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7)
*
낙찰이 확정되었을 때 그렇게나 많은 셔터소리가 장 내를 채웠지만
정학의 귀에는 안도하는 샬롯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이었다.’
수수료를 꽤 챙길 수 있게 되었지만 하필 샬롯이 사가다니.
그것도 작품 컨셉도 겹치는 겨울풍이었다.
‘샬롯이 겨울풍에 관심이 있다는 걸 저쪽에서도 알았다는 건가?’
상황이 심상찮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자신의 작품을 먼저 배치했을 것이었다.
“마지막, 서정학의 작품입니다.”
경매사가 정학의 그림을 들여왔지만 모두의 관심 밖에 있었다.
정학이 구성해두었던 두 개의 화제, 윤예준의 신작과 샬롯의 방문 모두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되어버린 것이었다.
샬롯이 예준의 그림을 낙찰해갈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뛰어난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이 겨울의 인상에 대한 표현 기교가 으뜸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겨울이라는 계절 그 자체의 정취를 치밀하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역시 서정학 화백의 연륜이 여실히 느껴지는군요!”
경매사도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작품을 소개하는 수식어구가 난데없이 길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마찬가지, 2000만원부터 50만원씩 호가하겠습니다.”
정학은 고개를 돌려 FC코리아 기자쪽을 보았다.
조상철도 아예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기사를 작성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나머지 기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정학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자, 여러분. 모두 집중해주세요. 아직 거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작품이 남아 있어요.”
잠시 정숙이 지켜졌을 뿐이었다.
기삿거리를 채운 기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남은 건 백마담뿐이었다.
백마담은 정학의 그림을 유심히 살피더니 패들을 아예 손에서 놓았다.
“<하이힐>, <향수>, <돈> 등의 작품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팝아트, 브랜드아트의 대가인 서정학 화백의 작품입니다. 작품명은 <겨울>. 바로 호가 시작해주세요.”
호가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예준의 그림이 공개된 시점에서 어렴풋이 예상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걸.
작품 배치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대해 후회하기는 했지만 아예 구매자가 없을 줄은....
이 그림을 사겠다고 한국으로 들어온 샬롯은 말할 것도 없었다.
<블랑쉬 네즈>에 대한 낙찰 경쟁에서 진을 다 뺐다는 듯이 완전히 퍼져 있을 뿐이었다.
“자······ 지금 소란으로는 도저히 경매를 진행하는 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진행하는 작품은 차회 경매로 미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한 경매사의 순발력이었다.
경매사가 경매 종료를 선언하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일어나 샬롯과 예준에게 뛰어갔다.
몇몇 기자들은 백마담에게 <블랑쉬 네즈>의 수집 가치를 묻기도 했다.
“젊었던 때가 생각나서 그렇지요. 아니, 저걸 보고 있는 동안은 내가 실제로 젊어져.”
백마담 치고 감상적인 답변이었다.
흥미가 동한 기자들이 계속 질문했다.
“내가 패들을 들 때마다 애간장이 다 타들어간 눈빛으로 저 배우가 나를 돌아 보는데······ 그건 10억이 됐든 100억이 됐든 무조건 사겠다는 사람 눈빛이었어요. 별 수 있나? 가격은 충분히 높아졌고, 양보할 수밖에.”
백마담은 가격을 정해놓았지만 샬롯은 쏟아부었다는 뜻이었다.
그림에 대한 간절함에서 샬롯에게 졌지만, 백마담도 못내 아쉽다는 듯 작품이 떠나고 난 자리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동안 이번 경매 판을 원천부터 구상한 공신인 정학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정학에게 마이크를 들이밀기엔 인터뷰할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 회장인데······”
정학은 울화가 치밀었다.
*
도기자는 아직도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았다.
<블랑쉬 네즈>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일간지 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기자들처럼 신속성에 목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경매사가 경매봉을 내리치기 직전에 바로 등록된 기사들도 많을 것이었다.
‘FC코리아를 은연중에 깔봤던가.’
윤예준의 유명세를 이용해 찌라시를 배포해 돈벌이를 하려고 했던 FC코리아의 기자를 조금 밉게 봤다.
같은 문화계 기자로서 창피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래선 나도 똑같은 사람이나 다름 없잖아.’
