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이 제일 쉬움-2화 (2/241)

기적의 붓(2)

혼란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대충 상황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얼떨떨한 것은 여전했지만.

나는 죽은 뒤 윤예준이라는 한국인 아이로 환생했다.

언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신학이 발달하지 않은 동양엔 영원히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라는 신비로운 신념이 있다고.

이 모든 게 하나님께서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 윤회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왜 1살도 아닌 10살이 되어서야 과거의 기억을 얻게 되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왜’ 기억을 얻게 되었는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나라는 기억이 침입해오는 바람에 애꿎은 예준의 정신이 허공을 떠돌게 된 것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거 참······ 경매장 가드들 살벌하더군.”

거실 바깥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자신의 친구 피에르 덕분에 프랑스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좋은 그림도 보고. 그 이상의 설명은 앞서 없었지만, 짐작하기로 미술작품 경매장에 용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간 이곳에서 머문다고 했다. 피에르가 자신의 방을 내주었다. 오늘 들렀던 경매장에서 차로 두 시간은 떨어진 곳이었다.

“뭐, 이번에 유명한 골동품이 있다고들 난리였으니까. 그래도 자네한테는 친절했을 텐데. 패를 들고 있는 고객이잖아.”

“그 친절이야말로 주먹보다 무서운 법이라고. 나따위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대접하는지, 싶다니까.”

아버지가 검소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구분할 줄 알았다.

원래 귀족들과 어울려 예술을 한다는 이들은 본인이 직접 귀족이라도 된 양 고상을 떨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많이 봐왔다. 또 필요할 땐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런 걸 사교라고 불렀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이 경매장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미술에 발을 담갔을 뿐 반열에 들지 못한 무명 예술가였다.

아마 많은 혹평 속에서 유찰되는 굴욕을 맛보게 될까봐 무섭겠지.

화가에게 혹평만큼 무서운 매질은 어디에도 없었다.

찬사는 아무리 박수를 오래 쳐줘도 뻔했다. 순간의 감정을 잘 담아냈다, 감정과 표현의 균형이 적절했다, 무슨 색과 무슨 색의 배치가 어떠어떠하여 절묘했다는 식.

하지만 혹평은 기상천외한 인신공격까지도 이어지는 법이었다. 살롱전에서 가장 많은 조롱을 받아왔던 나로서도 끝까지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혹평이었으니까.

뛰어난 감각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유망 신인도 전통주의자들의 무책임한 입놀림에 오랫동안 붓을 들지 못하곤 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 화가의 실력이 따라준다는 조건 하에 말이다.

“그래서, 아까는 무슨 일이었는데?”

“아아, 뭐 별 거 아니었어. 예준이가 호기심에 창고엘 들어갔다가 걸렸나봐.”

피에르가 놀랐다.

“이야, 거길 어떻게 들어갔지? 오늘 경비가 만만찮았을 텐데.”

“경비야 항상 만만찮겠지. 수십억 하는 작품들 보관하는 창고잖아.”

“이봐. 이번에 귀한 골동품이 입고됐다니까? 내가 자네한테 말 안 했던가? 그것 때문에 유럽의 수집광들 죄다 내일 몰려들 거라고.”

골동품이 귀하다니. 어디 성경 초판이라도 되는가?

소파에 앉아 할 일도, 더 이상 고민할 결정도 없어 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내일 입찰자가 많을 거라고는 했지. 자네가 잘 알아서 해주겠지만······ 그게 나한테 그렇게 의미가 큰가?

“당연하지! 다들 지갑 채워서 경매장을 꽉 채워 앉겠지? 하지만 골동품은 하나야. 그 많은 부자들이 골동품 마헬(marelle)이라도 하듯 나눠 가질 게 아니라면 아쉬운 마음에 다른 상품들도 거들떠보게 되어 있다, 이말씀이야.”

“참나 원. 뭐 그리 얼마나 대단하시다고.”

아버지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피에르가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이 친구 보게? 그 위대한 에두아르 마네의 붓이야. 추정가만 1,300만 유로라고.”

“뭐, 천삼백 만? 유, 유로가 천만 단위로 오르기도 하는 단위였던가······?”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에두아르 마네. 말년에는 자주 들어본 수식어였다.

어쨌든 위대한 건 차치하고, 그러니까 결국 내 붓이 맞다는 소리였다.

*

오직 경매를 위한 프랑스 방문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익일 경매 시간이 부리나케 다가들었다.

