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7화 (17/241)

착각

잠이 없는 일섭보다도 예준은 오래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늦어져 윤군이 걱정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예준이 작업실에서 나왔다.

“제 그림 좀 봐주실래요?”

종이 캔버스였으니까 그리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얼마나 많은 캔버스가 쌓여 있을지 궁금했다.

예준을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을 쓰지는 않았다.

“뭘 보면 되냐?”

“지금 이젤 위에 있는 그림이요. 저거.”

그 잠깐 사이 불을 끄고 나왔던 예준이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이젤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을 보는 순간 눈이 서늘하게 시렸다.

중년의 남성이 유리로 되어 있는 듯한 욕조에 누워서 눈을 반쯤 떴다.

대부분의 지면은 얼굴이 차지하고, 몸은 딱 한 쪽 어깨까지만 나오는 구도였다.

중년은 조금 늙었지만 힘이 넘쳐 보였다.

긴 수염은 풀뿌리처럼 늘어져 욕조의 물에 닿았다.

담긴 뿌리 근처로 일렁이는 물결의 표현이 대단하다 못해 완전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은유하는 자줏빛 꽃잎들은 물결 못지 않게 현실감 넘쳤지만 동시에 신비로웠다.

단순히 환상적인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꽃잎은 표현이······”

“먹물 번지는 것처럼 질감을 표현해봤어요.”

그림을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하는 회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회화적인 면을 이렇게 전방에 배치하고 묘사까지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치 않았다.

‘천재적이군.’

동양화 천재로 오래 살아본 일섭이었다.

하지만 일섭은 자신의 재능이 단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붓에 운치를 타고 났다.

산을 그리고자 각진 선을 하나 그으면 부족한 점이 직관적으로 보였다.

그 부분에 칠하기만 하면 그게 완벽한 표현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노령산맥>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도 그러한 천재성 때문이었다.

그림이 큰 만큼의 체력만 더 쓰면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전위적이었다.

<환생>을 봤을 때는 그림 실력이 뛰어나고 동양화적 표현법에 능숙한 화가라고만 생각했다.

나와 조응하는 특수한 예술가라고 말이다.

예준은 단순 묘사력으로만 놓고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딱 극사실주의의 지루함이 나타나기 직전 단계까지만 묘사를 끌어올렸다.

열 살에 이 정도면 모두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섭은 단 하나를 타고난 뒤 나머지를 노력으로 채웠다.

예준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수도 없이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었다.

“어때요?”

예준이 물었다.

“음······. 어떻긴. ”

어느 공모전에 출품될 작품인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부족함이 없을 그림이었다.

*

“이건 전체적으로 우수하네. 그림에 표현된 모든 정물들이 의미가 있어. 내가 괜히 아무런 맥락도 없는 클립 같은 거 띄워놓지 말랬지? 말아놓은 나뭇잎이 허공에 잘 표현돼 있으니까 입체감도 있잖아. 여기 이 새랑 꽃, 물까지 다 잘 그려진 그림이야. 훌륭해.”

정선생님이 말을 마치자 도연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결함도 지적하지 않았다.

도연은 그림을 제출할 때마다 우수작들 중에 최고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인터넷에 뭘 검색해보든 도연의 것보다는 덜하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 그림은······ 우리가 보통 하는 사고의 전환과는 느낌이 다르지. 그런데 뭐, 사고를 전환하기만 하면 되니까 큰 무리는 없어. 꽃이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꽃이 여인도 아니라 노인인 게 특히 인상깊네.”

“그럼 둘 중 뭐가 더 잘 그렸는데요?”

정선생님은 나의 것과 도연의 것을 한 번 더 번갈아 보곤 나의 그림을 들어올렸다.

“와! 역시.”

“기준에는 안 맞지만 ‘사고’를 ‘전환’했기 때문에 탈락 사유도 아니고, 관습적인 걸 다 떠나서 손을 들어줄 만큼 표현력이 압도적이야. 표현력이 높을수록 상상의 여지도 많아진다는 내 숙제 취지에도 맞고.”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그림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더니  결국 정리했다.

