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2)
갑작스럽게 정학이 등장하는 바람에 시간이 비어버렸다.
정학의 무례함과 모네 위작, 그들 각각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불쾌한 것들이었다.
동시에 겪게 되니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아빠와 딸이라니.’
역시 이곳도 미술계는 좁았다.
아버지가 극성이니 딸도 화가는 되겠군.
좋은 화가가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나는 도연의 그림과 카밀라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그러다 MMS 미술학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학원에 나간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에도 없었다.
비싼 학원비를 내고 어렵사리 등록한 것이었다.
그 동안 그림을 비싸게 팔아 이익을 보기는 했지만
돈 한 푼도 아깝기는 매한가지였다.
작업실엔 아직도 새로운 미술도구를 사다 놓을 공간이 한참 남아 있었으니까.
학원 앞 입간판엔 <블랑쉬 네즈>와 사고의 전환 화왕계 그림이 인쇄돼 있었었다.
[서울 미술 실기 대회 최우수상, 중등부 특별반 윤예준]
모르는 새 상을 또 탔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학원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크리스마스는 휴일이었지만, 다들 이른 시간부터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이곳에서 현대미술의 모든 것을 알아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그림에 열을 올리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초심을 찾을 수 있었다.
‘계속 초심만 가지고 있을 순 없지.’
사고의 전환 과제를 할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빨리 성장하려면 학원은 떠나는 게 낫다는 것을.
또 내 목적을 이루는 데에 이곳에서의 활동이 시간적으로 손해처럼 느껴진다면
다른 사람에게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게 옳았다.
“어? 예준이 오랜만이네?”
정선생님이었다.
인사를 하자 안부를 물어왔다.
“잡지도 보고 소식 계속 접하고 있지. 역시 예준이 대단하더라. 이수경 화백님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고?”
“생각보다 우연이 자주 겹치더라구요.”
정선생님은 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도연에 의하면 이번 휴일엔 고등학생들만 학원에 나온다고 했다.
담당 학생들이 등원하지 않았는데도 학원에 있다는 것은
정선생님도 상당히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었다.
“그림 그리러 온 거 아니면 잠깐 얘기 좀 나눌까?”
정선생님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담실 방향이었다.
정선생님은 내가 학원에서 여태까지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씩 가리키며 그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이야기했다.
처음엔 정선생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한민국에서 미술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바로 입시미술이야. 그 중에서도 우리 학원이 입시 성공률이 가장 높은 최고 명문이고, 나는 이곳에서 특별반 선생님을 하고 있어. 나름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버지한테야 원장선생님이 거리낌 없는 친구일지는 몰라도
학원 원생들 눈에는 훌륭한 미술가였다.
그런 그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이라면 오히려 별 볼일 없기가 힘든 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1등이 된다고 모든 걸 품을 수는 없는 것 같아. 예준이, 네가 나한테는 그래. 나와 모원장님 둘 다 미술을 할 만큼 한 사람인데, 그래도 예준이는 가르칠 수가 없어.”
정선생님의 표정과 말투는 굉장히 차분했다.
정학과는 비교되는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일주일에 사흘만 나오는 과정도 조금 불안불안하고······ 저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빠지는 날들이 너무 많았어요.”
“요즘 그렇긴 했지.”
“네. 그래서 차라리 다른 기회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다양한 미술을 하고 싶기도 하구요.”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의사를 전했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선생님한테 많이 배웠어요.”
“다행이구나.”
정선생님이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아, 그리고. 이 그림들은 이제 어떡할래?”
정선생님이 <모란>을 포함한 내 그림들을 모두 건네며 물었다.
“더 많은 사람들 보여주고 싶어요. 가져가야죠.”
*
‘뭘 안다고 위작이라는 거야? 건방진 꼬맹이 같으니.’
하지만 예준이라는 꼬마는 확신하는 듯했다.
위작 감별은 그림 실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베테랑 감정사들도 기계를 병용하지 않는가.
그런 어려운 사안을 한눈에.
그것도 그렇게 쉽게 파악하다니.
이것저것 포함해서 8억이나 주고 산 그림이었다.
