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2화 (22/241)

착각(6)

새롭게 옮겨진 제 1 경매홀도 사람이 붐비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세계적으로도 꽤 큰 편이기는 했다.

샬롯은 달려들어 영어로 질문하는 기자들을 잘 물리고 자리에 앉았다.

극빈석엔 이미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재미있네. 급조하는 척 할 셈이면 이런 것도 해두질 말았어야지.”

가장 앞자리였다. 그림을 가장 잘 살필 수 있었다.

“이봐 샬롯. 그림 뭐 살지 정도는 대답해줄 수 있지 않아?”

매니저가 샬롯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림을 뭐 살지가 끝이 아니었다.

얼마까지 지불할 것인지, 경매가 끝나면 어디를 갈 것인지 등등 샬롯의 스케줄을 이미 확인한 것인지 경매와 상관 없는 무례한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

“따로 정해놓고 온 거 없어.”

“어이쿠. 서정학씨 그림은 꼭 사가기로 결정한 거 아니었어? 집 안 갤러리에 크기 맞춰서 자리까지 마련해뒀잖아. 사진도 이미 받았고.”

매니저가 따지듯이 물었다.

“사진으로 봤을 땐 좋았지. 그래도 실물이 다를지 누가 알아? 아니었다면 경매따윈 오지도 않고 바로 샀겠지.”

“오호······ 그 그림을 안 살 수도 있다는 거야? 누가 반전 영화 전문 여배우 아니랄까봐. 역시 뒤통수 치는 데에 일가견 있어.”

매니저가 능청스럽게 비아냥거리자 샬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기 전, 기자들이 한 번 더 소란을 피웠다.

이번에도 가드들의 역할이 커보였다.

소란이 일어난 곳을 살핀 매니저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호오. 저 아이가 바로 그······”

“왜, 누군데?”

샬롯은 같은 방향을 살폈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품목들 중에서 가장 소문이 무성한 그림의 화가야. 아주 어린 아이인데 그림을 그렇게나 잘그린다더라고.”

“어린애가 잘그려봤자지.”

“뭐. 그걸 확인하러 다들 모인 거 아닐까?”

매니저는 그들을 보다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저 애보다 부모가 더 긴장했군. 어린애는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오히려 편안해보이고 말이야.”

아이는 어느새 자리에 앉았다.

그 양 옆으로 남녀가 나누어 앉았는데, 여기저기서 들이미는 카메라 때문에 잔뜩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다들 진정들 하세요. 인터뷰는 거래가 끝나고나서 해도 되잖아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질문 하나만. 오늘 경매 앞두고 기분이 어때요?”

기자 하나가 크게 묻자 일제히 조용해졌다.

아이의 대답을 받아적으려는 것이었다.

“기대돼요.”

아이는 짧게만 대답했다.

그러자 모두 주섬주섬 수첩을 정리하며 기자석으로 이동해 앉았다.

*

민제는 내내 정신이 없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기자들로부터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어휴. 벌써부터 진이 다 빠지네.”

“와, 저기봐. 저 사람이 그 샬롯이라는 여배운가봐.”

연희가 가리켰다.

금발의 여성이 제일 앞줄에서 아직 경매사가 등장하지도 않은 단상 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채널에서 몇 번 본 것 같네.”

“얼굴이 보여?”

샬롯은 팬서비스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유명인사를 봐서 신기할 뿐 사인 같은 걸 받을 생각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도 샬롯은 경매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녀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지, 얼마 뒤 경매사가 단상 위로 걸어나왔다.

“이번 경매가 유독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미술품 경매가 일상의 축제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자분들께서도 노력해주고 계신 것이겠죠. 이번에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가드를 통해 조성된 위화감을 중화시키기 위한 발언이었다.

“자, 그럼 이제 서울옥션 12월 경매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매는 지체 없이 빠르게 시작되었다.

앞서 많은 작품들이 나왔지만 대부분 천만 원을 넘기지 못했다.

보통 거래가는 민제도 잘 알고 있었다.

전화로 서회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수혜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래되는 가격대는 소란을 떨 것까지는 없는 수준이었다.