“다들 잘했어. 몇몇 아쉬운 사람들이 있지만, 예준이 그림이 가장 상을 받을 확률이 높은 것 같아. 다들 불만 없지?”

다들 인정했다. 그렇게 서울 미술 실기 대회 투고작으로는 나의 그림이 선정되었다.

도연이 진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도연의 반응을 살피지 않았다.

성장 이전에 도연을 괴롭힐 충격이 지금 도연을 괴롭히고 있을 터였으니까 말이다.

수업이 끝난 후, 도연은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소원.”

“네?”

“내기했잖아. 소원 들어주기로. 네 소원이 뭐냐구.”

눈시울이 조금 붉었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주셨던 코코넛 주스, 그거 혹시 더 있어요?”

“......그게 소원이야?”

생각해둔 소원 같은 건 없었다.

애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도, 애초에 바랄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내게야 어쨌든 도연에겐 진지한 승부였을 터였다.

도연은 나를 카페로 안내했다.

지난번의 그 코코넛 주스는 집에 있어서 당장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덕분에 파인애플이 섞인 코코넛 주스를 먹게 되었다.

메뉴판을 자세히 살폈지만 그게 다였다.

먹는다면 딱 그날 먹었던 걸 먹고 싶었는데, 맛이 밋밋해서 일부러 다른 향을 첨가해서 파는 모양이었다.

[초록 악마: 압생트 칵테일]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압생트······ 그건 여전히 남아 있나보구나.

전생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면 압생트를 마시는 시민들이 많이 보였다.

도수가 상당히 세기에 조금씩 희석해서 먹는 것도 좋은 술이었다.

‘그래서 데빌인가?’

종종 마셔봤지만 맛도 좋았다.

너무 강해서 몸이 좀 힘들어지긴 했지만

오랜만에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겐 술과 담배를 팔지 않았다.

“뭐해?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압생트 칵테일을 가리키려다가 말았다.

자리를 잡고 음료수를 기다렸다.

도연은 아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유쾌한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눈을 보지도 않았고, 머리는 한 번 쥐어뜯었는지 조금 흐트러진 상태였다.

“너도 네가 잘 그리는거 알지.”

“대회에서는 다를 수 있잖아요. 제 그림이 독특하기도 하고. 그런 거 잘 용납 안 해준다던데.”

세상에 완벽한 그림은 없었다.

어느 그림에나 틈과 흠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지나친 오만이었다.

미술 실기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게 예술적인 흠은 아니었지만.

흠결 있는 그림에 대해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칭찬할 때의 소외감을 도연은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환생하기 전 마네도 그랬듯.

“선생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특별반 선생님들이 왜 특별한지 알아? 일반 초등반 같은 곳 선생님들도 그림은 다들 우열 없이 잘 그리는데.”

“뭔데요?”

“일반적인 안목은 물론이고 각 실기 행사나 입시 트렌드를 완전히 꿰고 계시거든. 기준에 맞지 않아도 고평가 받을 수 있는 그림, 기준은 맞췄지만 좋은 평가는 받을 수 없는 그림 같은 걸 다 아셔. 그러니까 정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상은 타게 돼 있어.”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훌륭한 화가인 동시에 훌륭한 입시 전문가라니.

아마 미술계에 인맥도 대단하겠지.

갑자기 도연이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기계가 빛나며 소음을 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것이 소란을 피우자 도연은 계산대로 가 음료 두 잔을 챙겨서 가져왔다.

자신은 김이 슬슬 올라오는 유자차를 챙기고 내게 코코넛 주스를 건넸다.

코코넛 알갱이들이 점잖게 유리컵 아래 깔려 있었다.

추운 참이었는데, 괜히 주스를 시켰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코코넛 알갱이는 씹는 맛이 있었고, 지난번 도연이 줬던 것보다 달짝지근했다.

단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과일은 좋았다.

