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6)
전시회 일정이 벌써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특별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구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해보았다.
“원래는 텅 빈 공간이야. 안에 가벽을 세우고 조명도 바꾸고, 공간적인 면도 충분히 바꿀 수 있어. 서둘러야 하겠지만.”
아버지가 설명했다.
어머니는 직접 현장을 돌며 어떤 작품을 새로 그릴지까지도 구상한다고 했다.
공간에 어울리는 작품,
공간을 지배하는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경험해보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늦은 시간인데 특별 전시장 안으로 누군가 걸음을 옮겨 들어왔다.
“신인한테 밀려 방 빼려니까 뼈가 아프구만.”
일섭이었다.
아버지는 일섭을 보곤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오긴. 작품 빼러 왔지.”
아버지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섭과는 한 번도 대면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이일섭 화백님?”
일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글모를 눌러쓴 행색이 아니었다.
“어······!?”
아버지는 일섭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소리쳤다.
이제 일섭은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기사가 진짜였습니까?”
“그래. 참 눈치들 빠르더군. 그래도 예준군 특별전 전까지는 괜한 소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오늘은 소식 듣고 축하해주러 겸사겸사 들렀어.”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해선 일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충 예상은 했을 수도 있었다.
이일섭의 작업실을 빌리겠다는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이수경의 수제자라고 했으니.
하지만 내겐 특별히 캐묻지 않았다.
정체를 숨긴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이수경이 이일섭이라니.
차라리 내가 동시에 그 둘에게 잘 보이게 되었다는 우연을 믿는 게 덜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개인전 축하한다, 예준아.”
“감사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특별전을 연장하지 않은 건 내게 공간을 양보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든 김에 묻자 일섭은 부정했다.
“별뜻 없다. 여기서 평생 전시만 할 수도 없지 않느냐? 전시 기간도 끝났으니 이젠 팔아보기도 하고 해야지.”
그리곤 아버지를 보며 웃었다.
“자네도 고마웠네. 단독전 진행하기 힘들었는데, 자네 덕분에 얼마간 주목받을 수 있었어.”
“아니에요. 화백님 특별전으로 갤러리에서 본 이익이 더 큰 걸요.”
그들이 서로의 감사 인사를 사양하는 동안 대리인 경수씨가 들어왔다.
천으로 감싼 그림을 들고 말이다.
“무슨 그림인가요?”
아버지가 묻자 대리인이 눈치를 살폈다.
일섭이 조심히 그림을 풀기 시작했고, 대리인은 거들었다.
<작업실에서의 오후>였다.
“예준이에게 선물로 받은 그림이지. 이번에 필요할까 해서.”
그림을 소중히 간직한 모양이었다.
좋은 맞춤형 액자에 잘 끼워진 상태였다.
“제가 선물로 드린 걸요? 급하다고 이제와서 돌려받기는 좀 그렇죠.”
“사양하지 마라. 네 말대로 선물받았으니 이건 내 물건이다. 네 개인전 아주 관심이 뜨거울 텐데. 그 틈에 내 얼굴 그려진 내 물건 자랑 좀 하겠다는 거야. 안 되냐?”
일섭의 화법엔 이미 익숙했다.
진심을 말하기 이전에 나로선 결코 사양할 수 없는 말을 먼저 함으로써 의지를 관철했다.
“너무 잘 그려진 작품이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 빨리 세간에 공개돼야 해.”
솔직히 내게도 의미가 깊은 작품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할아버지. 제 전시회 꼭 와주세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누구를 초대할 생각이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일섭과 대리인 경수씨는 물론이고 <미,감>의 도기자, 미술학원 친구들, 모민수 원장님과 정선생님, 프랑스에서 본 장피에르 아저씨와 내 그림을 사준 샬롯까지.
내가 샬롯의 이름까지 말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초대장은 화담 갤러리 이름으로 해서 보낼게. 그런데 그 바쁜 사람이 올 수 있으려나?”
“제 그림도 사줬는데. 초대장은 보내는 게 도리죠.”
이번엔 직접 판매해야 했다.
그래도 시간 상 급하지 않았으니 내게 뜻깊은 사람들에게 보내기만 하더라도 무리는 없을 것이었다.
“전시회 이름은 뭘로 할까?”
