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5화 (25/241)

착각(9)

다음날 바로 방문해보았지만 일섭은 집에 없었다.

대신 종종 나를 차로 태워다주던 청년이 문을 열어줘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잠깐 장을 보러 나갔다고 했다.

“걸어서 가신 거예요?”

“가끔 산책삼아 다녀오셔. 그나저나 오늘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2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여전히 붓과 물감들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유의 진한 먹 냄새.

내게 처음으로 영감을 준 사람의 작업실이었다.

‘어디든 이만한 좋은 작업실은 없겠지.’

공간만 마련된다고 해서 일섭의 작업실 같은 분위기가 날 수는 없었다.

화가의 작업실엔 그림뿐만 아니라 주인의 열정과 영혼도 담기는 법이었다.

일섭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았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그것이 가감없이 쌓여 풍기는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전쟁으로 잃었던 나의 옛 아틀리에가 그리워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공간을 빌리겠습니다.’

나는 연필을 들고 바로 캔버스 앞에 앉아 스케치를 시작했다.

화가의 열정과 영혼이 작업실에 담겼다면, 그 작업실은 다시 화가의 몸에 묻었다.

내가 어디서든 나의 옛 아틀리에에서의 배치로 캔버스와 사물을 배치해 그림을 그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쌓아놓은 그림마다 암막 천을 덮어두면 대낮에도 흩어지지 않는 그늘이 작업실 한편에 모였다.

나는 그곳에 앉았다.

모든 빛은 사물로.

그것이 바로 나의 시선이었다.

어둠 속에서 내다보면 모든 것이 빛났으므로.

일섭의 작업실을 옮겨 그렸다.

나의 이 시선을, 일섭이라면 백 번도 이해하고 남을 것이었다.

캔버스 앞에서 일어난 일섭이 창가를 향해 걷는 모습이었다.

일섭을 기준으로 등 뒤는 어둠, 눈 앞은 빛이었다.

그리다보니 나의 예전 작품, <작업실에서의 오찬>과 비슷하다.

*<작업실에서의 오찬> 그림, 각주

나와 비슷한 예술관을 가진 이의 작업실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밀졸라의 초상> 모작보다도 작업이 빨랐다.

적당한 제목으로는, 작업실에서의······ 오후. 그 밖엔 어울리는 게 없었다.

작업을 마친 그 순간, 아래층에서 덜컹 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보면 역시나 일섭이 알록달록한 박스를 들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아이고. 조만간 온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서 어쩌냐.”

“제가 미리 말도 안 하고 찾아온 걸요 뭐. 그리고 얼마 안 기다렸어요.”

내가 도착한 지 두 시간도 넘게 지났다.

“자, 일단. 이리 와라.”

일섭이 박스를 내려놓고 손짓했다.

다가가자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림도 봤고 소식도 들었다. 아주 훌륭히 잘했어.”

일섭에게는 화가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질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기 전 나와 연령이 비슷해서인지, 일섭은 거리낌 없는 친구 같았다.

언론의 극찬, 나를 알아보는 낯선이, 그 다음은 사심 없는 순수한 축하라니.

얼떨떨했던 마음이 조금씩 감격으로 자리잡았다.

“폭로 기사 일은 좀 어떠세요?”

상황만 따졌을 때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수경의 제자라는 게 밝혀지면 세간의 관심이 더 뜨거워질 테니까.

하지만 일섭의 입장에서는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 일섭은 밝히고 싶어하지 않아 했다.

“아주 피곤하지. 계속 잡아떼고 있다. 애초에 터무니없다고 안 믿는 사람도 많을 거고.”

지금도 거의 잠정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뿐더러, 언젠간 완전히 밝혀질 일이었다.

“계속 숨기시게요?”

“아직은 그럴 셈이다.”

소스는 던져졌다.

이일섭이 이수경이었다는 거대한 건수가 언론에 던져진 이상 온갖 파파라치들이 검증하려 들 것이었다.

이렇게 쉽게 혼자 장을 다녀오는 일섭이라면 들키는 건 시간 문제였다.

들킬 바에는 직접 밝히는 게 나았다.

“내친 김에 지금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왜?”

“언젠가 밝혀질 거라면 빨리 밝혀질수록 비난도 적을 거고······ 지금이 여러모로 시끄러워서 틈 타기 좋잖아요.”

나와 관련된 기사도 세간에 많았다.

그게 일섭에게는 여론의 방파제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이 관람객들을 진실로 마주할 좋은 시기가 될 거예요.”

일섭이 나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지.”

일섭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나는 일섭이 세간에 당당히 걸어나오기를 바랐다.

그래도 갑자기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나는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빨리도 물어본다. 네가 아무리 비범한 꼬마라고는 해도 이걸 싫어하기는 힘들겠지. 과자다.”

단 것은 싫어하는 나였다.

하지만 감사히 받았다.

“제 선물은 2층 놀이터에 두고 나왔어요.”

“혹시 그림이냐?”

