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7화 (7/241)

생명력

교실 앞엔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기본기라고 만만하게 보지 말고 최대한 왜곡없이 그려. 구도는 자유.”

정선생님은 짧게만 설명했지만 학생들은 익숙한 일인 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내게 정선생님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데에 필요한 도구나 재료들은 저기 교실 옆 선반에 다 있어. 원하는 도구로 시간 안에 그리기만 하면 돼.”

나는 교실 앞에 놓인 화분을 자세히 보았다.

모란 꽃이었다.

반가웠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으니까.

파리 외곽에서 살던 시절, 나는 정원에 모란을 심고 정성껏 길렀다.

그리기에 모란만큼 완벽한 꽃도 없었다. 꽃잎과 잎사귀가 시원시원하게 컸고 색도 다양했다.

아마 정물로 그리기 좋은 꽃이기에 제시한 거겠지.

하지만 쉽게 그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꽃은 없었다. 차분히 관찰하고 음미하는 일은 생략해선 안 됐다.

모란을 나만큼 자세히 봤던 사람은 아마 이 중에 없을 것이다.

붓도 웬만하면 종류별로 있었다. 관리 상태는 영 별로였지만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붓이 아니라 물감이었다. 연필이나 파스텔 같은 건 대충 알 만했지만 수채화, 포스터 물감 같은 것들은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시점에 새로 생긴 물감들인가?’

아이들의 그림을 둘러보았다.

왜곡 없이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 때문인지 모두 어중간한 구도로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불편함을 가해서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키는 훈련법인 모양이었다.

스케치가 빠른 학생들은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멀리서 언뜻만 봐서는 그 물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물에 풀어 사용하고 있었다.

‘뭐지? 수채화(Aquarelle)?’

나도 한 번 해본 적 있었다.

수용성 물감을 물에 풀어 그리면 특유의 깔끔하고 투명한 인상을 줄 수 있었지만 얼마 가지는 못했다.

물에 섞이는 만큼 변색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곧 사라질 그림에 혼신을 쏟기에 전생의 나는 체력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 모두가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내가 아는 그 수채화의 색감과 정확히 일치했다.

13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수채화의 색감이 같은 것은, 진짜 같은 것일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군. 종류가 많다.’

그 중 속도가 가장 빠른 한 아이는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조건대로 왜곡은 없었다.

아이의 시각에서 볼 수 없는 각도를 상상해 그리는 것이었다.

단순히 구도만 무너졌을 뿐이라면 아이의 실력을 의심하고 신경을 껐을 것이었다.

하지만 몇 번 붓질하는 것만 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티가 났다.

애초에 다른 각도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해 그릴 수 있으려면 실력이 어지간해서는 안 됐다.

정선생님도 아이의 그림이 신경이 쓰이는지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네. 틀리지 않게 그릴 수 있겠어?”

“네. 화분 크기가 애매해서 가능한 구도는 이것밖에 없어요.”

저게 구도라고?

아이의 그림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꽃은 유별나게 작고 초라해졌다.

구도랄 것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나 실력이 있는 아이가 ‘가능한 구도’라고 했다.

‘사고를 확장 할 수 있는 것들이 산더미겠어.’

무리해서라도 학원에 등록하길 잘한 것 같았다.

결심했다.

내가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자 정선생님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모르는 거 있어?”

“네, 그······ 이게 다 뭔지 잘 모르겠는데, 이중에 기름으로 녹여 쓰는 물감이 뭐예요?”

환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기름에 물감을 풀어 사용했다. 다른 재료들도 있었지만 유화(peinture à l'huile)가 가지는 장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유화 물감 말하는 거야?”

“아, 네 맞는 것 같아요. 유화.”

그러자 정선생님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곤 교실을 나갔다.

처음 보는 재료와 구도를 배워서 그려볼 생각이었지만, 당장 시도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한 피드백이 우선인 듯했다.

