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8)
학원에 좀 더 남아 기타 보충하고 싶은 것들을 계속했다.
그러던 도중 책상 위로 한 무더기의 그림이 휙 던져올라왔다.
고개를 들면 또 도연이었다.
“뭐예요?”
“뭐긴. 그림이지.”
나는 그림을 들어 하나씩 살폈다. 모두 카밀라였다.
‘맞다. 그때 카밀라로 연습하면 좋다고 충고했었지.’
여러 구도에서 시도된 카밀라였다.
내게 보여주는 건 이게 전부겠지만 백 번도 넘게 시도한 티가 났다.
특별반 에이스 답게 훌륭한 솜씨들이었지만 도연이 원하는 경지는 이 정도가 아닐 것이었다.
한 장 한 장 성의있게 살펴보았다.
“어때? 네가 하라는 대로 물도 주고 직접 길렀어. 급한 대로.”
어투는 뾰루퉁하지만, 나에게 한 마디라도 들어보고 싶은냥 조심스럽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카밀라는 한겨울부터 늦겨울까지 피는 꽃이었다.
야외에서 키웠다면 생각보다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려온 그림을 대충 봐줄 순 없었다.
“누나는 충분히 잘 그리시니까 이렇게 긴장하고 그릴 필요 없는데. 캐치하신 부분이 어떤 아름다움인지는 알겠지만 워낙 표현력이 풍부하셔서 확신하지 못하시는 순간 과해지는 것 같아요.”
반은 과장이었다. 자신의 표현이 과한지 아닌지를 아는 것까지가 표현력에 들었다.
“음. 예상했던 지적들이네. 맞아. 내가 조금 그런 게 있어. 누구한테 피드백을 받아봤어야 알지.”
그건 확실히 악조건이기는 했다.
“다른 건 없어?”
“기본기는 다 갖춰져 계신 것 같아요.”
“······그래?”
도연이 의심을 눈초리를 쏘아대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다는 듯 자신의 그림들을 갈무리했다.
도연은 그 나이대 아이들 치고 실력이 매우 우수했다. 하지만 그 열정은 쉽게 전복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칭찬하는 게 좋았다.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이 화가의 가장 큰 적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도연을 너무 빤히 봤다.
자존심 센 도연은 눈을 바로 돌려버렸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지금까지 죽어 있는 그림을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동백꽃 그리면서 좀 답을 찾은 거 같아. 살아 있는 걸 그리면 되는 거였어.”
아이디어는 조금 달랐지만 그 말 자체에는 동의했다.
“이건 뭐예요?”
“코코넛 워터야.”
코코넛?!
주스로도 먹지만 그 외 다른 상품의 재료가 되는 일이 많아 매우 비싸게 거래되는 열매였다.
멀리서 들여오는 식품이기도 했고.
‘그리 대단한 칭찬을 해준 건 아닌데 이렇게 귀한 걸······’
코코넛 주스는 두꺼운 종이팩에 담겨 있었다.
포장지 하단에 적힌 ‘코코넛 과즙 함량 99.9%’라는 글자가 위용을 과시했다.
“이거······ 엄청 비싸지 않아요?”
“엄청까지는 아니고. 용량 치고 비싼 편이긴 한데, 너 덕분에 생동감 표현하는 법 알게 됐잖아. 그래서.”
도연은 가만히 서서 머뭇거렸다.
아마 감사하다는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감사 표현에 매우 서투르기 때문이었다.
도와주자.
“그래서, 고맙다는 뜻인 거예요?”
“······ 나 갈래.”
그리고 또 도연은 먼저 교실을 문을 박차고 먼저 나섰다.
*
다음날 수업은 상상화였다.
아이들의 반응은 의외로 썩 좋지 못했다. 소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나도 자주 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더 발전적인 것을 원했다.
욕심이 있는 것은 나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곳에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수도 있겠다.
“미술적 상상력은 너희들이 얼마나 많이 그릴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그래서 어제 정물 소묘를 한 거고. 일반적인 질감 상상에 익숙해지고 나면 상상화에서도 공감을 살 수 있게 돼.”
그리고 정선생님은 도형 표현의 상상화 응용 예시를 하나씩 보여주었다.
우주 공간을 비행하는 접시형 비행물체나 사과 모양의 잠수정 등 터무니 없는 소재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들이었다.
“구체적인 상상력의 표현은 기본 요건이고, 원형이 되는 정물에 대해 어떻게 사고를 전환했느냐가 평가의 키포인트인 거야. 단순히 형태의 유사성 이상의 관련이 있어야 해. 그런 의미에서”
[사고의 전환]
정선생님이 펜을 들어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사과든 포도든 각자 원하는 정물을 하나 정해서 상상화로 표현한다. ‘사고의 전환’ 작품 낸다고 생각하고. 오늘 수업시간에는 그리면서 중간중간 피드백 받고, 과제로 최종 작품을 해오면 돼.”
아이들이 받아적었다.
“과제요? 필수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가장 좋은 그림은 이번 서울 미술 실기 대회에 대표로 출품할 거야. 각자 개인적으로 출품하는 건 자유지만.”
아이들에겐 그게 필수라는 뜻이었다. 그려오지 않을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규모가 큰 대회라는 말엔 나도 제법 구미가 당겼다.
프랑스로 치면 파리에서 주재하는 미성년자 그림 대회였다.
잡지에 이름을 싣기는 했지만 전방위로 노력해야 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목표에 다가가기가 수월해졌다.
새로운 사조를 만들고 최고의 거장이 된다.
나는 계속 품어온 꿈을 되새기며 반드시 출품해 성과를 내리라고 다짐했다.