“네.”

일섭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허허허··· <블랑쉬 네즈> 그려서 판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림을 그려?”

일섭은 놀라면서도 바로 청년을 불렀다.

그리곤 과자 세트를 차에 실어놔 달라고 했다.

나를 집까지 차로 바래다줄 모양이었다.

작업실로 올라가 나의 그림을 함께 보았다.

어둠 속의 사물들은 초점 바깥의 상이기에 뿌옇게 그렸다.

빛을 향해 걸어나오는 일섭의 모습은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렸다.

일섭은 그림을 말없이 잠자코 바라보았다.

“나를 그렸구나.”

“맞아요.”

언뜻 눈시울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예준아.”

“네.”

“네가 나한테 끼친 영향 중 나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 폭로 기사마저도 말이다.”

“그 일로 곤란해지신 걸요.”

“그렇지 않아. 이수경의 이름이 이일섭의 활동을 가로막을 거라는 불안감, 그리고 사실을 밝혔을 때 언론의 뭇매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내가 정체를 선뜻 밝히지 못하는 건 그 이유가 다가 아니야.”

그건 그랬다.

더 큰 유명세가 발목을 잡는 어려움은 겪어본 적 없었지만,

언론의 뭇매는 내게도 익숙했다.

이일섭은 겨우 그런 것에 머뭇거릴 위인이 아니었다.

“네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그냥 이수경의 명성을 버리는 게 아까웠던 거야.”

이일섭과 이수경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이일섭 화가의 다재다능함을 알릴 계기가 되지 못했다.

그러기엔 정통 한국화가 이수경의 타이틀이 너무 순수하고 위대했다.

그런 이수경이 이일섭의 현대 미술을 해왔다는 게 알려지면 정통파들의 외면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실제로 어떨지는 상황이 닥쳐봐야 알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 동안 작업실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이번에 돈이 좀 생겨서, 저도 작업실을 구하게 됐어요.”

“오호. 그거 잘됐구나.”

일섭이 나와 잠시 눈을 맞추며 미소지었다.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마냥 축하할 수는 없는 기색이었다.

“하긴. 계속 이 먼 곳까지 올 수는 없겠지.”

“아니에요. 자주 태워주셨잖아요. 교통도 좋고.”

일섭은 한숨을 쉬곤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숨이 차는 법이었다.

일섭은 그 숨을 쉬고 있었다.

“너는 나처럼 겁쟁이로 늙지 말아라. 가진 것을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해. 덜어낼 것을 덜어내. 그래야 더 넓은 작업실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거야.”

역시 일섭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저도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길 빌게요. 아마도 시간문제겠죠.”

“고맙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해봐야겠어. 작업실에 정붙이면 불러줘라. 그땐 내가 가서 그려주마.”

“자주 놀러올 거예요. 어차피 집 근처니까. 저도 이 작업실이 더 좋거든요.”

일섭은 마지막으로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일섭에게 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더는 도와줄 게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과감히 보내주어야만 하는.

내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일섭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다시 <작업실에서의 오후>를 들여다보았다.

*

일을 마치고 돌아온 샬롯은 우선 소파에 앉았다.

그럼 <블랑쉬 네즈>를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많이 돌려야 해서 목이 아팠다.

소파에 완전히 누우면 등받이에 가렸고, 그렇다고 그림 쪽으로 엎드리기엔 팔걸이 높이가 어중간했다.

샬롯은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계속 그림만 보았다.

소파에서 자세를 계속 고치면서.

“감상을 하는 건지 감시를 하는 건지. 차라리 소파를 돌려버리지 그래?”

“안 돼. 지금 배치가 최고야. 소파를 돌리면 공간이 어수선해지잖아.”

샬롯은 매니저의 제안을 일축하고는 계속 그림에 집중했다.

아무리 좋아도 그림은 그림이었다.

조금 보고 있다보면 질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년 전에 잃어버렸던 애착 인형을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한화로 3억8천. 이동에 든 비용부터 세금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은 돈이 들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거저 얻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뭐. 어린 화가니 보관만 잘 해놓으면 가격이 몇 배는 뛰겠더군.”

“헛소리! 몇 배는커녕 몇십 배가 뛰어도 절대 안 팔아.”

“그것 참. 백마담이 섭섭해하겠어.”

백마담. 샬롯과 가격 경쟁을 붙었던 한국인 수집가였다.

“그러고 보니까 백마담도 관심깨나 받는 모양이던데. 인터뷰 때 계속 나를 가리켰어.”

“그거야 네 이야기를 했으니까.”

“뭐라고 했는데?”

매니저가 피식 웃었다.

“그림 귀신에 단단히 홀려서 미쳐버린 여자를 어떻게 경매에서 이기겠느냐고 하던데?”

“흥. 지갑이 동나서 백기를 든 주제에 기세좋게 말하는군.”

샬롯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마음이 빈곤해졌다고 느꼈다.