<미,감>의 편집장 최옥선은 남들이 외면하는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 가치가 있다면 지면을 할애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심미안과 패기로 지금의 편집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도기자도 최옥선처럼 돈과 화제성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을 유지한다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목표만을 가지고 진실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예준의 그림을 계속 취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진짜 가치를 본 적이 없었다.
그 그림이 주는 오묘한 감정, 그림 속 여인은 웃고 있었지만 도기자에게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물밀지듯 밀려왔다.
그녀의 뒷 배경에서 반짝이는 눈발과 반짝이는 그녀의 눈.
그 조화가 슬픔의 광채를 이루었다.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도기자는 카메라를 완전히 정리하고 경매장 입구가 한산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섰다.
“어? 도기자님!”
그때 복도 한편에서 윤민제 큐레이터가 도기자를 불렀다.
“무슨 울적한 일 있으세요?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네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아무튼 정말 감사해요. 도기자님이 처음에 기사를 잘 써주시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예준이가 그림을 팔 수도 없었을 겁니다.”
윤민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조금 떨어져 있던 예준도 함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가 저 좋자고 썼죠, 뭐. 예준이 그림이야 워낙 좋아서 언젠간 발굴됐을 그림이고.”
“그걸 해주는 곳이 <미,감> 말고 더 있나요, 어디?”
여태까지 저 어린 아이를 자신이 어떻게 봐왔던 것인지, 도기자는 부끄러웠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 있잖아요?”
도기자의 자책 어린 답변에 잠시 그녀를 살피던 예준이 선뜻 물었다.
“응? 뭐?”
“이번 작품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셨는데 최초 공개 계약이 있어서 못했잖아요. 그거 이제는 할 수 있게 됐어요.”
“그거야 아마 너의 그림에 대한 관심이 워낙에 전국적이라서, 공중파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불러주고 그럴 텐데? 나는 그냥 그걸 받아적을게.”
사실이었다.
<미,감>에서는 발굴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해 알리는 일에만 힘쓰고 싶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은 예준이 굳이 <미,감>에서만 인터뷰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기자들이랑 이야기하고 나왔잖아. 이번 단행본이 나오려면 나흘은 기다려야 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아?”
“아무도 안 물어보던데요?”
도기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 기자 아저씨들 중에 제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그림을 누구에게 배웠냐, 이수경 화백과 이일섭 화백이 동일인물이 맞느냐, 다음 작품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질문만 해서, 정작 이번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어요.”
아마도 두 번째 작품이 이미 공개되어버린 이상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화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었다.
3억 8천에 낙찰된 그림이라는 설명이면 사람들은 만족하고 다음 것을 궁금해할 테니.
“저번에 제 기사 잘 써주셔서 이번에도 맡기고 싶어요. 작품 자체에 가장 큰 관심을 가져주는 기자님인 것 같아서요. 약속이기도 하고. 그래도 되죠?”
지난번 기사야 당연히 평론가에게 원고를 청탁했으니 그랬겠지.
하지만 기자들 중에 예준의 그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기자가 맞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 예준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인터뷰 시작할게.”
“네.”
애진작에 작성해두었던 질문지를 다시한번 꺼냈다.
FC코리아의 기사를 처음 접하고 갤러리 화담으로 이동하는 동안 작성해두었던 것이었다.
대부분 찌라시를 포함한 화제성이 다분한 것들을 염두하고 짜여진 질문들이었다.
‘내가 잠깐 미쳤던 거지.’
도기자는 태블릿을 끄고 녹음 기능만 켰다.
“이럴 줄 모르고 질문지를 못 짜왔네. 그래도 예준이 그림의 진의가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같이 열심히 한 번 해보자.”
“좋아요. 저도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대답할게요.”
“좋아.”
그렇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림을 접하게 된 계기,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즐거운 것, 가장 존경하는 작가, 좋아하는 음식, 최근 가장 즐거웠던 일 등.
화제의 신인 윤예준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개인 윤예준에 집중해서 인터뷰를 진행시켰다.
마음을 편히 먹고 임하니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또 화제가 되겠어.’
도기자는 계속 머릿속에서 화제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글이 짜여지는 것을 계속 덜어내고 덜어냈다.
그럼에도 윤예준이라는 인물의 화제성은 계속 흔적을 남겼다.
‘그래. 너무 벗어나려고는 하지 말자.’
인터뷰가 끝난 시점에서 후속기사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가 끝났다.
“어때요? 좋은 기사가 나올 것 같으세요?”
