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14화 (14/241)

작은 거인(6)

“저 작은 모란이. 제 수명보다도 더 먼 바닷길을 항해해 왔구나.”

일섭의 감상에 아이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섭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화가는 자신의 꿈을 떠받드는 그릇이다. 모두가 제 그릇만큼만, 제 이룬 꿈만큼만 그릴 수 있어. 하지만 저 모란······ 아니, 화가는 그렇지 못했다. 제 거대한 꿈을 도저히 담지 못하고 깨져버렸지. 그러니 내가 봤을 적에 저 거름은 단순히 시체가 아니야. 저건 화가의 깨진 그릇이다.”

오랜 꿈을 꾸어온 일섭은 <환생>을 바르게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시체를 거름삼아 꽃을 피운다는 게 무엇인지.

허름하게 표현된 시체는 일섭의 모든 실패를 위로했다.

신비롭고도 당차게 표현된 모란꽃은 일섭의 미래를 응원했다.

마치 일면식도 없는 윤예준에게 이해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윤예준이라는 화가와 자신은 무언가 통하는 게 있을 것이었다.

윤예준. 일섭은 그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일섭과 같은 경험을, 그러나 일섭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경험해본 화가일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아이의 해설이 제법이었다.

<환생> 때에도 느꼈지만 아이의 해설은 무언가 특별했다.

어떤 작품에 대해서든 그 작품 자체와 대화하는 느낌을 주었다.

같은 기삿감이라도 이 아이는 전면 특보감이었다.

그래서 특별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일섭은 매우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십중팔구 실망하게 될 것임에도.

아이는 마음을 다잡은 일섭을 매번 다시 부추겨 흥분시켰다.

“여기서부턴 이일섭 화백의 특별전인데, 일단 대표작부터 살펴볼게요.”

그렇게 말한 아이는 일섭의 <도약> 앞으로 가서 섰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도약하고 있지 않은데 작품의 이름은 <도약>이에요. 왜일까요?”

“글쎄다.”

“앞선 <환생>의 모란꽃은 스스로 몸집을 키우고 성장하기 때문에 상승감을 주지만, 이미 다 자란 이 ‘난’은 오로지 명암과 시선을 통해서만 상승감을 주고 있잖아요?”

그랬다.

그 상승감을 잡아내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표현에 실패할까봐 명암을 강렬하게 처리했더니 생각보다 상승감이 과해졌다.

다행히 과했던 만큼 강렬해져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긴 했지만 말이다.

“시선을 통한 성장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시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난이라는 식물은 절개를 상징하는데, 이 이일섭 화가만의 철학과 예술관을 끝끝내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거죠.”

그러한 의지만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기는 했다.

이 작품에 의도하고 담아낸 것인지는 일섭으로서도 확신이 없었지만.

“조금 우스우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는 <도약>에는 그래서 내러티브가 존재해요. 역동적인 동양화풍 그 자체를 이 작품의 주요 모티프 삼아 그 안에 있는 난의 상승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는 거예요. 난은 감상자의 의지를 담는 그릇이죠.”

그러고 보면 그랬다.

우선 난을 선택한 것은 일섭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식물이라서가 컸다.

그러나 난은 사군자 중의 하나로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누구의 지조와 절개인가?

조선시대 때처럼 지아비에 대한 여성의? 임금에 대한 신하와 백성의?

<도약>에 유예되어 있는 빈칸을 채우는 건 일섭과 감상자들이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그림은 모두의 공감을 살 수밖에 없어요. 감상자는 이 표현의 기교에 감탄하고, 그것이 단순 기교가 아니라 탄탄한 회화적 바탕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또 감탄하고, 끝으로 이 작품이 완전히 감상자 자신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데에 감탄하게 되는 거예요.”

완전히 감상자의 것이 되어버린다라.

공감이 된다는 평가를 이렇게 후하게 해줄 수도 있다니.

일섭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일정정도는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아이의 해설이었더라도.