앞으로 나의 실력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 과거의 내 실력이 현재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먼저 점검해보자.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니 정선생님이 수레(카트)를 끌고 교실로 들어왔다. 아마 유화 도구들을 가져온 것일 터였다.

조금 미묘한 표정의 원장도 정선생님을 따라 들어왔다.

나의 한 마디 요구로 이렇게나 준비가 번잡하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선반 어딘가에 유화 물감이 현대적 형태로 숨어 있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예준학생. 유화로 그리게요?”

원장이 큰소리로 묻자 조금 술렁였던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감을 쓸 줄 잘 몰라서요.”

모르긴 몰라도, 반응들을 보면 유화가 현대에 이르러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되었다는 건 확실해보였다.

수레에서 팔레트와 유화용 종이를 꺼내 이젤에 눕혔다. 색을 하나씩 짜서 조금씩 종이에 발라보았다. 무언가 심심하면서도 깔끔한 색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사용할 만한 색들을 우선 짜둔 뒤 모란을 보았다.

다양한 색깔의 모란꽃이 하나의 화분에 꽂혀 있었다.

모란 색이 예쁘고 다양하게 핀다고는 하나, 저렇게 색깔별로 꽂아두는 건 옳은 배치가 아니었다.

모란의 아름다움은 화사함이 아니라 단정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꽃잎과 이파리의 생김만 완전히 차용하겠다.

“원장님, 계속 계시게요?”

멍하니 나의 준비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던 원장에게 정선생님이 물었다.

“아, 이런. 미안해요. 내가 방해를 했네.”

원장은 조금 우왕좌왕하다가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업을 시작했다.

‘저 꽃이 어떤 구도상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 최대 역량을 쏟아내야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30년 전의 나의 사조를 깨고 새로운 것을 얻는 건 그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바탕색을 칠한 뒤 빠르게 꽃잎부터 그렸다.

기본이 되는 색으로 먼저 작업한 뒤 회색을 섞어 명암을 표현했다.

교실의 조명이 많아 실제로는 명암이 깊게 드리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는 정원에서 다양한 강도의 햇빛에 따른 인상 차이를 분명히 알았다. 회색을 섞은 모란의 그늘은 한층 더 깊은 아름다움을 비춰 낼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연설가가 아니라 도둑이다.

따라서 나의 모란은 아름다움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훔쳐다 그리는 것이다.

모란의 인상을 기반으로 감춰진 구도를 찾아내 화폭에 담는다. 내가 발견할 구도는 역삼각이었다.

모란의 줄기와 이파리는 단지 꽃을 있게 하는 수단일 뿐만이 아니다.

그 색채만으로도 모란의 아름다움에 기여할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모란의 구도를 잡아주는 건 화분이다.

구도만 잡아줄 뿐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

꽃잎이 화분에 가득해 넘쳐흐르는 인상을 잡아냈다.

화분 모양만 같다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게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손을 들자 정선생님이 물었다.

“또 필요한 거 있어?”

“아니요. 다 그려서요.”

정선생님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유화인데 벌써 다 그렸다고?”

“오래 걸릴까봐 덧칠 최소화해서 그렸어요.”

정선생님은 놀라서 나의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오래 말을 하지 않았다.

뭐든 그릴 땐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렸다.

학생들이 모여들어 내 그림을 관찰했다.

“와······ 뭐야.”

학생들은 마치 그림이라는 걸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학을 떼었다.

“다들 안 그리고 뭐해? 시간 안에 다 그릴 수 있겠어?”

정선생님은 학생들은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내 그림을 ‘건조장’에 옮겨놓겠다며 캔버스 채 들어 교실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정선생님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할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유화 도구가 담긴 수레를 보았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도구들이 부족함 없이 담겨 있었다.

‘하나쯤 더 그려볼까?’

그러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종이 한 장과 그에 대한 물감이었다.

혼자 특혜를 보겠다고 허락도 없이 도구를 사용할 순 없었다.