하지만 못내 예준의 그림 실력이 마음에 걸렸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면 보통 눈썰미도 좋지······’
정학은 사내 감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매입해온 <포르비예의 센 강>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 지금 당장 사택으로 오도록 해.”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그림은 왜······
감정사가 눈치없이 되묻자 억눌렀던 화가 폭발했다.
“위작 중에서도 최상급. 그런데 방금 한 눈에 알아냈어. 분광기? 감별카메라? 그딴 것 없이도 그냥 꼬맹이 눈에 바로 들켜버렸다고.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야?”
-......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정학은 끊지도 않고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인가.
그것도 10살배기 꼬맹이가.
분이 다 풀리지 않은 정학은 괜히 책상을 쾅 내리쳤다.
*
모란 꽃을 사다가 <모란> 옆 창가에 두었다.
여전히 진짜 모란만 못한 그림이었다.
모두가 그림을 칭찬했지만 내겐 보였다.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진짜 꽃의 훔칠 수 없는 아름다움.
예술은 불완전하기 때문에야말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내 꿈은 언제나 저 아름다움을 완전히 화폭에 옮겨담는 일이었다.
작업실이 생기니 역시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속도가 붙었다.
순식간에 <모란>의 연작 두 점을 그려냈다.
하나는 낮의 모란, 하나는 밤의 모란이었다.
일부러 크기는 같게 했다.
학원에서 잘 보관해준 덕에 첫 번째 <모란>은 방금 그린 것처럼 생생했다.
그것을 낮의 모란과 밤의 모란 사이에 두고 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 모란의 정직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났다.
‘손이 아프기는커녕 여전히 근질거린다.’
전에는 붓을 잠깐만 들어도 팔목이 부러질 듯 저려왔다.
하지만 이 어린 손은 지칠 줄을 몰랐다.
아직 근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체력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이 붓이 도움이 되기는 하는군.’
아버지가 구해다준 맞춤형 소형 붓이었다.
확실히 이 붓을 사용할 때 손의 피로가 훨씬 적었다.
내 팔의 부담을 아버지가 나눠 져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 세척되지 않은 붓은 물감을 얼룩덜룩 뒤집어쓰고 있었다.
붓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게 하는 도구였다.
그럼 여기 물감을 묻게 하는 건 뭐지?
붓을 창가에 조심히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봤다.
‘그저 붓일 뿐만이 아니다.’
죽을 때도, 예준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도 나는 붓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환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붓은 나로 하여금 그리게 했고, 죽은 뒤에도 계속 그리게 했다.
‘계속 그려야 한다. 저 붓으로 인해.’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저 붓을 작게 했다.
그림에 대한 나의 욕심이 저 붓을 얼룩지게 했다.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와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붓으로 그림을 그려보기만 했지, 오히려 그것을 자세히 그리려니 어렵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과 환생, 아버지의 사랑과 나의 욕심, 열정.’
붓 털 한 올 한 올마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엉켜 있다.
그걸 관찰하는 나의 순간적인 인상을 자세히, 강하게 담아내야 했다.
다른 붓을 꺼내 그것을 그렸다.
그 동안 깨달았다.
그 많은 감정들이, 감사하게도 나의 꿈이라는 한 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는 것을.
나의 꿈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저 붓에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나의 꿈, 가 캔버스 위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필립영화사 사무실.
필립은 여러 모작 화가들이 보내온 그림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너무 사소한 것에 매달리는가?’
영화 제작이 늦어지는 걸 두고 주변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충고를 해왔다.
‘그런 것쯤’이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들의 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화에 사소한 부분이란 건 없다.’
영화의 짧은 한 씬, 프레임 속 작은 소품 하나마저도 필립에겐 중요했다.
현재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상업영화에 목을 맸다.
그렇게 명성을 쌓은 결과 드디어 시작하게 된 필립만의 영화였다.
이번 <시간을 거스르는 자>를 구상해온 세월만 몇 년이었던지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충하라고? 절대 그럴 수 없지.’
지금까지 작업해왔던 작품들 중 그 무엇보다도 크게 혼신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필립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고 있었다.
극 내에서 복원가가 완벽히 복원해낸 작품으로 쓸 것들이었다.
