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3)
날이 너무 추워졌다.
겨울이 조금만 늦게 찾아왔어도 동백꽃이 죽을 뻔했다.
하나둘씩 더 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했고, 그려온 그림들을 보면 색도 갈수록 진해졌다.
‘어휴. 손이라도 안 얼어 있어야 연습을 하지.’
도연은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큰 화분을 하나 사왔다.
‘며칠만이라도 좀 옮겨놓자.’
그새 동백꽃은 뿌리를 넓고 깊게 뻗었다.
큰 화분을 사기를 잘한 것이었다.
화분을 잘 닦아 집 안으로 옮기고 나니 백색광을 받아 색채가 선명해졌다.
‘이럼 밤에도 그릴 수 있고 좋잖아?’
도연은 스케치를 시작했지만 이미 같은 꽃을 수백 번도 넘게 그렸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유선형의 꽃잎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날 카페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머릿속엔 자꾸 예준 생각만 들어찼다.
‘어린애 주제에 재수없어. 무시하듯이 쳐다보기나 하고 말이야.’
예준의 눈빛이 눈앞에 선했다.
그 나이대 애들 눈빛이 아니었다.
도연은 애써 부정적인 평가로 예준의 생각을 쳐내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카페에 나 혼자 남겨두고 먼저 가버렸어! 자기가 음료수 사달라고 해놓고.’
그건 충분히 화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왜 마음처럼 화가 치솟지는 않는 것일까?
그때, 아버지가 거실로 걸어나왔다.
“네, 서울옥션 서정학입니다. 갤러리 화담의 윤민제 선생님 맞으시죠?”
서비스업 종사자의 어투가 한껏 발휘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영업에 나서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큰 거래가 관련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아, 예예. 전해들었습니다. 하하하. 예. 반려하셨다고······ 예······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보충할 사안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돼서 제가 직접 전화를 드렸습니다.”
돈이 될 만한 상품을 수급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도연은 기분이 확 나빠져 동백꽃을 그리는 데에나 집중했다.
“어떤 조건에 대해 불만족이 있으신 것인지······ 예, 예.”
정학은 수화기 너머의 누군가가 하고 있는 말을 침착하게 들었다.
“아, 첫 작품이라서 기대가가 있으시다는 것이죠?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그럼 혹시 따로 보장받고 싶은 하한이 있으신 건지······”
무언가 잘 처리되지 않는 듯 통화는 반복으로 늘어졌다.
대충 들어보면 미성년자의 그림을 거래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경매장, 전시관, 작가, 법정 대리인까지.
여러 축이 관련된 계약건일수록 골머리를 쌓는 일이 많을 것이었다.
정학은 전화를 끊자마자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직도 꽃만 그리고 있냐.”
도연은 일부러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정학은 괜한 꼬투리를 잡을 셈일 터였다.
“그래······ 꽃 그림도 팔리긴 하더군.”
꽃 그림도 팔린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다. 물론 흔한 꽃 그림은 아니었지만 기대가가 높은 작품이 있어. 잡지에서 유명해.”
도연이 모르는 표정으로 일관하자 정학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미술 잡지도 봐야 한다. 너보다 한참 어린 아이가 지금 비싼 그림을 그렸다고 온통 난리인데.”
정학은 혀를 쯧쯧 찼다.
잡지에 실린 어린 아이 그림이라. 분명 학원 아이들이 떠드는 걸 들었다.
예준의 그림이 그 아버지의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미,감>에 실렸다고.
“혹시······ 윤예준?”
“그래, 맞다. 잡지를 보긴 봤나보구나. 그 아이의 그림이 지금 엄청난 얘깃거리가 되고 있어. 놔두면 지금 시점보다 더 오를 게 뻔하니 그쪽 부모들도 그림을 넘기려고 하지를 않잖아.”
아버지의 서울옥션은 고만고만한 미술품을 거래하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거래되는 미술품 중 가장 예상가가 높은 것들을 취급한다고 보아도 과장이 없었다.
‘그런 아빠가 예준의 그림에 이렇게나 매달린다고?’
직접 전화까지 해서 거절당했을 정도면 기대치가 매우 높아져 있는 것이었다.
“예상가가 얼마인데요?”
“활동이 전혀 없어서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 관심은 전례가 없어. 다른 신인들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가격이 높겠지.”
도연은 예준의 그림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모여 떠드는 와중에 어깨 너머로 힐끗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의 주요 색채인 울트라마린의 사용이 절묘해서 오래 인상에 남아 있었다.
‘하긴. 사고의 전환도 대단했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랬다.
잘못하면 싸구려 일러스트처럼 느껴질 만했던 판타지 분위기를 절묘하게 소화해냈다.
10살이 그 정도 실력이면 적어도 해외 토픽감이기는 했다.
“걔가 잘 그리기는 하죠.”
아버지가 눈을 둥글게 떴다.
“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같은 학원 다녀서 알아요. 걔 그림은 매주 보는데.”
잘 그린다는 신인 화가가 미술학원에 다닌다는 말에 놀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안 팔겠다는 걸까?
요즘 들어 학원도 잘 안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울 때 파는 게 가장 좋을 텐데.