수업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또 내 책상에 그림자가 하나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주인을 확인하면 예외 없이 도연이었다.
“너 저거 그림 낼 거면 나랑 내기해.”
“네?”
정선생님이 말한 사고의 전환 과제 이야기였다.
“무슨 내기요?”
내기 내용을 묻자 도연은 뒤늦게 고민에 빠졌다.
오로지 나를 이기는 것만이 목표인 모양이었다.
이해했다.
보상보다는 승리 그 자체가 더 달콤한 법이었으니까.
“어차피 출품작 선정은 너 아니면 나야. 선정된 사람한테 소원 들어주기.”
이번 과제는 그 자체로 미술 입시의 모든 것이라고 과장해도 무리 없는 정물화였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입시를 준비해온 도연으로서는 자신이 없을 수가 없었다.
기준이 확실한 대회였다.
실력과는 별개로 얼마나 익숙하느냐가 최종 관건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실력이 압도적이라면 1등상을 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좋아요.”
어차피 대회는 출전할 생각이었다.
굳이 힘써서 어울려주지 않을 이유는 없지.
내가 내기를 받아들이자 도연이 싱긋 웃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였다.
사고의 전환.
낯선 미술이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어보였다.
*
“그림을 제출해야 할 이유를 두 개나 만들어 온 셈이구나.”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이일섭이 말했다.
실기 대회 우승과 도연과의 내기 이야기였다.
“이유가 둘이라기보다는······ 둘 중 하나는 거저인 거죠. 소원이나 뭐 빌지 생각해봐야겠어요.”
일섭이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모두가 프로 화가를 꿈꿨지만 지망생의 즐거움이라는 것도 있었다.
오랜 지망 생활과 혹평을 견뎌봤기에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진 채로 그림에 몰두하는 순수한 열정.
아마 일섭은 내가 그걸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어차피 따놓은 당상이라면 네가 제일 잘하는 걸 그리면 되겠다. 승부엔 원래 그게 예의야”
일섭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작업실로 안내했다.
승부라니. 내가 내기에 더 집착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작업실의 분위기는 그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완벽히 정돈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미술 도구에 한해서는 관리가 철저했다.
모두 정석적인 방식으로 보관되었다.
특이해보이는 건 수묵화 도구들이었다.
일섭의 권유로 몇 번 다뤄보긴 했지만 그 보관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용하고 나면 세척 과정을 거친 뒤 나무로 된 궤짝 같은 곳에 보관했다.
한 번은 내가 직접 정리하기 위해 그 세척 과정을 물어봤지만,
일섭은 매일같이 소독하는 건 오히려 붓에 안 좋다며 물에 헹궈 방충 처리만 했다.
캔버스를 두고 여러 도형을 이리저리 배치해보았다.
창의적 발상에도 기준이 있다는 건 조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용해야 했다.
미술학원 게시판에 있는 모범작들을 떠올렸다.
난이도가 높은 정물 배치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림에 좋은 평가를 주는 것 같았다.
사물이 복잡하게 겹쳐 있고, 또 그것이 유리병에 비쳐 왜곡되는 상이라든가.
그물 너머 농구공이 있는데 그물의 그림자가 농구공에 비친다든가.
‘사고의 전환’이란 것은 미술 실기의 한 가지 분야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기반으로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기타 상상화와 ‘사고의 전환’은 아이디어는 달랐어도 중요하게 평가하는 요소가 같았다.
표현력이었다.
단순히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라면 방법은 많았다.
정물에서 중요한 건 생동감이었다.
생동감을 살리는 선에서 최대의 시도를 해보겠다.
우선 연필을 들어 작업을 시작했다.
모란을 한 번 더 그리지만 이번 모란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화왕계 설화를 떠올렸다.
욕조에 있는 왕의 모습을 얼굴만 그리고 멀리 꽃병에 할미 꽃을 한 송이 꽂아놓았다.
할미꽃은 멀리 있지만 그 존재감은 부각해야 했다.
전면회화 기법을 활용해 왕과 할미꽃이 평면상에 있는 것처럼 공간을 왜곡할 것이었다.
대신 놓친 공간감과 원근은 왕의 얼굴에서 되찾았다.
왕의 얼굴은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했다.
붓을 들었다.
왕은 유리병 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두운 자줏빛의 모란꽃잎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얼굴의 주름을 치밀하게 살리고
귀에 초록색 장신구를 달았다.
대신 수염은 갈색이었다. 수염은 뿌리의 곡선을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자 왕의 거대한 얼굴이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할미꽃의 존재감을 잡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제법 실기 소묘 같기도 했다.
‘너무 과했나?’
인물을 꽃처럼 표현하면 캐릭터성이 짙어지리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것이 작품의 긍정적인 포인트가 될 수 있다면 상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더 살려낼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절묘한 그림이 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캔버스를 꺼내 다시 그렸다.
구도는 유지하되 꽃잎의 묘사는 색다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전처럼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대신 꽃잎에 동양화스러운 농담을 살렸다.
현실처럼 보이면서도 회화적인 느낌은 꼭 포함되어야 했다.
두 번째 그림을 완성했다.
꽃잎 한 장 한 장이 아주 미묘한 원근 속에 있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구성되었다.
이걸로 할미꽃의 전면회화에 신뢰감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왕의 캐릭터성은 동양화풍의 신비로움으로 중화시켰다.
미래 과학을 상상하는 것도 좋지만 신화적인 상상력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릴 수 있을 만큼만 그렸다.
하지만 동양화에 대한 감각만 조금 추가되었을 뿐
생각했던 만큼의 새로운 시도는 없이 말이다.
‘수채화를 접한 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앞으로 이 학원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의문과 동시에 내 선택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