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4)
동백꽃 묘목은 모종삽으로 조심히 옮겨 심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위로 피어난 자연의 것 같았다.
도연은 동백꽃이 집 앞 마당에 썩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윽. 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흙장난이야.’
도연은 황급히 모종삽을 던지고 손을 털었다.
땅을 깊게 판 탓에 손엔 축축한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삽질은 살면서 해본 적이 없었다.
서투르긴 했지만, 옮겨심겠답시고 꽃을 완전히 뽑아내 다시 심을 만큼 모지리는 아니었다.
너무 깊게 판 것만 제외하면 훌륭한 이사였다.
‘좀 이상한가?’
화분에 있던 흙 그대로 옮겨진 카밀라는 딱 그 부분만 진하고 기반이 낮아서······ 어딘가 강력해보였다.
가게 주인은 지금이 꽃 필 시기가 아직 안 되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했다.
하지만 실내에서 키울 셈이었으면 그렇게 다급히 사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꽃 하나 사겠다고 그렇게 헐레벌떡 뛰쳐나간 일이 생각나자 부끄러워졌다.
인기 있는 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예준은 동백꽃이 단정하다고 했지만, 그건 촌스럽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나무에 있는 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구도 잡기는 까다로울 게 뻔했다.
또 생육하면 실내 감상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도 했다.
항상 먼지 낀 모습의 동백꽃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설마 나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오히려 환영이었다.
멋지게 그려서 높은 콧대를 짓눌러줄 수 있으니.
도연은 마당과 방을 오가며 수십 번의 스케치와 붓질을 반복했다.
어떻게 칠해도 그 촌스러운 듯 단정한 인상은 옮겨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백꽃잎의 사소한 얼룩들까지 모두 살려 그리면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듯했다.
약이 오른 도연은 아예 이젤과 의자를 가져다가 마당 앞으로 나가버렸다.
실력을 너무 자만했다. 스케치만 보고 그려도 완전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거였다.
도연이 그렇게 동백꽃과 씨름하고 있을 때 서정학이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서정학은 서울옥션의 회장이자 도연의 아버지였다.
“뭐하는 거냐?”
난데없이 끼어든 아버지의 목소리에 난폭했던 연필질이 속도를 조금 낮췄다.
“그냥. 그림 연습요.”
신경쓰지 않고 그림에나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만 뒤에서 알짱거리는 건 둘째치고, 그게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못 보던 꽃인데, 동백나무인가? 네가 가져다 심은 거냐?”
“네.”
아버지는 계속 서성대며 동백꽃을 보았다. 도연이 중간중간 그리다가 포기한 그림들이 사방에 버려져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학원 숙제냐?”
“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주고 샀지?”
“······ 2만 5천원이요.”
“그럼 네 그림은 2만 5천원보다는 비싸야겠구나. 아니. 이렇게 낭비한 물감과 종이값까지 하면 더.”
도연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아버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림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림엔 자신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지만 꽤 완성 단계까지 그려진 듯한 그림이었다.
“뭔가 잘 안 되나본데, 이 아버지 눈에는 문제점이 보인다.”
도연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돈에 미쳐있다고는 하나 여러 미술품 경매를 진행할 정도로 안목 있는 미술가였다.
그 안목으로 성장해, 이제는 그에게 그림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도연의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말했다.
“사람들이 꽃 그림을 왜 사는지 아느냐?”
“왜 사는데요?”
“그야 꽃을 보려고 사는 거지. 동백꽃을 그릴 거면 동백꽃만 그려라. 거추장스럽게 이런 예쁘지도 않은 잔가지에 힘 빼지 말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곤 그림을 찢어 꽃머리만 남게 만들었다. 그리곤 도연의 이젤 옆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저 정도면 네 동백꽃 그림은 기능을 다 한 거다.”
“그래도······ 동백꽃엔 그 뿌리부터 줄기, 이파리까지 다 포함되는 거잖아요.”
도연은 더 강하게 항변하는 대신 연필에 힘을 주어 스케치했다.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이미 망친 스케치였다.
“가지가 캔버스에 들어가는 경우는 딱 하나다. 한 번에 여러 꽃을 그리고 싶을 때. 그때에나 나무든 줄기든 그려넣으면 되는 거야. 예쁜 꽃이 하나 그려져 있는 것보다는 두 개 그려져 있는 게 두 배 비싸고, 세 개는 세 배, 열 개는 열 배 비싸지니까.”
