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7)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던 윤예준의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도기자는 최옥선 편집장과 함께 갤러리 화담을 방문했다.
갤러리는 문을 열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장님. 초대장 가져오셨어요?”
“이번에도 도슨트는 잡지사별로 한 장씩만 준 거 같아. 나한테는 포스터만 왔어.”
최옥선이 목에 건 기자증을 흔들며 말했다.
“어떡해요? 저랑 바꾸실래요?”
“아니야. 차라리 잘 됐어. 여기 많이 와봤댔지?”
“네.”
옥선은 모여든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럼 효정씨가 들어가서 도슨트 취재해. 나는 여기서 방문자들 좀 살필게. 보면 알겠지만 지금 미술계 사람들은 화가부터 평론가까지 다 왔다고 보면 돼.”
그리곤 도기자를 갤러리 건물 쪽으로 떠밀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잡지사별로 한 장씩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곳만 하더라도 꽤 되었다.
거기다 유명 평론가들까지 초대했을 테니 지금 빨리 줄을 서야 했다.
초대장 접수 라인과 일반 관람객 라인 사이에 줄을 쳐놓았다.
처음 방문했을 땐 상상도 못하는 규모였다.
“지금 개관합니다! 1차 도슨트 바로 진행할 테니 조심히 입장해주세요!”
갤러리 관장이 갤러리를 개방하며 외쳤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과 관람객들이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작품이 뭐라도 하나 망가진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다들 똑같은 생각일 것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일섭 특별전 전시장이었던 곳 입구엔 예준의 사진과 알파벳 ‘I’가 함께 걸려 있었다.
입구엔 예준이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완전 달라보인다. 차림새만 바뀐 것일 텐데.’
곳곳에서 셔터를 터뜨렸지만 섣불리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정도 조심성이라면, 예준이 일정 정도의 반열에 올랐다는 방증이 되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어느정도 특별 전시장 앞에 모여들었을 때 예준이 간결하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윤예준입니다. 모두 저의 개인전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작품 안내 시작하겠습니다.”
예준은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라는 제목의 그림이 가장 먼저 소개되었다.
리틀 마네라는 별명을 의식한 것인지 <에밀졸라의 초상>을 오마주한 작품이었다.
다음은 였다.
창가에 놓인 붓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어서 그 유명한 <환생>, 다음은 모란꽃을 여러 광선에 맞추어 그린 <모란> 연작이었다.
‘짧은 제목들이지만 하나같이 인상깊다.’
예준은 작품의 제목을 한 번 언급한 뒤 항상 3초쯤의 뜸을 들였다.
제목의 인상을 관람객들에게 심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전시회 구성을 제외하자면 제목은 작품의 첫 번째 연출이었다.
관람객은 제목에서 선사하는 인상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따라서 제목은 최대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조작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한정하지는 않았어.’
작품과 제목이 유기적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건 많은 관객들을 만나본 프로들만의 경지였다.
제목의 힘이 너무 약하면 임팩트가 없었다.
반대로 힘이 너무 세면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되었다.
관람객들은 예준이 제시한 제목으로부터 힌트를 받는 동시에 해석의 자유는 보장받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런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도 눈치를 못채겠어. 보통 천재가 아니다······’
도기자는 셔터를 최소화하며 적절히 사진을 촬영했다.
이윽고 나오는 <작업실에서의 오후> 앞에선 사람들이 잠시 동요했지만 금세 조용해졌다.
그림 속에 묘사된 인물이 동양화의 거장 ‘이수경’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도기자는 빠르게 수첩을 꺼내 <작업실에서의 오후>라는 작품 제목을 받아적고 메모했다.
마지막은 <이방인의 집>이었다.
특별 전시장 내에서도 조금 독립되도록 설계된 공간이 우선 모습을 드러냈다.
관람객으로서는 <이방인의 집>이라는 작품 제목을 먼저 마주한 뒤 그림을 보러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작품은 고전의 혼합이지만 전시는 현대적이네.’
그 또한 빠르게 메모해두었다.
암막 커튼을 지나 드디어 그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예준은 관람객들이 그림을 충분히 살필 수 있도록 비켜섰다.
황량하다 못해 처참하게까지 느껴지는 공터였다.
그림 속에 표현된 사물들 중 무엇 하나 쓸쓸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전시장 벽면에 연하게 그려진 날개 그림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도기자는 스스로가 이방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관람객들 틈에 섞여 예준의 어두운 <이방인의 집>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목은 집인데, 집이 없다······’
그림은 투박했고, 감각적이었다.
예준은 아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벌써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돌연 작품 하단의 조명이 켜졌다.
사람들은 잠시 놀랐다가 조명이 제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용히 물러섰다.
그림은 조명을 받았지만 빛을 반사시키지 않았다.
조명을 쬘 수 있도록 특수 처리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죽은 도시를 떠돌던 어느 밤 중 우연히 발견한 장소입니다.”
그림 속 광선은 단선적이었다.
마치 밤에 쌍라이트를 켜고 산길을 헤매다가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공간의 인상이었다.
“분리될수록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곳을 발견하는 순간 이 장소도, 나도 같은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준의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그림 앞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관람객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갤러리 외벽엔 특별전시회 포스터 ‘I’와 예준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윤민제 큐레이터와 화담 관장이 1차 도슨트를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도 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갤러리를 찾았다.
그 동안 방문자는 윤민제 큐레이터의 아내인 허연희가 맞았다.