샬롯이라는 여배우는 그림이 나올 때마다 눈에 힘을 주며 감상했지만 금방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예준이 그림이 나왔을 때도 같은 반응은 아니겠지. 과연 그땐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몇 시간이 지나고 경매가 중후반으로 진행될 때까지 샬롯은 한 번도 호가하지 않았다.

아직 기대작인 예준과 서회장의 그림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민제는 샬롯이 예준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할 것이란 확신을 조금 잃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갈 사람은 많을 테니까.

“스물두번째, 윤예준의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잠시 웅성였다.

민제도 긴장이 되었다. 자신의 그림을 경매에 붙일 때보다도 초조했다.

검은 천을 덮고 있는 거대한 작품 하나가 경매장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조금씩 눌렀다.

“자, 그림 공개해주세요.”

경매사가 요청하자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조심히 검은 천을 걷어냈다.

천을 걷어내는 순간 모든 기자들이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셔터소리로 귀가 먹을 정도였다.

“와······!”

민제와 연희로서도 처음보는 그림이었다.

상당히 창백한 그림이었지만 그림 속 여인은 웃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싶었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저 광채.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릴 때마다 그림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와, 도대체 뭘로 그린 거야?”

저 큰 그림을 10살 아이의 작은 체구로 그렸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매번 발표하는 그림마다 이렇게 놀라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

민제는 예준의 그림을 보다가 시선을 조금 돌려 여배우를 보았다.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

샬롯은 그녀가 10살이었을 때 라는 작품으로 처음 데뷔했다.

또래보다도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품이 공개되고 사람들은 샬롯이 백설공주 그 자체였다고 극찬했다.

남들보다 훨씬 이른 성공이었지만 샬롯에게도 매우 간절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연기력 면에서 전혀 뒤지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도 가능했던 작품이었다.

이후 ‘아메리카가 낳은 별’이라는 별명도 얻고 많은 광고를 찍었다.

“이번 연기 너무 백설공주 같은데, 조금 다르게 연기해볼래?”

“샬롯은 너무 백설공주 같아서 이 배역이 먹혀버리는 것 같아.”

하지만 엄청난 성공 뒤에 찾아오는 건 과한 기대감과 불가능한 요구들뿐이었다.

샬롯이 어떤 배역을 맡든 사람들은 백설공주만 떠올리며 아쉬운 연기라고 혹평했다.

‘전혀 다르게 연기했는데······”

백설공주 샬롯이 사람들의 뇌리에 너무 강하게 박혀버린 탓이었다.

오로지 샬롯 탓은 아니었겠지만 그 동안 완전히 망한 작품들도 여러번 거쳤다.

누군가는 사람들이 백설공주를 잊을 때까지 연기는 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샬롯은 배역이 들어올 때마다 마다하지 않았고, 탐나는 작품이 있으면 오디션을 보았다.

그렇게 다시 자리를 잡고 성공했다.

[백설공주 샬롯, 탄탄한 연기력으로 다시 칸 입성]

백설공주 때의 호평이 결코 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박스오피스 1위 대작에 여러번 참여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정상에 서고 몇 년이 지나서야 샬롯은 깨달았다.

자신은 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 가까스로 유지했을 뿐이라는 걸.

영화를 찍고 레드카펫을 밟는 모든 일에 보람이 없게 느껴졌다.

성장이 없으니 단순이 돈벌이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연기를 순수하게 즐겼던 게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때가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즐거움이었다.

그런 샬롯을 위로해주는 건 미술작품이었고, 유명 여배우가 된 이후로 수많은 작품들을 모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그렇게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자. 작품명 <블랑쉬 네즈>. 2000만원부터 50만원씩 올라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저 <블랑쉬 네즈>라는 그림은 샬롯이 여태까지 모아온 그림들과는 달랐다.

미리 사진을 받았던 서정학의 <겨울>은 그냥 겨울을 잘 표현했을 뿐이었다.

샬롯의 마음과 <블랑쉬 네즈>만큼 밀접하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셔터를 터뜨릴 때마다 그림 속 여인은 더욱 환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 웃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샬롯은 마음은 무한히 북받쳐올랐다.

