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2)
“이야······ 테스트 때 놀랄만큼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닌데요?”
건조장에서 예준의 <모란>을 구경하던 민수가 말했다.
“그러게요. 이 정도 표현력이면 제 수업이 우스워질 것 같은데······”
정선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풀어놓은 유화 물감이 있느냐고 묻기에 정선생이 멋대로 유화 수업을 진행하려는가, 했다.
의아했다. 어느 입시에서도 요구하지 않는, 난이도도 높은 유화를 가르치는 건 여러모로 시간낭비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학원의 오래된 유화 물감들은 다 굳어 있어서 풀어내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급한 대로 민수가 개인적으로 쓰던 것들을 카트에 담기는 했는데, 그게 예준의 요구였을 줄이야.
드로잉 실력을 봤을 때 붓질이야 아무리 잘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유화는 이야기가 달랐다.
‘민제, 이 자식. 제 아들 학대해서 화가 꿈 대신 이루게 하려는 거 아니야?’
민제 같은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민수도 잘 알았지만 유화는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찍어서’ ‘바른다’라는 개념을 안다고 그 물감을 통제할 순 없었다.
유화는 그야말로 ‘훈련’이 필요한 표현법이었다.
“정선생님은 이 그림 어떻게 보세요?”
민수가 묻자 정선생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뭐, 얼마나 잘 그렸는가 하는 이야기는 해봐야 입만 아프죠. 그런 거야 원장님이 더 잘 아실 테고.”
“좋게 보긴 하셨네요.”
수준급의 실력이었으니 당연했다.
“정말로 특이한 건 예준이가 원칙을 어기고 그렸다는 거예요.”
<모란>만 보던 민수가 정선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칙이라니요?”
“그 왜. 저희가 이름은 특별반이기는 해도 사실상 예고 입시반이잖아요? 그래서 가끔 조건을 달아 주제를 주는데, 저는 일체의 변형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민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입을 열려는 순간 정선생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게 특별반 아이들에게 무슨 좋은 영향이 있겠느냐는 말씀은 마세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네. 정선생님 몫이죠. 필요하니까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런 구도도 없는 대상을 제시하면 가능한 구도를 찾아내기 위해 최대한 정물을 관찰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날의 그림은 실패하더라도 관찰력과 미술적 상상력은 키워지게 되는 거예요.”
수업 준비하는 내내 화분을 이리저리 만지며 모든 구도를 차단하던 정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제야 조금 납득한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준이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실물과 다른 점이 상당히 많아요. 역삼각 구도가 분명한 것을 일부러 망가뜨린 채 제시했으니까 기본적인 구도는 발견해 지킨 셈이지만······ 변형은 분명히 있어요. 예준이가 시도한 그 변형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내기가 너무 어렵네요.”
실기 상황이었다면 감점이었겠지만 특별반은 입시반이 아니었다.
변형을 가했다고 감점할 상벌점 시스템도 없었다. 조건을 못 지켰다는 점에 대한 정성적 평가가 반영될 뿐이었다.
하지만 과연 조건을 ‘못’지킨 것인가?
“분명히 무언가 의도가 있는데······ 직접 물어본다고 정말인지 궤변인지 구분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계속 혼자 고민해보기에는 도저히 모르겠고,”
정선생은 골치가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우리가 예준이 자리에 앉아서 똑같이 모란을 봐야 하겠죠. 뭐가 바뀌었는지.”
범재가 천재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민수는 대학시절 질리도록 생각했던 그 물음을 다시 떠올렸다.
범재와 천재의 차이는 노력과 재능의 종적인 정도 차이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일정 정도의 경지에 오른 다음부터는, 화가의 자리에 똑같이 앉아 있지 않으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것들을 그려내게 된다.
그때부터 화가에게 거장이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미묘하게 불가능한 원근이 주는 낯설음을 이용해 감상자의 눈길을 붙잡아두었던 에두아르 마네나, 대상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적인 시각을 임의로 입체-표면화했던 파블로 피카소처럼.
어쩌면 예준은 그 정도 경지에 이르러 있는 소년일지도 몰랐다.
*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 일정을 살피던 민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민수였다.
-어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아들 떠넘기고 요양하니까 기분 좋냐?
“떠넘기기는 무슨. 일주일 정도 일찍 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잖아.”
별 불만 없으면서 괜히 생색이었다.
-뭐, 나도 동감이다. 그래서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바로 붓 쥐여줘봤지.
“그래? 잘 하고 있어?”
-몰라서 물어? 너 대체 애한테 유화는 왜 가르친 거야?
유화를 가르치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오늘 예준이가 유화를 그렸어.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건 민제도 마찬가지였다. 노상 화점 주인과 피에르, 민제는 유화 그림뿐만 아니라 현란하게 움직이는 예준의 붓을 실제로 보았다.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 같았다.
평범한 붓질이 아니었다. 붓을 손가락 사이에 끼거나, 손등이 앞으로 향하도록 역수로 칠하거나, 보지도 않고 손으로 비비거나. 오히려 재능이 아니라 관록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러게 재능을 계속 발견해주려고 하는데, 왜 굳이 중등반이야?”
솔직히 처음부터 궁금했다. 민제가 아무리 지망생들 수준을 잊었어도 예준이 중학생 실력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넌 어릴 때 무협지 안 보고 뭐했냐? 장문인 때문에 자신이 계속 약하다고 생각해온 주인공이 초출 때 확 깨달아버리잖아. 스승님이 센 것이었지 내가 약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그러니까, 무협식 교육이다 이거야?”