최옥선은 파인더에 눈을 대고 방문객이 줄을 선 전체 풍경을 살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네.’
계간지 연재를 위해 자주 만나는 비평가들은 거의 다 화담 미술관을 찾았다.
최옥선은 거의 오후가 다 되어서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작품들마다 훌륭해.’
많은 단상을 떠오르게 만드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림은 도기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대신 옥선은 주변적인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한 일행이 휴대폰에 초대장을 표시해둔 채 갤러리로 들어왔다.
도슨트를 끝낸 윤예준과 윤민제가 그들을 반갑게 맞는 걸 보아 지인들로 보였다.
옥선은 그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어?!”
모민수와 인사를 나누던 예준이 건물 바깥을 가리키며 외쳤다.
옥선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바로 바깥으로 내달렸다.
모르긴 몰라도 매우 유명한 사람이 온 것이겠지.
수많은 인파를 뚫고 검정색 렌트 차량이 화담 갤러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 나온 예준은 그 차를 발견하곤 웃었다.
“저거 엄청 비싼 차 같은데, 설마······”
“설마라니? 뭐가 설마라는 거예요?”
다급해진 옥선이 직접 물었다.
“샤를로트 로렌스라는 분한테도 초대장을 보냈거든요. 그 분인가 해서요.”
샤를로트 로렌스라면 일전에 예준의 그림을 비싸게 사간 유명 여배우였다.
‘정말이구나.’
직감이 온 옥선은 바로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차는 곧 정차했고, 운전석과 보조석에서 남성이 한 명씩 내렸다.
그리고 뒷자석에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그 유명한 샬롯이 맞았다.
“샬롯이다!”
도처에서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워낙 유명하고 머리카락도 샛노랗기 때문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차에 타는 즉시 벗었는지,
가슴쪽 주머니엔 선글라스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샬롯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준 쪽으로 즉시 걸었다.
그러는 동안 두 명의 남성이 샬롯을 보좌하듯 길을 텄다.
한 명은 샬롯과 같은 같은 서양인,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서양인은 샬롯 쪽 사람이겠고······ 저 한국인은 동시통역가인가?’
샬롯이 예준의 앞에 멈춰 서선 무어라고 말하며 악수를 건넸다.
서양인 남성은 샬롯의 옆에, 한국인은 예준의 옆에 섰다.
샬롯이 말하면 한국인이 예준에게 말을 전달했다.
역시나였다.
옥선은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 최대한 다가가 섰다.
그 뒤엔 유명한 샬롯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환히 웃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깍쟁이 얼음 공주처럼 나오던데. 실제로는 아닌가보네.’
아역때 연기한 백설공주 역할은 여태까지도 회자되는 샬롯의 대표 캐릭터였다.
맥컬리 컬킨으로 치면 케빈 같은 거였다.
예준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들렸지만 샬롯과 통역가가 워낙에 속삭였기 때문에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옥선은 계속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좀 들릴 만한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그들은 대화를 멈췄다.
‘뭐야. 얘기 끝난 거야?’
옥선은 급한 대로 그들을 한 번 찍었다.
파인더 속 예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옥선과 눈을 마주친 예준이 물었다.
“필립 뷔르티라는 사람과 도슨트를 함께 듣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게 누군지 아세요?”
“필립 뷔르티?!”
<미드나잇 파리스>의 필립 뷔르티 감독을 말하는 건가?
샬롯이 언급했을 만한 필립 뷔르티라면 그뿐이었다.
“그 사람이 지금 여기 있다고?”
“아뇨, 곧 오신대요.”
옥선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필립 뷔르티의 이름을 검색했다.
[샤를로트 로렌스 등 유명 배우들이 참여한 필립 뷔르티의 신작 <시간을 거스르는 자>, 내달 크랭크인 예정]
함께 영화를 찍기로 했으니 한국까지 동행한 건가?
소꿉친구도 아니고, 그럴 리 없었다.
옥선은 <시간을 거스르는 자>의 줄거리까지 찾아보았다.
자세한 줄거리는 나오지 않았다.
위작을 판별하는 미술품 감정사와 복원가. 두 예술가의 황홀한 사랑 이야기.
그 두 문장이 다였다.
‘잠깐, 이거······ 미술 관련 영화야?’
촬영 관련 일로 이곳에 온 건가?
그럴 리 없었다.
훌륭한 미술관은 미국에도 많았다.
굳이 한국까지 올 일은 없었다.
‘아니면 화제의 화가인 예준에게 볼 일이?’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순 없었지만 감으로 기사를 쓸 순 없었다.
예준이 요즘 화제라고는 해도 해외 유명 감독이 찾아올 정도는 아닐 터였다.
그러니 굳이 찌라시 소설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 필립이 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으므로.
“예준군, 그 필립이라는 사람은······ 이 배우 누님이랑 함께 일하는 유명 감독이에요.”
“아, 그래요?”
“두 사람의 방문만으로도 큰 화제인데, 이거 기사로 나가도 되겠어요?”
예준은 잠시 샬롯을 살폈다.
통역사가 눈치를 살피는 동안 샬롯의 옆에 선 관계자가 샬롯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도 한국어는 어느정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들은 샬롯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제야 예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곳에 선글라스까지 벗고 내렸다면 몰래 다녀갈 생각은 애초에 아니었다.
멀리 노트북을 들고 선 FC코리아의 기자가 무언가를 빠르게 한 손으로 타이핑했다.
‘그래, 일해라 FCK.’
아무래도 사람이 더욱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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