연기로 더 이상 이룰 게 없어진 뒤부터는 돈을 모으는 것으로 성장의 기쁨을 대신 했다.

그런 샬롯에겐 돈도 중요한 자부심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도 궁금하긴 했어. 진짜로 그림이 얼마나 비싸든 살 생각이었던 거야? 아니면 적당히 오르다 말겠지, 한 거야?”

샬롯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낙찰 경쟁에 임했는지 돌이켜보았다.

물론 가격대가 샬롯의 전재산을 쏟아부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배당할 수 있었던 것도 컸다.

‘정말 한화로 3억이 아니라 3000억, 3조원이었어도 이 그림을 얻고야 말았을까?’

터무니 없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중요한 물음이었다.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뭐. 내가 나앉을 것 같았으면 네가 알아서 말려줬겠지.”

“흠, 그런가? 돈이 부족해서 부랴부랴 환전했던 건 기억이 안 나나보지?”

샬롯과 매니저는 한국으로 입국할 때 30만 달러만 가지고 들어갔다.

환전하면 3억 5천에 조금 넘는 금액이었고, 그마저도 여비로 들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샬롯은 돈이 부족했던 생각을 하면 아찔해졌다.

서울 거리의 부랑자가 될 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저 그림을 못살 뻔했던 거잖아.”

입금 기한을 넘기지 않고 추가로 환전해와서 그림을 살 수 있었다.

매니저는 샬롯의 말에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아무튼 화가가 어리다고 해서 절대 무시할 바는 못돼. 그 꼬마의 눈빛이 아주 남달랐어.”

“뭐야. 언제 눈빛까지 봤어?”

샬롯이 물었다.

“네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면서 패들 흔드는 동안. 너와 백마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그 애의 눈빛을 봤지.”

“어땠어?”

“나도 애가 그렸다기에 처음엔 의심부터 했지. 그런데 그 눈빛만으로 믿음이 갔어. 예술가는 작품을 발표하고 어떤 감정이든 가질 수 있지. 거만할 수도 있고, 설렐 수도 있고. 그 꼬마는 감사해 마지않는 눈빛이었어. 너와 백마담, 두 사람한테 말이야.”

샬롯도 보았다.

경매사가 경매봉을 내려쳐 낙찰이 확정되는 순간 샬롯은 혼이 다 나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윤예준을 돌아보았다.

화가로서 처음 팔아보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 순수함을 단연코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분야는 달랐지만 샬롯도 어엿한 예술인이었다.

“그래······ 아주 아름다운 눈빛이었지.”

“이봐. 얌전히 감격에 도취돼 있는 건 환영이지만 정신은 어느정도 붙잡고 있으라고. 네 휴대폰이 거의 이륙할 지경이잖아.”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샬롯의 휴대폰이 소파에서 진동을 울리며 조금씩 회전했다.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필립 감독이었다.

샬롯은 한숨만 한 번 쉬고 즉시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오우. 전화를 상당히 빨리 받는군. 덕분에 작업 간 여유가 좀 생겼어.

전화를 거는 동안 오랜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는 뜻이었다.

“저도 목욕은 해야죠. 무슨 일이세요?”

-이번 작품 준비가 ‘대부분’ 끝났어. 대본 보냈는데 연락이 없기에 전화했지.

이번에 샬롯이 참여하게 된 영화 <시간을 되돌리는 자(Restoration)> 이야기였다.

“한국에 다녀오느라 검토가 늦어졌어요. 준비가 ‘완벽히’ 끝나지 않은 게 저 때문은 아니겠죠?”

-뭐. 그렇진 않아. 모작 화가가 섭외가 돼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말이야. 천천히 하라고.

<시간을 되돌리는 자>는 위작을 판별하는 감정사와 미술작품 복원가의 사랑 이야기였다.

소재 특성 상 실제 작품과 모작 작품이 자주 등장해야 했다.

아직 모작 작가가 구해지지 않았다면 ‘대부분’ 준비가 끝났다는 필립의 말은 조금 과장이 있었다.

화가를 구한 뒤 모작 작업에 들어간다면 시간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었다.

“섭외가 안 되는 게 맞아요?”

많은 화가들이 명단에 올랐을 것이었다.

아마도 깐깐하기로 이름난 필립이 작품을 보고 다 퇴짜를 먹인 것이겠지.

-영화 적당적당히 만들 셈이었으면 너를 캐스팅하지도 않았을 거야. 지금 완성단계인데 이제와서 대충할 순 없지.

“찾으시는 화가가 진짜 예술가라면 제가 좋은 사람을 추천할 수도 있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가 원하는 건 모작 작가야. 그림 테크닉이 완벽한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고.

샬롯은 아픈 목을 다시 돌려 <블랑쉬 네즈>를 쳐다보았다.

저 그림으로부터 오래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어렴풋이 떠올린 기분이었다.

이번 연기를 통해서 되짚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윤예준 화가의 그 순수한 눈빛을

다시 볼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작업실에서의 오찬>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