말도 안 되는 과장이었다. 하지만 도연으로서는 반론할 수 없었다. 반론하면 아버지는 팔아봤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때 도연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요’밖엔 없었다.
“네 그림은 줄기의 파워에 비해 꽃이 너무 빈약해. 완결성이 없지 않느냐.”
“저 꽃이 그렇게 생겼는데 어떡해요?”
“그러니 꽃만 그리라는 거다. 뭐, 아무리 잘 그려도 팔리지는 않겠지만. 유행이 지난 지 한참이니.”
예술에 유행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을 것이었다.
도연은 영원불변한 예술적 본질을 믿었다.
<천지창조> 같은 그림들은 지금까지도 역작 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아버지 방에 있는 색깔 변조된 마돈나 얼굴 말고. 예준의 <모란>처럼 살아 숨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되도 않는 똥고집 부리다가 돈 못 벌고 도태되는 화가들 여럿 봤다. 그리곤 미술계의 편협함 때문에 자신이 배제당했다고 피해망상에 사로잡혀들 살지. 내가 돈에 눈이 멀었다고들 말하지. 하지만 돈은 절대적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불후의 명작들이 다 얼마인지 아느냐?”
“가격이랑은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관련 있다. 비싸니까 명작이고, 명작이니까 비싼 거다. 값은 태어나는 순간 붙은 도연이, 너의 이름처럼 직접적인 거야. 그러니 오히려 돈에 연연하지 않는 예술을 하겠다는 놈들 사고가 꽉 막힌 거다.”
“······”
“화가 데뷔엔 나이 제한이 없다. 이제 슬슬 돈 되는 걸 그려라.”
아버지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크게 싸우고 싶지만 도연이 누리고 있는 것들 중 무엇도 ‘돈 되는 그림’에서 나오지 않은 게 없었다.
도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스케치를 시작했다.
*
죽죽 긋는 손엔 망설임이 없었다. 조금씩 형태를 잡아가던 스케치가 곧 끝났다.
진한 색을 쓸 것이긴 했지만 수채화였다. 스케치에도 만전을 가했다.
그 결과 연하게나마 완성된 구도가 캔버스에 들어섰다.
‘전보다 백 배는 고심한 뒤 붓을 대야 해.’
울트라마린을 팔레트에 쭉 짰다. 수채화로는 처음 써보는 물감이었지만 이젠 물 농도에 따른 발색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붓털을 만져보았다. 어느 동물의 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 쓰던 것들은 금세 말꼬랑지처럼 망가져서 계속 털을 잘라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붓은 뻣뻣하기도 딱 적당했고 물감도 잘 묻어났다.
‘고심하되 붓질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철저하게 계획하고 계획대로 붓질한다.
계획은 완전히 끝났으니 연습의 성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버벅거리면 색이 겹치고 종이가 상할 것이었다.
붓질을 시작했다.
이제 작은 손과 손가락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환생 전의 사소한 습관까지도 완전히 되돌아 온 상태였다.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 할미꽃처럼.’
그렇다고 할미꽃처럼 희생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날이 발전했다.
오히려 화가였던 전생보다 지금이 밀도 높은 미술적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희생되는 할미꽃도, 강해지는 모란꽃도 모두 같은 할미꽃일 수 있다면.’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도 인정을 누리려면 내가 유행의 중심에 우뚝 서야 했다.
‘이곳에서 배운 모든 걸 일단 녹여내리라.’
울트라마린을 쓰겠지만 바다는 그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식물이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보았던 식물화 중 가장 훌륭했던 건······ 동양화였다.
난을 그리겠다고 미술붓으로 흉내를 냈었다.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수채화로 동양화 느낌을 낼 줄 알게 되었다.
그래. 과거의 실력과 습관만으로 그리는 건 재미없었다.
알고 있는 모든 걸 새롭게 시도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좋았다.
그게 이 그림에 더 잘 어울릴 것이었다.
나는 새 붓을 꺼내 흰 물감을 진하게 묻혔다.
그리고 우하단에 나의 싸인을 적어 넣었다. 물론, Manet가 아니라 윤예준.
싸인을 마친 뒤에야 그림은 완성되었다.
*
예준은 그림을 며칠간 그렸다.
너무 오래 그리기에 먹을 것을 주려고도 해봤지만 차마 방해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열심히 그리는데 혹시나 망치게 되면 상심이 클 것이었다.