대신 학생들의 그림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들의 그림을 보던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앞서 내려다보는 구도를 시도했던 아이였다.

그림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였다.

모란 꽃만의 느낌을 살리지는 않았지만 보기엔 제법 탁월했다.

모란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타인들에게 나의 의견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그림은 모란이 아니라 ‘꽃’을 그려놓은 인상이었다.

뻔하게 잘 그렸다.

나는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학생 뒤로 다가가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수채화 특유의 빛 표현이 잘 활용되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꽃처럼, 모란은 가려진 부분에서도 눈부신 빛을 냈다.

화분을 완전히 가리고 과감하게 꽃잎만 표현할 만했다.

“뭐야? 무슨 용건 있어?”

“아,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목소리에 적의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민망한 한편으로 설레는 마음이 컸다.

수채화도 수채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현대에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 외에는 또 어떤 재료들이 있는지 지금부터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많은 아이들이 가져다 쓰고도 여전히 많은 물감들이 남아 있었다.

정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무시로 이것저것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

도연은 초등학생 대하는 데에 능숙했다.

물론 초등학생을 화나게 할 줄도 알았고, 결국 눈물을 흘리게 할 줄도.

그들은 확 놀래키며 짜증을 내면 맞서서 말대꾸를 했다.

그럼 조목조목 반박하며 놀리듯 비꼬면 길길이 날뛰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리면 어릴수록 말이다.

하지만 이 윤예준이라는 꼬마는 조금 당황할 뿐 맞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럼 나만 성질 낸 꼴이잖아······!’

도연은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MMS 미술학원에서도 특별반, 또 그 중에서도 엘리트에 속했다.

매 실습 때마다 반 친구들 중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다. 실제로도 잘 그렸고.

그들은 모두 명문 예고 미술반으로 입학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중등부특별반에 초등학교 2학년짜리 꼬마가 웬말이냐는 것이었다.

‘짜증나!’

처음 오자마자 유화를 그리겠다니. 자기가 무슨 한국의 피카소라도 되는 줄 아는지.

덕분에 선생님이랑 원장님이 유화 도구 챙겨주느라 한바탕 고생하지 않았던가.

‘반칙을 쓴 거야······’

심지어 모란 색도 틀리고 크기도 틀렸다.

분명 선생님은 변형을 하지 말라고 했다. 주어진 조건은 지켜야 했다.

뭐든 시도하려면 조건 내에서 하는 게 실력이지, 입맛대로 마구 조건을 생략하는 건 옳지 못했다.

도연도 가장 자신 있는 색, 구도로 표현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도연은 불안했다.

여태까지는 도연이 MMS 중등부 중 1등이었다.

그냥 1등도 아니고 최연소 1등이었다.

그말인즉슨, 전국의 중학생들 중 도연만큼 잘 그리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도연은 아까 학생들의 표정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렇게 잘 그리는 사람은 살면서 본 적이 없다는 표정들이었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감히 한참 어린 초등학생이. 누군 자랑할 줄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그래. 그건 다 그 꼬맹이가 유화를 그렸기 때문이었다.

‘유화면 그, 갈키드 좀 섞어서 기름만 빼주면 아무렇게나 덧칠해도 되는 거잖아.’

도연은 실수하면 다시 그림을 갈아 엎어야 했다.

하지만 예준은 마구 그려서 비뚤어진 부분은 다른 색으로 덮어버리면 되었을 터였다.

그런 핸디캡이 없다면 절대 그렇게 못 그렸을 것이었다.

‘두고봐. 어디 같은 조건에서도 똑같이 잘 그릴 수 있는지.’

도연은 신경질적으로 붓을 헹구며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예준의 <모란>을 머릿속에 계속 그려보면서.

‘그래도 엄청 잘 그렸어······’

*<에두아르 마네 - 작은 받침대 위에 놓인 모란 꽃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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