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0화 (20/241)

착각(4)

‘어린 친구가 벌써부터 허풍선이 심하군.’

어린 나이에 재능으로 큰 관심을 얻게 되면 콧대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예술은 타고난 천재들의 전유물인데, 자신이 그것을 크게 타고났다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술적 재능은 나면서부터 낼름 쉽게 얻어지는 천부적인 게 아니다.’

예술가가 타고나 수혜를 볼 수 있는 건 시대뿐이었다.

아니면 일시적인 운일 뿐이거나.

윤예준이라는 아이의 그림이 큰 관심을 받게 된 건 따라서 그 아이의 재능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 그림에 대한 운이 잠시 따랐을 뿐이었다.

그의 다음 작품도 <환생>만큼 센세이셔널할 것이라는 건

그야말로 10살 꼬맹이가 쉽게 할 수 있는 철없는 오만에 불과했다.

평단의 전통과 돈의 논리를 물로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초 공개라는 조건은 매력적이었다.

<환생>이라는 첫 작품이 순전히 운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 아이의 천재성 덕분이었는지는 정학 말고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서울옥션의 경매장이라면, 큰 홍보거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가난한 화가 부부의 사기극일 경우다.’

그림을 판매하는 데에 유달리 소극적이었다.

큐레이터 말로는 자식의 하나뿐인 첫 작품이라 파는 게 꺼려진다고 했지만,

그런 속 편한 이유일 리가 없었다.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거겠지.

자신들이 직접 그려놓고는 제 아들이 그린 것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딸인 도연의 말에 의하면, 예준이 확실히 잘 그린다고 했다.

아무리 훈련받은 아이라고는 하나 결국엔 중학생 안목이었다.

오히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면 학원을 다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뭐, 아무렴이나 상관 없다.’

이 경매장 사업의 매력은 그런 사소한 노이즈에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그림을 팔고 손 털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는 게 피차 좋을 터였다.

정학은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확인했다.

[Fact Check Korea 조상철 기자]

조상철 기자.

웬만한 종이 신문사들보다 파급력이 있는 인터넷 언론사 FC코리아의 문화부 소속 기자였다.

평상시에는 연예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찌라시를 검증하는 게 주 업무였다.

하지만 그 취재력이 상당해 종종 덕을 보기도 했다.

여러 인터넷 플랫폼에

[자수성가 예술인 서정학의 예술 철학]

[가난했던 시골 청년이 한국의 앤디워홀이 되기까지]

등의 카드뉴스를 게시해 정학의 작품을 비싸게 팔리도록 도운 적이 있었다.

<하이힐>, <향수> 등도 그의 도움을 받아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학은 주저없이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연결되었다.

“어, 조기자. 전화를 제때 받는군?”

-전방위 영업으로 먹고사는 놈이 그럼 제때 받아야지요.

조상철은 그렇게 사람 좋은 대답으로 한 번 웃어보이곤 조용히 정학의 용건을 기다렸다.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 빨리 용건이나 말하라는 거였다.

“이번에 <미,감> 잡지 봤겠지? 거기 윤예준이라는 꼬맹이가 있는데, 취재 좀 하고 있나?”

-보기는 했는데 아직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 돈이 될 만한 기삿감 아닌가?”

-돈이 될 만하니 잠자코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죠. 혼자 사비로 발품파는 것보다는 회장님같은 스폰서 뒷심 받아 기사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요.

과연 조상철이었다.

정학이 돈을 좇는 건 오직 돈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합리가 가장 쉬운 신념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돈을 좇는 사람들끼리는 그 단순한 합리의 논리를 바탕으로 유대감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조상철과 서정학은 서로가 돈이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절대 배신할 일이 없었다.

인간적인 유대라니, 그런 낭만적인 관계보다는 훨씬 공고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용돈 좀 넣어 놨으니 오늘은 고기 사들고 일찍 퇴근해. 가족사업이 근본이라고.”