평생에 걸쳐 그리워했던 자신의 10살 시절을 통째로 사진으로 찍어다가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꼭 산다.”

“뭐?”

계속 샬롯에게 통역을 해주던 매니저가 중얼거리는 샬롯에게 물었다.

저 그림은 꼭 사야 했다.

지갑을 완전히 털어서라도.

그래도 부족하다면 가진 그림들을 모두 되팔아서라도.

매니저는 샬롯을 보았다.

그림 속 여인보다도 눈을 크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완전히 돌았군.”

사람들이 50만원 내지 200만원선으로 가격을 올리며 경쟁하는 동안

샬롯은 불안하게 패들을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떨었다.

그리고 가격이 5000만원을 돌파했을 때 샬롯이 드디어 패들을 들었다.

“200 million.”

샬롯이 조용히 읊조리자 장 내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자, 잠시······ 방금 호가하신 게 한화로 2억이 맞습니까?”

매니저가 통역하자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며칠 굶은 늑대 같았다.

“기자들한테 주는 선물 치고 너무 과한 게 아닌가.”

매니저가 말했지만 샬롯은 다음 호가자만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

샬롯이 초반에 2억을 불러버린 탓에 경매 흐름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경매사도 구매 희망자를 아직 확인할 수 없어 선뜻 단위를 올리지 못했다.

“2억? 갑자기 2억이라고?”

연희가 말했다.

그랬다. 갑자기 2억이었다.

지금 당장 호가가 끊겨도 2억에는 파는 것이었다.

패들을 들며 200 밀리언을 외치는 샬롯은 거의 모든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겼을 것이었다.

그 하얀 피부가 투명해질 정도로 플래시가 쏟아졌으니까.

기자들은 당황하면 평소 셔터를 올려놓는 검지손가락 먼저 까딱인다고 들었다.

그래서 공포영화를 보고 나오면 검지에 피멍이 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2억3천, 2억3천2백······ 2억5천 여쭤보겠습니다, 2억 5천. 아, 2억7천 부르셨습니다.”

가격은 마구 널뛰며 치솟았다.

경매사는 금방이라도 경매봉을 내리칠 것처럼 사람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샬롯도 절대 작품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호가하지 않을 때에도 계속 패들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네! 3억.”

백마담이 3억을 부른 뒤부터는 호가 경쟁에 뛰어드는 사람은 백마담과 샬롯뿐이었다.

백마담은 유명세에 높은 가치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작품의 작품성만을 두고 수집욕구를 불태웠다.

오죽하면 백마담에게 그림을 판 화가가 진짜 예술가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예준의 그림에 3억을 부른 것이었다.

“지금부터 500만 단위로 가보겠습니다.”

“3억 천.”

샬롯과 계속 속삭이던 매니저가 패들을 대신 들었다.

처음 2억을 부를 때가 아니고서는 계속 매니저가 호가를 통역해주었다.

500만 단위로 가보겠다는 경매사의 말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백마담과 샬롯은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액수로 엎치고 메치며 계속 경쟁했다.

“3억 6천 불러주셨습니다. 더 있으십니까?”

백마담의 호가를 확인하고 경매사가 정리하자 샬롯과 매니저가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패들을 들었다.

“3억 8천입니다, 3억 8천.”

백마담이 백기를 들었다.

경매사가 세 번 호가하고 경매봉을 내리치자 또 한 번 셔터소리가 경매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명 신인 화가, 10살 어린애의 그림이었다.

미리 알려지지도 않은 그림인데도 3억 8천이라는 고가에 팔린 것이었다.

백마담의 낙찰은 아니었지만 작품성도 증명한 셈이었다.

“와, 예준아. 대단해. 서회장 예상의 네 배나 되는 금액이야.”

민제가 예준에게 속삭였다.

예준은 대답하지 않고 백마담과 샬롯을 번갈아보았다.

아주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첫 작품도 아니고 두 번째 작품이었다.

이것으로 시장에 나오지도 않은 <환생>의 가격은 최소한 4억 이상의 가치를 얻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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