“어? 눈온다······!”

도연이 눈을 반짝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곧 12월이었다.

첫눈치고 눈송이가 컸다.

도연은 잔뜩 들떠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항상 부어 있는 모습만 봐 왔는데

웃는 걸 보니 낯설었다.

“눈 좋아하세요?”

도연이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아, 아니거든?!”

그리곤 괜히 유자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눈만 은근히 창밖을 힐끔대면서.

*, , <가을의 여인> 그림, 각주

전생의 나는 사계절을 모두 그리려고 했다.

봄의 여인은 우아한 양산을 썼다.

여름의 여인은 활동적인 승마복을 입었다.

가을의 여인은 단정하게 여몄지만 감춰지지 않는 화려함이 귀걸이에서 드러났다.

겨울은 그리지 못했다.

겨울 내내 앓았다. 그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쫓겨나듯 죽었다.

계속 방 안에서만 칩거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마지막 겨울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몸으로 맞는 첫 겨울이었다.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도연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대박. 저 강아지 눈 먹는다.”

도연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나도 도연처럼 눈이 좋았다.

눈은 차갑게 내리지만 사람들에겐 부드러운 풍경을 선사했다.

완전히 새로운 풍경.

자고 일어나 눈 내린 바깥을 내다보면

몰랐던 파리의 모습에 감탄하게 되었다.

‘사계절을 완성할 수 있겠어.’

겨울의 감정은 언뜻 쓸쓸하지만 어느 계절보다도 새로움을 통한 설렘을 크게 선사했다.

그런 겨울과 환하게 웃는 여인은 겨울에 관해 가장 정교한 단상을 탄생시켰다.

나는 코코넛 주스를 완전히 들이켰다.

입에서 시작된 단맛에 정신이 일순간 아득해졌다.

“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뭐? 난 아직 다 안 마셨는데······”

“감사해요!”

그리곤 카페 바깥으로 뛰쳐나가 황급히 뛰었다.

이 인상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화폭에 옮겨야 했다.

이일섭의 작업실로 지금 당장 가봐야겠다.

*

다급히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일섭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눈발은 계속 거세졌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작업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눈이 내리기에 네가 뭐든 그리고 싶어할 줄 알았다. 들어와라.”

신발을 벗자마자 바로 2층에 있는 작업실로 뛰어 올라갔다.

작업실엔 이젤이 놓여 있었다.

일섭은 종이를 박스형의 좌식 단상 위에 깔고 동양화를 그렸다.

이젤은 수채화를 그릴 때마다 그때그때가져다 펼친다고 했는데

내가 종종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이젤을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그 앞에 바로 앉았다.

흰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배경과 환히 웃는 여인.

빠르게 스케치해 옮겼다.

여인은 좌측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눈은 어스름이 내린 허공을 채워넣듯이 밝게 내렸다.

여인은 가장 기뻤고 겨울은 가장 화려했다.

그 두 가지 인상을 최대한 자세히 스케치했다.

그러자 앞선 카페에서의 구도가 완전히 드러났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바꿔서 인상이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은 바꿨다.

여인은 눈을 직접 맞아 겨울에 완전히 안기도록 그렸다.

대신 복장과 유자차는 모두 유지했다.

갈색 코트, 흰색 털모자, 그리고 유자차.

그들 중 무엇도 겨울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눈을 맞아 젖은 옷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모두 그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계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겨울의 색채를 완벽하게 표현할 방법을 침착하게 떠올려내는 게 중요했다.

모든 사람이 계절 속에 살았다.

전생의 나는 계절마다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다.

나의 창작 욕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계절은 그 중에서도 겨울이었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해 마저 그리지 못했다.

‘이젠 그릴 수 있다. 그릴 것도 있다······!’

전생에 완성하지 못한 것을 방금 내가 눈으로 보았다.

미리 조작하고 배치한 것처럼 탁월한 구도였다.

오래 붙잡고 그려도 좋은 그림이었다.

*, , <가을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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