아버지가 휴대폰을 들고 물었다.
그러고 보면 샬롯과 미술학원 친구들을 제외하면 모두 아버지의 개인 연락처에 등록된 사람들뿐이었다.
정선생님은 모민수 원장선생님을 통해 연락처를 받을 수도 있었고.
“벌써 초대장을 보낼 준비가 끝난 거예요?”
“전시회 이름만 적어넣으면 되지. 초대장은 화담 갤러리 양식 하나랑 예준이 네 개인전 디자인 하나 해서 총 두 장 전달될 거야.”
작품을 미리 확인한 어머니가 직접 초대장을 디자인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초대장과 포스터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환생>의 분위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울트라마린 색깔이 많이 차용된 디자인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그럼 전시회 이름은 ‘I’로 할게요.”
“알파벳? 대문자로 I?”
<환생>과 <이방인의 집> 작품을 비롯해
이번 전시회는 나를 가장 크게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런 전시회라면 이름도 ‘나’여야만 했다.
아버지와 전시회 초대로 잠시 대화하는 사이 일섭과 대리인은 작품 정리를 마쳤다.
작품을 무사히 옮기기 위해 특수 차량을 대절해왔다고 했다.
“그럼 이만 가보마. 전시회 때 보자.”
일섭이 돌아간 후 본격적으로 텅 빈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작품 가짓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와 진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작품의 배치와 공간에 대해 논의했다.
*
어느덧 대본 리딩 일정마저 끝나가고 있었다.
주연급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크랭크 인을 위한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보면 됐다.
미술작품만 제외하면 말이다.
샬롯은 간밤에 윤예준의 개인전 초대장을 받았다.
서울옥션에서 <블랑쉬 네즈>를 사던 날, 매니저가 윤예준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개인 연락처를 남겼다고 했다.
더 팔 만한 그림이 있으면 보여달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가 보내온 사진은 개인전 포스터와 초대장이었다.
생각보다 일처리가 적극적이었다.
‘역시 개인전을 열 정도면 어엿한 화가잖아.’
바로 며칠 뒤였다.
대본을 봐도 가장 중요한 부분의 대사가 비어 있었다.
바로 복원해낸 작품에 대해 남녀 주인공이 의견을 나누는 부분 말이었다.
슬슬 필립도 조마조마할 것이었다.
배우들 일정은 미룰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젠 결정해야 했다.
리딩이 끝난 뒤 샬롯은 필립의 뒤를 쫓았다.
“감독님!”
필립이 피곤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샬롯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비행기표를 건넸다.
낮부터 인쇄해둔 것이었다.
필립은 비행기표에 적힌 목적지를 확인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데이트 신청엔 영화표 정도가 적당해. 이건 좀 과하지 않나?”
“그만 현실을 직시하세요. 더는 미룰 수 없고, 어차피 감독님은 만족하지 못한 상태로 작품 들어가게 되실 거예요.”
필립은 결국 표를 받아들었다.
“그래서. 다른 일정도 많은 내가 그 화가님을 뵈러 서울까지 날아가선 그림 좀 그려보쇼, 하고 요구라도 해야 한단 건가?”
샬롯은 윤예준의 개인전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그럴 필욘 없어요. 그냥 가서, 보고, 오면 되니까.”
예준의 작품은 분명 필립뿐만 아니라 샬롯에게도 감동을 줄 것이었다.
그 그림이라면 ‘진짜’를 연기할 수 있었다.
감독도 그간 예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조사를 해봤을 터였다.
“시간낭비는 아닐 거예요. 말씀하셨듯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림이죠. 감독님은 그림만 잘 담아내면 돼요. 그럴 만한 그림일 테니.”
“거 기분 좋게도 말하는군.”
필립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이미 많은 모작을 보았기 때문에 남은 건 그 중 고르는 것뿐이었다.
한국에 다녀올 시간은 충분했다.
가보고 정 아니면 영화사로 전화해 의견만 미리 전달하면 끝인 일이었다.
“좋아! 알겠다고. 이런 젠장!”
필립은 비행기표를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
퍼스트석에 나란히 앉은 샬롯과 필립은 썬글라스를 낀 채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꼬았다.