열심히 그린 뒤 학교와 학원을 다녀오는 동안 말린 뒤 다음날 밤 다시 시작하는 식이었다.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다고도 했고. 뭐든 열심히 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예준이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거나 쉬는 시간도 없이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덜 되었을 때, 예준은 보통보다 일찍 나와서 거실 한가운데에 뻗어 누웠다.
“오늘은 좀 쉬려구?”
“네. 좀 쉬어야겠어요.”
장소가 좁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주 걸어나와 쉴 수는 있으니 다행이었다.
민제와 연희는 예준이 아예 쉴 줄도 모르고 그림만 그리다가 실신할까봐도 내심 걱정했던 것이었다.
“아빠.”
“응, 예준아.”
“전에 제 모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예준과 많은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모란은 더욱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민수에게 예준의 <모란>을 전송받은 다음 날의 일이었으니.
“당연하지.”
“저기. 제 모란이 있어요.”
예준이 손을 펴 어딘가를 달리 가리키지는 않았지만, 민제와 연희는 그것이 그림 이야기임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오. 매일 뭘 하는 건가 했더니. 그림으로 그려주려고 그런 거였어?”
“네. 방금 다 그려서 아직 다 마르지는 않았어요.”
민제와 연희는 벌떡 일어나 창고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잘 그렸을 것이었다.
예준의 <에밀 졸라의 초상 모작>을 생각하면 연희는 아직도 심장이 뛰었다.
스스로를 실패한 미술가라고 생각했던 연희에게는 그 그림이 유독 더 각별했다.
예준의 유전자 절반은 자신 것이었다.
더는 순수미술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더욱 큰 꿈을 가져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미술관 바깥의 미술, 디자인 분야에서의 성공 말이다.
그들은 창고 문을 연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을 열자마자 밀물져나오는 검푸른 색채가 대번에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대각선 구도인 예준의 그림은 울트라마린을 한껏 사용해 꽃을 표현했다.
하지만 특이한 건 꽃의 색깔뿐만이 아니었다.
꽃은 물론 줄기부터 잎사귀까지 전부 울트라마린으로 채색했는데,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그림 상단의 여백이 거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꽃이 심어진 바닥 부분의 그림자는 대각선 구도에서 엇나가지는 않았지만 꽃의 크기에 비해 너무 컸다.
오히려 표현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과연 그림자는 맞는지 싶을 정도로.
그러나 각도는 유지되어 있기에 광선의 방향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백에 포함된 부분이라 태양빛일지 달빛일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동양화를 많이 보여주기는 했는데, 이건······”
여백도 결국은 흰색이었기 때문에 검은 먹으로 그려진 그림과 함께 사용해야 좋은 기법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꽃, 줄기, 바닥, 그림자 순으로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훑은 뒤 다시 꽃잎으로 올라오도록 시선을 유도했다.
처음 여백에서 시작된 시선은 울트라마린의 꽃을 확인했을 땐 밝은 인상을 줬다.
하지만 그림 하단의 시커멓고 거대한 그림자를 확인한 후 다시 시선을 올렸을 땐 쓸쓸하고 외로운 인상을 남겼다.
대신 처음엔 과해보였던 여백이 나중엔 작은 꽃이 성장해 올라갈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확장성을 확보한 것이었다.
모든 게 절묘했다. 시선의 이동도 자연스러웠고 흰색과 푸른색, 검푸른색, 검은색의 연속성도 마음에 들었다.
그 중 유독 크게 느껴지는 흰색과 푸른색의 간극이 눈에 들어왔다.
“예준아. 이 그림 제목이 뭐야?”
“그림 제목은······ 환생이에요.”
<환생>. 그제야 뒤늦게 섬뜩했다.
그 제목을 들은 민제와 연희는 동시에 그림자 부분으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조금 뻔한 아이디어이기는 했지만 꽃으로 표현할 수 있는 환생이라는 것은 그 아래 깔린 시체 말곤 달리 없었다.
‘시체를 추상적으로 검열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쉽겠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이었다.
아마도 여백에 가려진 광선이 울트라마린 빛 모란의 심층적인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광기가 있으면서도 묘했다.
대각으로 계속 뻗는 검은 그림자와, 그 끝에 이름표처럼 걸린 예준의 싸인까지.
“제목이 환생이라는데. 여보는 어떻게 생각해?”
민제가 묻자 말없이 그림을 쳐다보던 연희가 대답했다.
감상만으로도 힘이 다 빠진 듯한 목소리였다.
“···나 진짜 모르겠어. 우리가 이걸 평가해도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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