확실히 어제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매장을 채웠다. 자리가 없어 장 외에까지 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아버지와 나, 피에르는 선채로 경매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이 어린 몸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다리는 둘 달려 있었다. 오래 서 있는다는 건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괜히 왼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건강한 신체를 만끽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2021년 9월 26일자 거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객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너스레를 떨던 경매사가 슬슬 목에 힘을 주었다.

“첫 상품 입장합니다.”

어제 본 적 있는 가드들이 부드러운 카펫 위로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천 같은 걸로 덮지도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게 그 에두아르 마네의 붓이야? 저게 오늘 주인공인데 처음에 나와버리면 다들 귀가할 거 아닌가.”

아버지가 말하자 피에르가 웃었다.

“자네 큐레이터 맞나? 가수 콘서트도 아니고, 마네의 붓이 마지막에 배치돼 있으면 다들 지갑 꼭꼭 닫고 있느라 줄줄이 유찰일 걸?”

그렇긴 했다. 피에르가 넌지시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어차피 낙찰될 일은 없지만.”

“왜?”

“보면 알 걸세. 자자. 우린 딴 소리 할 시간에 간절히 기도나 하자고. 자네 작품이 부자들 돈싸움 전선이 되도록 말이야.”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거구의 성인들 틈으로 힐끔힐끔 움직였다. 내가 쓴 붓은 한두 자루가 아니었다. 그 중 도대체 무엇일까? 당연히 창고에서 봤던 바로 그놈이겠지?

골동품이 경매사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 붓이 맞았다. 어젠 어두워서 잘 확인하지 못했지만 조금 낡아 있는 내 붓.

“지금부터 50만유로 일괄입니다. 850만, 900만······”

사람들이 빠르게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1700만. 더 이상 없으십니까? 세 번 호가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가격이 정해진 듯했다. 마침내 경매사가 경매봉으로 단상을 내려쳤다.

“1700만?! 아까 추정가가 얼마랬지?”

아버지가 놀라서 묻자 피에르는 조금 상황을 정리해보다 뒤늦게 대답했다.

“1300만이었지······ 아마 추정가를 넘겨도 유찰되었을 텐데.”

“왜?”

“경매장 입장에서는 낙찰되면 안 되는 물건이라, 추정가보다 높은 가격을 미리 내정해놓거든.”

“일부러 안 팔리게 한다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보관 부담이 상당할 것 같은데······”

“저 물건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물건들에 대한 기대를 모을 수 있으니까. 저게 없었다면 이만한 사람들이 모였겠나?”

비싼 내정가를 설정한 다음 구매 경쟁이 더 격화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것이었다.

“그럼 경매사가 과소평가한 거네?”

“뭐, 경매사 잘못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지.”

하지만 나의 붓은 낙찰되었다.

미술품 애호가들의 수집 욕구가 추정가를 훨씬 웃돌았기 때문이었다.

*

경매는 재개되었다.

여러 미술품들이 소개되었지만 수준은 죄다 형편없었다.

붓의 물리적 사실성이 캔버스에 미치는 영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색만 채워넣은 그림들뿐이었다.

종종 내 눈에도 익숙한 화풍의 그림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리 빈도가 높진 않았다.

그마저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가되는 금액이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음 작품 입장합니다. 추정가 3만 유로.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터무니 없는 작품이 나올 때를 제외하면 그림들의 가격을 어림하며 환생에 대한 혼란을 다스렸다.

평생 인정받을 방법만 물색하며 살아온 나였다. 익숙한 화풍이라면 이곳에서도 대중적 가치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앞선 작품이 2만 유로를 겨우 넘겼는데 저게 추정가가 3만이라고?’

유화로 빛을 담아내는 기술은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를 시작부터 미리 어림해보아야 했다. 머릿속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형상을 그려낼 수 있느냐가 작품의 완성도에 가장 영향이 큰 역량이었다.

하지만 저 그림은 국소적인 빛 표현에만 골몰한 티가 많이 났다. 실력이 형편 없는 화가의 작품임이 분명했다.

“3만은커녕, 2만도 못 넘겠군.”

“응, 뭐라고?”

아차, 너무 집중한 나머지 혼잣말을 해버렸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눈을 빛내며 내게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1만 7천, 1만 7천, 1만 7천. 낙찰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시대가 지나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예술품이 그랬다. 못난 예술품은 그저 못난 예술품일 뿐이었다.