-하하하. 아이고. 예, 확인해보겠습니다. 윤예준이라고 하셨죠?

“괜찮은 화가야. 어떤 친군지 궁금해서 그러니까, 기사 쓰기 전에 나한테 이야기만 좀 해달라고. 먼저 알고 싶으니.”

기사를 내기 전에 정학에게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마 조상철 정도 되는 기자라면 오래지 않아 정학의 의중을 알게 될 것이었다.

곧 경매가 있으니 그 전까지 노이즈가 될 만한 건 미리 파악해 꽁꽁 감춰놓으라는 뜻이라는 걸.

정학이야 경매 때까지 안정적으로 예준의 그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좋았고,

조상철 입장에서는 경매가 끝난 후 경매가 끝난 뒤 기사를 맘껏 쓸 수 있으니 손해가 아니었다.

*

연예부 기자들은 조상철을 싫어했다.

조상철이 자신들을 물먹이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상철은 특종을 잡기 위해 연예계 기삿거리를 빼앗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활동하다보면 정보가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름난 연예인일수록 경계가 삼엄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동선은 인터넷 팬카페에 한 5만 원씩만 내고 가입해 검색하면 상세하게 조회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쉽게 굴러들어오는 정보를 그들이 왜 모르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다들 돈 벌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이번 샤를로트 로렌스 방한 사실도 조상철이 알아내 그쪽으로 넘겨준 건이었다.

물론 소정의 사례금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 공짜로라도 주라는 뜻인가?

‘이렇게 찬바람 맞아가며 무식하게 잠복해본 적이 없으니 편하게들 씹어대는 거지.’

벌써 이틀째였다.

하루는 화담 미술관 근처 골목을 모두 파악하는 데에 할애했다.

눈에 띄지 않게 윤민제의 퇴근길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괜히 미술관 바로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간 눈에 띄었을 테니까.

윤민제의 집을 알아낸 뒤부턴 또 그 근처 골목을 살폈다.

윤민제는 아들 윤예준을 학교로 등교시킨 뒤 미술관으로 출근했다.

동네 삽화가인 허연희는 12시가 되기 직전 구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충분히 가난해보인다. 사기극을 벌일 동기가 충분해.’

큐레이터인 윤민제는 퇴근할 때까지 시간이 없지만 허연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바쁘기는 허연희가 더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일이 생기는 족족 해치우는 프리랜서였다.

종종 벽화를 그리러 전국 팔도 안 가는 곳이 없는 모양이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빌라엔 이렇다 할 작업실도 없어 보였다.

윤민제는 최근에 그림을 하나 발표했다던데, 도대체 어떻게?

곧 1시 50분이었다. 윤예준이 하교할 시간이었다.

조상철은 학교 근처에 차를 받치고 숨을 돌렸다.

윤예준의 등교 복장은 유심히 봐둬서 기억했다.

학년마다 하교 시간이 다르니 그다지 붐비지도 않을 것이었다.

‘참 고되다, 고돼.’

이 정신으로 연예인을 쫓았다면 없는 마약건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인기가 훨신 많은 연예부로 옮길까도 생각했었다.

국장으로부터 제안도 여러번 받았다.

하지만 문화부 생활을 하면서 연을 틔워놓은 영감들만 한둘이 아니었다.

연예부에서 새로운 스폰서를 찾으려면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찮을 것이었다.

시간이야 투자하면 그만이었지만 FC코리아에서는 조상철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성과를 보여주길 바라고 있을 게 뻔했으니.

얼마간 기다리고 있으니 2018년형 소나타 한 대가 조상철의 차 앞으로 와서 멈췄다.

정확히 1시 50분이 되는 순간이었다.

‘뭐지? 초등학교 2학년 애 하교를 아직도 봐주는 부모가 있나?’

아무튼 그 시커먼 차량이 앞을 가려버리는 탓에 교문을 넓게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차를 돌려 교문 반대편에 다시 주차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학생들이 교문을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방과후 학교 같은 거 없겠지?’