-그래. 자기가 가진 것도 끝까지 의심해야 발전이 있는 거야. 재능 좀 있다고 바로 입시 꽂아버리면 나중에 크게 그르친다? 그럼 미대는 보내도 화랑은 못 보내. 지금 예준이가 겨우 열 살인데, 입시만 10년 시키게?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미대 애들이 어디 보통내기냐? 입시 좀 성공했기로 완전히 오만해서는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를 않잖아. 오늘 그림 보니까 예준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어. 근데 그렇다고 고등학생들이랑 어울릴 수는 없잖아? 거기선 완전히 입시만 신경쓰게 되어 있으니까. 지금부터 예술할 거면 여전히 중등반이 적당해.
민수의 말은 학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되 입시는 ‘오만함 방지용’으로 맛만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 중등부 특별반이었다.
방법이 좀 단순한 듯했지만 전문가는 민수였다.
더욱이 입시 미술은 민제도 잘 알았다. 예술성은 애초에 무관했다.
실력은 오로지 기준을 가지고 까다롭게 측정되기 때문에 유리한 건 언제나 입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직접 책임지고 교육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네 말이 다 맞다, 그래. 비싼 돈 내고 부탁 좀 하자.”
-어엉. 그리고 이번 예준이 그림 학원 전단에 넣는다? 첫 그림인데 기가 막히게 나왔어. 완전히 복덩어리다 복덩어리. 흐흐······ 끊는다!
민수는 기분이 좋은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 민수의 목소리를 들으니 돈 얘기를 잠깐 꺼내 간을 보려고 했던 스스로가 너무 미워졌다.
민제는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 유화 그림과 예준이가 그렸다는 짧은 설명이었다.
민제는 이미지 파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민수가 왜 신이 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평범한 구도의 모란 그림이었지만 프로 치고도 대단한 실력이었다.
‘에밀 졸라의 초상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예준이 그린 모란꽃은 현실과 비슷해보이는 선에서 과장된 아름다움을 최대한 추구하고 있었다.
마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과도기에 불행히 낀 천재 화가의 그림처럼.
이 정도면 완전히 진짜처럼도, 완전히 인상적으로도 그릴 줄 아는 화가의 작품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또 낭만주의적 옛 전통에도 어울렸다. 모란꽃의 사실성을 살리는 선에서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답게, 이를테면 모란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아름답다.’
모란의 모든 것을 아는 이에게만 가능한 그림이었다.
작은 화면이었기에 더욱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이제 민제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준은 천재가 확실했다. 또, 천재는 항상 범인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 동안 책임감으로 억누르려 했건만, 아들놈의 재능만으로 매사가 행복해지는 것이 축복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아버지 때문에 다급히 이번주 마지막 수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오늘부터는 약속대로 갤러리에 가야 했다.
갤러리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감질났다.
‘차라리 다음주부터 갔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루 고작 맛만 보고 며칠간 방치라니.
갤러리는 MMS 미술학원 같은 아틀리에가 아닐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윤민제의 아들 타이틀을 달고 있다고 해도 바로 붓을 쥐여주는 파격은 없으리라.
차를 타고 갤러리로 이동하던 중 아버지가 물었다.
“예준. 미술학원에서 유화 그렸다면서?”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예상해야 했다. 아버지는 원장과 가까운 사이였고, 센느 강변에서도 열정적으로 유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 냥 친구들 그리는 거 보고 언뜻 해봤더니 됐어요.”
“친구들이 유화를 그렸어?”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까?
철저하게 속일 생각이었다면 그림은 활발히 그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완벽하게 평소의 예준을 연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꿈을 최대한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빨리 거장이 되어야 했다.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부탁할까?
바보 같은 소리다. 믿어줄 리도 만무했고 이들 부부에게 큰 상처를 주는 꼴이었다.
이미 나는 예준의 몸을 차지했다. 벌써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다시 몸을 되돌려줄 방법이 없는 한 내게 의무처럼 주어진 윤예준 노릇을 불이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그뿐일까? 그게 내 책임이라서?
솔직히 말하면 몸을 돌려주기 위해 고민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다. 이미 신비로운 일은 벌어졌고 건강한 이 몸도 좋았으니까. 다시 꿈을 이룰 기회도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가난하지만 아들을 위해 이렇게나 힘쓰는 부모가 부러웠다.
그들이 계속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줬다.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차는 곧 아버지의 갤러리에 도착했다.
어딘가 짓다 만 듯한, 시멘트 외형의 건물이었다.
중앙의 큰 유리문 위에는 ‘갤러리 화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 건물 공사 중이에요?”
내 말에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지을 때 당시에 유행했던 건물 디자인이야. 요즘도 유행 중인데, 좀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
디자인과 유행이라는 말에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달리 보이는 부분은 없었다.
건축 디자인 조류의 연속성을 무시하고 바로 감상이 가능할 리 없었다. 모르는 것들로만 이루어낸 작품에서 무엇을 분석할 수 있겠는가. 단지 느낄 뿐.
마침내 아버지를 따라 갤러리에 들어갔다.
오르세 미술관과 달리 인상주의 그림 같은 건 없었다. 대부분 경매장에서 잠깐 보았던 아버지의 그림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그 순간의 인상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와. 이렇게 전부 다 동양화일 줄이야.’
침착했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새롭고 다양한 화풍들이라니.
이 느낌을 익혀 나의 그림에 도입할 수 있다면 작품은 얼마나 더 다채로워질 수 있겠는가.
나는 갤러리 깊은 곳으로 천천히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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