프라이빗 팻말을 걸어놓지 않는 이상 승무원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의 자리를 살피며 필요한 것을 물었다.
필립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에 반해 샬롯은 조금 기뻤다.
그녀에게도 성공한 예술 영화 필모그래피가 많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예준의 그림이라면 가능했다.
이번 일로 그 아이와 인연을 쌓을 수도 있었고
나머지 그림들도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샬롯이 와인을 들어올리자 필립이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우유부단한 감독 만난 덕분에 이렇게 눈치 볼 필요 없이 그림 구경도 가고. 아주 좋으시겠어.”
“우유부단하기는요. 매우 유능한 감독님 덕분이죠.”
샬롯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유능하다는 평가는 당연히 과장이 아니었다.
필립은 세계적인 영화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레전더리필름>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박차고 나와 프랑스에 '필립영화사'를 차렸다.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들 했다지만, 필립은 보란듯이 성공했다.
<레전더리필름>을 퇴사한 후로 3년 사이에 시리즈 영화 <미드나잇 파리스>, <선셋 인 로마>, <원더풀 문 샷>을 크게 흥행시킨 것이었다.
“그래도 이러려고 <레전더리필름>을 나온 거 아니세요?”
“그랬지. 오늘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후회하게 되었지만.”
필립은 깐깐한 사람이었다.
작품마다 장인정신을 가지고 깐깐하게 임했고,
그렇기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런 갑작스러운 한국 방문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은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이었지만 말이다.
“이봐 샬롯. 예술영화를 성공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뭔줄 아나?”
“그야 감독의 예술혼이죠.”
“천만의 말씀. 바로 감독의 권력이다.”
감독의 예술혼 운운한 것도 필립의 기분을 어르기 위한 것이었지만, 필립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필립답지 않은 답변이었다.
영화는 영화사의 집단 창작물이었다.
총감독과 각본가, 현장연출가, 그래픽 디자이너와 촬영, 편집, 음향 등 각 파트별 담당 감독들, 그리고 배우까지.
그 모든 사람들이 온전히 참여하여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이는 굳이 필립뿐만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믿는 신념이었다.
“감독이 힘이 없으면 투자자들 입맛에 맞춰 작품이 산으로 가게 돼. 또 거장이라는 권위가 없으면 대중성을 등진 시도를 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해지지. 쏟아부어야 할 곳에 쏟아붓지 못하고, 쏟아부을 필요도 없는 곳에 시간을 탕진하기 마련이야. 어떤 배역에는 이 배우가 제격인데 그놈의 흥행이 문제야. 어떤 장면은 뉴욕에서 찍는 게 어울리는데 투자를 마이애미에서 받았어. 아직 찍어야 할 장면이 산더미인데 제작비가 부족하대!”
필립은 열변을 토했다.
“힘이 있는 감독은 그런 주변적인 조건들에 흔들리지 않아도 돼. 그 이후에야 우리 같은 영화인들이 예술혼을 쏟든 뭘 쏟든 해볼 수 있는 거라고. 나는 <레전더리필름>에서 그런 꼴을 미치게 많이 겪었어. 그런 현실적인 제약들에 더해서 영화사 성향까지 신경써야 하지. 선임 감독 신경써야 하지. 그게 창작인가? 공장이지.”
“그래도 지금은 뭐, 그 권력 얻으신 거죠.”
“......”
필립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샬롯은 필립과 여러번 작업을 함께하며 그의 성향을 어느정도 알았지만, 감독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심정까지는 자세히 몰랐다.
“감독은 창작 욕심이 있는데······ 그렇게나 조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못된 마음도 먹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기 싫어서 <레전더리필름>을 나온 거니까.”
“못된 마음을 먹게 된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 영화를 밀어붙일 방법을 찾게 된다는 거야. 뭐.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 꼬마를 영화에 관여시켜서 한국 쪽 상영관 잡는 데에 이용해먹는다든가 말이야.”
필립이 걱정하고 있는 한 가지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윤예준은 절대 마케팅이 아니에요.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아주 그러시겠지. 거장 에두아르 마네보다 아주 조금 덜 위대한 ‘리틀 마네’이시니까.”
“그렇게 계속 의심해보세요. 어차피 비행기는 서울로 가고 있으니.”
두 사람은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 동안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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