고민하기가 무색하게 윤예준이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조상철은 사이드미러로 윤예준을 주시하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윤예준이 교문을 통과해 코너를 돌려고 할 무렵, 조상철의 앞을 가렸던 차량에서 한 청년이 내려 윤예준이게 접근했다.

그들은 얼마간 대화하더니 함께 차에 올랐다.

‘뭐야?’

조상철은 그 정체불명의 차량을 뒤쫓아 기어봉을 당겼다.

청년은 곤색 슬랙스에 경량패딩 차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의 차는 전문 운전기사 못지 않게 부드럽게 움직였다.

좌회전을 할 때가 아니면 꾸준히 2차선을 고집했다.

이동 루트를 철저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속도도 딱 규정속도만큼만 냈다.

‘미쳐돌아버리겠군. 웬 놈이 운전을 이렇게 늙은이처럼 해?’

검게 선팅돼서 차량 안은 들여다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납치?

그러고 보면 말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나이는 충분히 납치가 가능하지 않은가.

지금 차량도 서울 외곽으로 빠지고 있었다.

조상철은 블랙박스 각도를 조정하며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곧 차량은 멈췄다.

굉장히 거대한 저택 앞에서 말이다.

대문 앞에서는 윤예준만 내리고 차량은 저택 울타리를 끼고 돌았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잠시 당황했던 조상철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조상철이 달려가는 동안 예준이 초인종을 눌렀다.

“일섭 할아버지! 저 왔어요.”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외쳤다.

‘일섭 할아버지?’

조상철은 빠르게 멈춰서서 그 이름을 몇 번 되뇌어보았다.

‘혹시, 이일섭 화백의 그 일섭?’

이일섭이라면 윤민제가 있는 갤러리에서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는 화가였다.

조상철은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동양화 거장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이 집이 이일섭의 집이 확실하다면 엄청난 특종감이었다.

조상철이 숨죽여 지켜보는데 집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윤예준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예준학생, 잠깐!”

조상철이 부르자 예준이 돌아보았다.

“누구세요?”

“아······ 나 저기.”

조상철이 제 가슴을 더듬었다. 민감한 잠복중이라 기자증을 차에 놓고 내렸다.

“기자 아저씨야.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조상철이 기자라고 소개하자 예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까진 어떻게 오신 거예요?”

“미안해, 미안해. 사실 학교 앞에서 간단하게 인터뷰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바로 수상한 차에 타기에 납치인가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쫓아왔네. 원래 괜한 이유로 이렇게 쫓아오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거짓말도 성의가 있어야 통한다지만, 조상철은 제때 순발력을 발휘해 때울 줄을 알았다.

“그런데 여긴 어디니?”

조상철이 묻자 예준은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자네 누군가?!”

바로 그때, 철제 대문 안에서 한 중장년의 남성이 뒷짐을 지고 걸어나왔다.

집이 너무 커보이긴 했지만 이일섭의 집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조상철이 바로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남성이 대문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대문이 열리면 예준이 뛰어들어갔다.

“아······ 예! 저는 팩트체크 코리아의 조상철 기자라고 합니다.”

조상철은 예준에게 했던 것과 달리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소개했다.

이일섭이라면 기자를 경계할 게 뻔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지 쫓아오기에 적당한 신분은 기자뿐이었다.

조상철은 인사를 한 뒤 주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혹시······ 이수경 화백님 아니십니까?”

“건방진 친구군. 어련히 알아서 소개할 때까지 기다리질 않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윤예준 학생과는 무슨 인연이신지.”

의외의 인물이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났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이수경 화백은 윤예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저는 이수경 화백님의 수제자입니다.”

“뭐?”

예준이 아까는 분명 이일섭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난데없이 동양화의 제 1 거목인 이수경이 나타나다니.

게다가 그 수제자라고?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인가?’

이수경은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예준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미소까지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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