도연은 곤란해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예준의 그림을 최대한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
“아직 고민 못 끝냈어? 돼지고기 넣을 거면 지금 볶아야 하는데?”
어머니가 물었다.
“잠시만요, 1분만요.”
김치는 활용도가 상당히 높은 음식이었다.
김치찌개에 참치와 함께 들어가느냐, 돼지와 함께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만약 둘 중 무엇이 들어가더라도 그냥 김치를 끓인 맛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참치 기름과 함께 끓인다면 국물이 훨씬 더 고소해진다. 하지만 돼지고기를 통한 감칠맛도 놓칠 수 없는데······’
둘을 번갈아 먹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요리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둘 다 고를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세상에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참치 김치찌개를 한번에 담을 수 있는 반반 그릇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돼지와 참치, 어느 한 쪽의 손도 선뜻 들어주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방에서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곤란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무슨 통화를 그렇게 길게 해?”
“어어. 이번에 예준이 기사 관련해서 문의가 너무 많네.”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던 문제였다.
일섭의 작업실을 쓰게 된 이후로 빈도는 확 줄었지만 갤러리도 종종 나가보곤 했다.
잡지가 출판된 이후로 관람객이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아졌다.
입장료를 받는 갤러리 입장에서는 마냥 좋을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 관람객을 받을 만한 제반이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구매 희망자가 많아?”
“그렇지 뭐. 그림이 첫 작품 단 하나뿐이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경쟁적이야.”
팔기 위한 조건은 이미 달성된 모양이었다.
“예준이가 그림을 그렇게나 잘 그려놓은 덕분에 이런 행복한 고민도 다 해보네.”
아버지가 내 옆에 앉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고민이요?”
여태까지 몇 명의 구매 희망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 그림을 팔 만큼 그들이 제시하는 가격이 매력적인 액수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고민을 한다는 건 계속해서 높은 액수의 제안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에 사겠다고 하는데요?”
“사겠다는 건 아니고, 경매를 붙여보자고 하네. 서울옥션에서.”
아버지의 입에서 서울옥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뭐? 그럼 방금 전화하고 온 곳이 서울옥션이었다는 말이야?”
“그렇지 뭐.”
“얼마 추정한대?”
서울옥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아 상당히 대단한 곳인 것만은 확실했다.
“글쎄, 그쪽에서는 1억을 이야기하기는 하던데. 근데 신인 화가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전례가 없어서 낙찰가 추정이 거의 의미가 없대. 충분히 더 비쌀 수도, 더 쌀 수도 있다는 거지.”
아버지가 말을 마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1억이면 비싼 건가요?”
“그렇지. 지난번 아빠 그림이 2500만 원이었으니까 그 그림을 네 점은 팔아야 1억이 나오는 거야.”
그럼 만 단위 바로 다음이 ‘억’이라는 거였다.
아버지 그림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그림은 세계적인 거장의 첫 그림이 되어야만 했다.
어중간한 두 번째, 세 번째 그림도 아니고, 첫 번째 그림의 첫 거래가가 그 정도 소액이라면 오랫동안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쪽에서도 다급했던지, 거래 성사 시 경매장 측에서 웃돈을 좀 얹어주겠대. 그리고 지난번 내 그림 팔 때처럼 최대한 배려도 해줄 건가봐.”
“무슨 배려요?”
“이달 말에 외국 유명 배우가 거래를 하러 온대. 그리고 서정학 회장 그림도 매물로 올라오게 돼서 참가자가 많을 것 같은가봐. 그런 차원에서 최대한 수혜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거겠지.”
지난번 프랑스 경매장에서처럼 기대작을 앞에 배치해서 고평가를 유도하겠다는 것인가.
그나저나 1억이 내 성에는 안 찰지 몰라도 부모님에게는 큰 돈이었다.
아버지가 괜한 고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아들의 첫 작품이라고 나보다도 더 단호하게 판매 제의를 뿌리쳐오던 그였다.
1억이라는 돈이면 현재의 금전적 어려움을 충분히 해소하고도 남을 액수일 것이었다.
“그럼, 웃돈 빼고 다른 작품으로 경매하면 안 되느냐고 물어봐주세요.”
“응? 다른 작품이 있어?”
“아직 없는데, 이번달 말이랬죠? 그때까지 하나 더 그리면 되니까요.”
앞으로 더 잘 그릴 자신이 없는 게 아닌 이상, 이 정도 여론의 관심에 목 맬 필요는 없었다.
지금 <환생>을 팔면 큰 돈을 만지는 대신 고평가가 지체된다.
그리고 <환생>이 빠지면 갤러리 화담의 관람객도 다시 옛날처럼 줄어들겠지.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참치 김치찌개는 절충할 수 없는 완성된 요리들이었다.
괜히 돼지고기와 참치를 둘 다 넣어서 끓이면 기름 잡내가 심한 실패작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충분히 둘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되면 <환생>은 볼 만큼 본 상태일 거예요. 제가 차기 작품을 서울옥션에서 최초로 발표한다고 하면 수집가들한테도 의미가 있고 서울옥션 쪽에서도 홍보하기 좋을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걱정스러운 것이 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그림을 다 그려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겠지.
괜한 걱정이었다.
내겐 그때까지 충분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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