원본 작품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세히 뜯어보면 비슷하지도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모작 화가들도 화가는 화가니까. 기계처럼 똑같이만 그리는 게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
그들의 모작에선 그들 개인의 개성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복사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개성이 표현’되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싸구려 복제품을 쓸 수도 없고,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와중에 어린애나 추천하고 말이야.’
샬롯만 해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상업영화판에서 관계를 쌓았고, 이번 작품 주인공 역할에도 어울렸다.
더욱이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아 특히나 적합한 배우이기도 했다.
매우 잘 나가는 배우였기 때문에 홍보 효과는 톡톡히 보고 있지만, 스캔들이 터진다면 작품도 얄짤없이 실패였다.
딴짓 없이 그냥 그림이나 사러 돌아다니는 걸 보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디서 이상한 안목으로 어린애 그림을 보고 와서는 함부로 추천하다니.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샬롯이었다.
“무슨 일이야?”
모작 작가 이야기를 꺼낸 뒤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가 보내드린 기사는 읽으셨어요?
“아, 읽었지. 무슨 리틀 마네인가 뭔가. 근데 이걸 어쩌나. 나도 어릴 땐 별명이 리틀 히치콕이었는데 말이야.”
-제발 자세히 좀 봐주세요. 제가 이번에 산 그림도 사진 보내드렸잖아요? 그것까지 다 본 거 맞으시죠?
봤다. 확실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
사진으로는 그림의 진짜 느낌을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왜 샬롯이 그렇게 그 그림을 아끼는지 정도는 알 만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그리는 화가는 많았다.
그 한국의 리틀 마네 말고도 말이다.
“이봐 샬롯. 자네 이번 영화를 장난으로 생각하나? 다른 때보다 배급사 투자가 적다고 내가 뭐, 삼류 다큐라도 찍으려는 줄 알아?”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 애는 예술가의 눈빛을 하고 있었어요. 필립 감독님의 눈과 닮았다구요. 이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는 화가는 그 애밖에 없어요.
거대 영화사를 온갖 군데 오가며 배우 일을 해왔던 샬롯이었다.
프로 제작자들을 여럿 만나왔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아이의 그림은 자세히 봤어. 하지만 이번에 필요한 건 모작 작가야. 그 아이의 그림이 모작으로서 부족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고. 대체 이렇게까지 말하는 근거가 뭐야? 그 눈빛이니 뭐니 하는 거 말고 말이야.”
-제가 비싼 돈 주고 아이의 그림을 산 건, 그 그림 자체가 훌륭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그림을 그린 그 아이 본인도 자신의 그림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어요. 그림에 대해 믿음이 가잖아요. 욕심만 가득해서 오로지 값을 받기 위해 그려진 그림은 저도 사주기 싫어요. 그래서 이번 예술 영화에 임하는 감독님의 심정도 잘 아는 편이죠.
샬롯이 보내준 기사는 할리우드 연예계 기사였다.
샬롯이 그 그림을 샀기 때문에야 리틀 마네라는 소년의 이름이 겨우 기사에 난 수준이었다.
기사에서 인용한 인터뷰 내용이 인상 깊기는 했다.
-그 아이는 평생에 걸쳐 마네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 정도면 사랑이죠. 모작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그 정도는 사랑해야 하는 거예요.
샬롯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도, 인터뷰도 신뢰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 아이가 그렸다는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네 말이 옳다고 치자. 그 말로 투자자들까지 설득시킬 거야? 영화 소품으로, 그것도 미술 영화에서 10살짜리 아이가 그린 그림을 활용한다고 하면 투자자들이 안심을 하겠어?”
-그거야 그 아이의 진가를 알리기만 하면······
“그러니까 무슨 수로? 이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군. 영화가 잘 되길 바란다면 샬롯 자네가 할 일은 모작 작가를 구하는 게 아니라 한 시라도 더 많이 대본 연습을 하는 것뿐이야.”
전화를 아예 끊어버리려는 찰나 수화기 너머에서 샬롯이 외쳤다.
-그러니까 윤예준에게 그럴 만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걸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거라면 문제 없어요. 한국에서의 시끌벅적한 소문이 곧 유럽에까지 전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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