도약은 이륙이 아니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발전하는 것.

건너뛰는 것 없이 발전의 모든 것을 체화하는 것.

일섭은 그렇게 도약하고 있었다.

설명을 듣고 <도약>을 바라보고 있는 일섭에게 아이가 대뜸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이일섭 화백이에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아이에겐 둘러댈 이유도, 둘러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되물었다.

“자기 작품에 대해 호평을 듣는 화가의 표정이셨어요.”

“뭐?”

역시나 재미있는 아이였다.

“그래. 맞다. 내가 이일섭이다. 그런데 그런 ‘표정’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네. 저도 지어봤던 것 같거든요.”

의외의 대답이다.

“그래? 언제 말이냐?”

“아까 <환생>에 감상평 말씀해주실 때요. 제가 그걸 그렸거든요”

*

다시 미술관을 나가기 위해 입구로 향했다.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는지 여기자와 윤군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따로 질문지 뽑아다가 전달해드릴게요. 그럼 어디, 우리 한 번 유명해져봅시다!”

여기자는 힘찬 팔뚝질을 한 번 해보이곤 미술관을 빠져나갔다.

처음엔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그리 기분 나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작품 해설 고맙구나.”

“에이, 아니에요. 화가님이신데 전문 큐레이팅이 아니어서 제가 죄송하죠. 그리고 제가 이일섭 화백님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도 하구요.”

“그래?”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나저나 신비로운 아이였다.

<환생>을 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가 윤예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환생>을 어떻게 그렸느냐고 물었을 때,

예준은 만약 자신이 전생에 꿈을 못 이루고 죽은 누군가였다면, 의 가정에서 착상했다고 설명했다.

상상력이 극도로 풍부한 아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일섭이 알기로 윤군은 고작 홍보를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믿기지 않더라도 결국엔 믿어야 했다.

오히려 그 아이가 <환생>의 화가라고 하면 아이의 해설이 이해가 되었다.

그 정도의 감상을 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환생>의 화가 정도는 되어야 했으니.

여기자 배웅을 마친 윤군이 일섭과 예준을 보았다.

“어, 예준아. 벌써 끝났어?”

“네. 이 분께서 이일섭에 대해 잘 알고 계셔서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속도 깊었다. 비밀로 해달라고 따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애처럼 수선을 떨며 떠벌리지 않았다.

“좋은 직원을 두셨더군요. 아주 천재적인 큐레이터가 될 것 같아요.”

“하하······ 아닙니다.”

윤군은 마치 자신에 대한 칭찬을 사양하듯 했다.

항상 대리인을 통해서만 대화를 주고 받아왔다.

이 정도만 해도 기분은 좀 후련했지만 윤군을 대할 땐 조심해야 했다.

“아무튼. 이 아이와 친해지게 됐습니다. 친구가 되었어요.”

“예······? 친구요?”

“그래요, 친구.”

어떤 화가와의 대화도 예준과의 것처럼 즐겁지 않았다.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준은 달랐다.

일섭은 자신과 예준이 서로 최고의 화가, 최고의 감상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지 수첩을 꺼내 자신의 주소를 적었다.

종이를 뜯어내 접으며 말했다..

“여기, 아까 말했던 주소. 나중에 심심할 때 찾아와. 가지고 놀 게 아주 많다.”

예준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럼 그림 잘 보고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일섭이 인사한 뒤 민제는 예준의 손에 들린 쪽지를 함께 살폈다.

“이게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빠.”

미술관을 빠져나가던 일섭은 ‘아빠’라는 단어에 멈춰섰다.

‘아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윤씨였지.’

일섭은 그제야 이해가 좀 되는 것 같았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어쩌다 미술관 안내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

나는 이일섭의 삶이 궁금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젊은 천재였지만, 실제로 봤을 땐 나이가 꽤 있었다.

전생의 나와 엇비슷할 것이었다.