유행과 사조의 흐름은 당연히 고려할 수밖에 없지만 저렇게 화풍이 뻔한 것들이 바로 그랬다.

낙찰가를 확인한 아버지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경매에 집중했다.

한국에서 보통 교육만 받아온 아이가 프랑스어를 할 리가 없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겠지.

이번엔 다행히 그냥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연달아 낯선 화풍의 작품들만 경매되었다.

이전까지의 그림들은 흠이라도 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작품 속 소재들은 뜬금없이 등장하거나 불가능한 배치 속에 있었다.

단순히 원근법 무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공간에 대한 포착으로서 순간의 인상을 담아낸다는 기본적인 모티프부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내 붓을 기준으로 삼기도 뭐하지만, 그것의 200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리는 그림들도 많았다.

아마도 살롱전의 수준이 월등하기 때문으로 생각되기는 했다.

이곳은 뭐든 파는 경매장이었으니까. 그림을 전문으로 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좋은 작품은 보기 드물 것이리라.

“다음 작품은 윤민제 화백의 <이상향을 찾아서>입니다. 작품 들어오겠습니다.”

윤민제의 이름이 불리자 피에르는 환히 웃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사색이 되어 파랗게 질렸다.

“예, 예준아. 우리 잠깐 나가 있을까?”

피에르가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내가 자네를 위해 얼마나 멋진 판을 깔아놨는지 감상하지 않고?”

피에르의 만류에 도망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렇다고 진열대를 넘겨다 쳐다보지도 못했다.

*

정신없는 하루였다.

어제는 환생 사실에 대해서만 골머리를 쌓으면 됐다. 언어가 조금 이질적으로나마 통하는 걸 보면 이곳은 프랑스였다. 유로라는 화폐 단위는 처음 들어보았지만 말이다.

오늘은 골동품이 되어버린 나의 붓과 괴상한 작품들 때문에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렬했던 건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그런 건 본 적도 없었다.

다른 낯선 작품들과 같은 의미에서. 그러나 인상은 달랐다.

그 작품엔 카펫을 따라 처음 등장했던 순간부터 눈을 확 잡아채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로 사용된 붉은 원색은 그 강렬함에 비해 쓸쓸한 소회를 오래 남겼다.

강렬한 발색은 언뜻 일본화풍을 연상시켰지만 느낌이 판이했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여백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보아왔던 중국의 그림만큼 박력있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붓의 흔적이 생동감있고 호전적이었다.

인상에 반전을 주는 도구로 빛을 활용하는 방식엔 뻔한 패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림에서는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패기는 어떤 사조에 의한 것인가?

“그나저나 예준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해? 어제 그 아저씨한테 혼난 거 때문에 그래?”

아버지 말대로였다. 한 번도 말을 해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프랑스어를 내뱉긴 했지만 한국어는 더더욱. 말할 수 있는데 말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입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요······”

스스로 놀랄 만큼 대단한 발음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한국어는 나, 윤예준의 모국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고생 많았어 예준아. 아빠도 완전히 기진맥진하다, 정말로.”

아버지는 소파에 몸을 눕히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조금은 싱숭생숭한 듯 미소를 띤 상태였다.

싱숭생숭하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두 나의 붓을 사려고 안달인 걸까?

“아빠. 그······ 1700만 유로라고 하면 얼마나 비싼 거예요?”

“왜? 그 붓 갖고 싶어?”

갖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어야 했다.

그토록 바랐던 건강한 몸을 덜컥 얻었다. 이 몸으로 마저 성공해도 되지 않을까?

그럼 이미 이뤄낸 것이 있으니 지금까지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런 과거의 유물 같은 건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어야 했다.

“아뇨, 그냥······”

“이거 큰 일이네. 어쩌지? 아빠는 죽어도 사줄 능력이 안 되는데······ 언제 매물로 나올지 모르겠고.”

아버지가 곤란한 척했다.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내 능력으로 사지 못한다면 무용한 일이었으니까.

“대신 마네 그림 좀 구경시켜줄게. 내일 오르세 박물관에 같이 갈까? 여행 온다고 해놓고 별로 돌아다니지도 못했잖아.”

“마네전이라뇨?”

“에두아르 마네 그림 모아놓은 박물관 같은 곳이야. 설마 그 사람 붓은 가지고 싶고 그림은 보기 싫은 건 아니겠지?”

그림이야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마네전이라니. 나는 그런 전시회를 기획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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