 한 몫 했다.
소일거리라고는 했지만 아마도 어마어마한 부자일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주의 화풍을 가장 좋아해요. 거장들의 인상주의 작품들은······ 영원히 예술가 본인의 손길을 강하게 담고 있죠. 진한 냄새가 풍겨오는 그림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 사조의 시작을 연 에두아르 마네의 생가를 제가 한 번도 안 가봤겠어요?”
그 뒤로 양다오예는 나의 그림들을 다시 하나씩 꼽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심으로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림을 좀 사고 싶습니다. 여덟 작품 전부 다. 그래도 될까요?”
그림 구매 희망자와의 협의는 관장실을 이용하라고 했다.
나는 바로 양다오예를 그리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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