그 정도 천재성이면 일찍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 동안 작품활동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해왔을 확률이 컸다.

느지막이 취미로 한 번 그려본 그림이 초대박을 터뜨렸다거나.

하지만 그림만 봐서는 고작 한두 해 그려본 사람의 실력이 절대 아니었다.

연륜이 있는 베테랑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도 나처럼 어디서 환생해온 거 아니야?’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가, 내가 그 경험을 실제로 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환생한 사실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과거의 일이 점점 멀게만 느껴져 갔다.

내가 무엇을 원했고 잃었는지. 이번엔 무엇을 이루고 얻어야 하는지.

그 꿈만은 강렬하게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일섭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그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적어도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세월 무엇을 하며 살았을지 정도는 알 만했다.

‘성공한 기업가였나봐······’

초호화 저택이었다.

으리으리한 한옥풍 저택이었지만 마당엔 인조 정원이 있었다.

일본식은 아니고, 자유분방하게 굽은 소나무를 제외하면 차라리 유럽식이었다.

좌우로 상당히 넓었지만 지붕은 완만하게 잘 굽어 있었다.

정원이 잘 꾸려져서인지 곳곳에 참새가 날아들었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쪽지와 대문 옆 지번을 여러번 대조해보았다.

이 장소가 맞았다.

인상만 봐서는 기본소득층의 노인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대저택이라니.

‘설마 신인이 그림으로 이런 큰 저택을 샀을 리는 없고.’

침착하게 초인종을 누르자 벨소리 대신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호출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집에서 대문까지 너무 멀어 벨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어, 윤화백 왔는가?

반복해서 흘러나오던 안내 음성이 끊기고 이번엔 이일섭의 목소리였다.

“어······ 제 목소리도 들리세요?”

-들리지. 거기 마이크도 달려 있으니까.

잠금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밀어보니 안쪽으로 큰 호를 그리며 열렸다.

철창으로 되어 있는 대문이었지만 막상 정원으로 들어서니 본격적으로 풀냄새가 풍겨왔다.

이런 정원이 있는 집에 살다니. 부러웠다.

나도 전생엔 잘 사는 부모를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놓은 집이 얼마나 큰 행복감을 주는지 잘 알았다.

집 전면을 거의 다 채우는 발코니 뒤로는 통유리였다.

커튼이 잘 접혀 집 안 거실이 모두 들여다보였다.

발코니는 한옥 마루의 현대적 재해석인지, 나무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복층 구조로 되어 있어 천장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그 외에도 고급 바닥에 곱게 깔린 수 카펫, 번지르르한 청자,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 밑 황금빛 액자들.

인테리어도 작품인 것 같았다.

“바로 놀이터로 가보자. 어때?”

그의 그림을 보며 차분히 이야기 나눌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 정도 규모면 당연히 개인 작업실도 있을 것이고······ 또 공개하지 않은 그림들도 많을 것이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온 것이었다.

“좋아요.”

이일섭은 웃으며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디귿자 구조로, 거실이 통유리 벽뿐만 아니라 천장도 통 창으로 되어 있었다.

채광이 대단해 시원하게 탁 트인 기분이었다.

이일섭의 작업실은 2층의 끝방이었다.

넓은 그 방 안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들뿐이었다.

작품들도 많았다.

전시를 많이 한다기에 모두 동원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보관하는 것치고 너무 그림이 많았다.

“저 그림들 좀 봐도 돼요?”

“여기 네가 만지지 못 할 게 하나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초대도 안 했을 거다. 마음껏 봐라.”

누구나 자신의 아틀리에에서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일섭은 별로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저것 함부로 만져보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켜켜이 세워진 액자로 다가가 한 겹씩 벌려 내용을 확인했다.

전통적인 동양화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일섭 특별전엔 서양식 물감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들만 있었다.

‘일단은 동양화가니까 이런 전통적인 것들도 그렸겠지.’

나는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한쪽 벽면 전체를 넓게 가리고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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