“응, 그러네. 이번 화제는 충분히 담아낼 기사가 나오겠어.”
그러자 예준은 매우 기대가 된다는 듯 활짝 웃었다.
<블랑쉬 네즈>를 봤을 때처럼 그 감정이 전이가 되어, 도기자도 함께 웃었다.
*
도기자의 원고는 잡지 인쇄 직전에 다급히 출판사로 보내졌다.
원래는 큰 내용 없이 미리 작성된 원고에 경매 결과만 포함될 계획이었다.
예준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편집장을 포함해 많은 인원이 밤늦게까지 대기한 결과였다.
덕분에 도기자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은 며칠만에 빨리 세상에 알려졌다.
다른 인터넷 기사들보다는 한참 늦은 편이었지만, 국내 최고의 미술 잡지로서 질적인 체면을 차린 셈이었다.
[윤예준의 두 번째 작품 , 마네의 사계 연작을 완성하다.]
Q_지난 작품에서는 어렴풋이만 있던 느낌이 이번 작품에서는 뚜렷해졌다. 프랑스의 유명 화가 에두아르 마네와 화풍이 비슷하던데. 평소에 마네를 좋아했는지?
A_평생에 마네를 좋아했다.
Q_예준군이 생각하는 마네의 매력은?
A_그의 그림은 내 출발지이자 도착지다.
도기자의 인터뷰 내용대로 일각에서는 예준의 그림과 마네풍의 유사성을 분석하기도 했다.
RISA(Rhode Island School of Art)대학의 칼린 교수는 그의 이번 <블랑쉬 네즈>가 마네의 봄, 여름, 가을에 이어지는 마지막 공백을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경매 이전까지는 그저 미지의 화가였던 예준이었다.
하지만 이번 열풍 이후로는 도기자의 인터뷰와 세간의 분석으로부터 ‘리틀마네’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졌다.
<블랑쉬 네즈>를 많이 접한 서울옥션 직원들이 <미,감>을 나누어 읽으며 의견을 나눴다.
3억8천 정도 가격이면 이미 탑급 화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굳이 샤를로트 로렌스와 관련해서가 아니더라도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완전히 타고난 재능형 화가였고, 나이도 어렸으니까.
정학은 직원 휴게실에 있는 잡지 게시판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린 아이에게 밀린 것도 모자라 작품은 아무런 관심도 받고 있지 못했다.
당연했다.
정학은 자신의 그림이 매물로 올라와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셔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젠장!”
자존심이 상한 정학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비서가 움찔 했다.
평소 같았으면 1억에는 팔 수 있었을 그림이었다.
아니, 샬롯도 있으니 1억은 예상 최저가였다.
비싸면 2억까지도 볼 수 있었다.
고작 예준의 그림으로 수수료 몇 푼 더 챙겨보려다 낭패만 보았다.
“신문사에 원고 전달은 완료된 거 맞아?”
“네. 게시 즉시 연락준다고 들었습니다.”
정학의 그림이 다시 창고로 들어간 뒤 정학은 직원 몇몇을 시켜 미담 기사를 작성하게 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정학은 예준의 그림을 일찍이 감명 깊게 보았고,
그래서 이번에 좋은 가격에 낙찰시킬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는 식이었다.
그 뒤 기사 초고를 여러 협력적인 인터넷 신문사에 배부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언제 올라오는 거야?”
정학은 컴퓨터를 켜서 포털사이트 뉴스탭을 전전했다.
[언론의 뜨거운 관심에도 작품 경매 내놓더니 결국 유찰 ‘서정학 회장의 굴욕’]
정학은 자신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 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하곤 길길이 날뛰었다.
그림을 잘 팔기 위해서는 화가의 위엄이 중요했다.
예준이 10살이기 때문에 그림의 전망이 좋았듯이
서울옥션 회장이라는 정학의 지위도 그림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식으로 굴욕 꼬리표가 붙으면 팔릴 그림도 안 팔릴 것이었다.
“뭐가 유찰이라는 거야, 뭐가! 허위 사실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기사 내리라고 해!”
“네, 회장님.”
정학은 비서가 달려나가는 동안에도 계속 소리쳤다.
“왜 알아서들 관리하지 않는거야? 이런 기사가 올라와 있으면 즉시즉시 처리해야 할 것 아니야!”
정학은 비서의 등에 대고 외쳤지만 이미 부리나케 달려나가고 없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