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43화
109. 파업(1)
음의 신전은 바깥에서 봐도 상당한 규모를 갖고 있었지만, 내부의 넓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미궁을 옮겨 놓은 듯했는데, 그냥 거대한 던전이었다.
[혼돈]
[도올]
[도철]
문제는 간간이 나오는 중간 보스의 수준이 모두 드래곤급이라는 것이다.
물론 드래곤도 등급이 있다.
용언을 사용하는 고룡이면 지금 우리의 수준으로 무사히 이겨내기란 쉽지 않겠지만, 다행히 중간 보스들은 성룡급으로 지금의 우리가 무리를 하면 충분히 상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건, 너무 힘든데요.”
아마 녀석들이 둘 이상 짝지어 나왔으면 더욱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 마리씩 나와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낄 지경이다.
나는 엘릭서를 피로 회복제로 마시는 이브릴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공간을 살폈다.
[흑기린의 심장]
[도올의 심장]
[도철의 심장]
[혼돈의 심장]
벌써 성룡급의 심장만 4개가 모였다.
“흑기린 다음은 사흉수인가.”
그럼 다음엔 궁기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보통 사흉수(혼돈, 도올, 도철, 궁기)는 사신수(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비교가 많이 되는 괴물들인데, 오랜 역사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사신수에 비해 그다지 알려져 있진 않다.
사실 사흉수는 대결 구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사신수 보고 끼어 맞추기 식으로 만든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굳이 가이아가 이런 배치를 선택한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리도 강대한 힘을 부여한 것을 보면 역시 이곳엔 중대한 무언가가 숨겨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시엘라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흑기린과 사흉수는 내게 죽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음의 기운을 가진 이 녀석들에 반대되는 녀석들도 다른 곳에 준비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언제 끝나는 걸까요?”
이브릴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잘하면 다음에 끝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확실치 않다.
사흉수만 나왔다면 모를까, 흑기린 같은 녀석도 나왔으니.
그리고 추측대로 다음엔 사흉수의 라스트 보스인 궁기가 등장했다.
-크아아아!
날개 달린 검붉은 호랑이.
이빨은 송곳처럼 촘촘히 박혀 있으며, 손톱은 검을 박아 넣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녹색의 연기와 아지랑이 피듯 흐릿한 형체의 가죽은 상당한 포스를 내뿜었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녀석들도 무시무시했지만, 궁기가 가장 요란한 비주얼을 지니고 있었다.
“왠지 라스트 보스 느낌인데요?”
이브릴의 말에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전투 준비를 했다.
녀석이 라스트 보스건 중간 보스건,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에 이기로 살아남는 일이었다.
* * *
[음신전의 수호자를 모두 쓰러뜨렸습니다.]
궁기까지 쓰러뜨리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지나와 도달했던 방이 우리가 처음 음신전에 들어섰던 입구로 바뀐 것이다.
“설마, 이걸로 끝이라고?”
무려 드래곤 급의 마수 다섯 마리를 처치했다.
체감상 열댓 시간을 헤맨 듯한데, 고생한 것에 비해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이 황당했다.
더불어 이스터 에그와 관련된 무언가가 등장할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사냥만 하다 끝나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였다.
내 불만을 들은 걸까?
[음신전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음신전의 관리자 콘솔을 획득했습니다.]
해당 메시지와 함께 손등이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무리 통증에 강한 나라고 해도 인상이 찡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손등에 검은색의 반쪽짜리 태극문양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그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타겟은 나라고 알려 주는 것 같은 상황.
“가이아도 많이 야박해졌군요.”
난이도로 치면 마왕을 처치한 것에 준하는 수준이 아닐까?
사체 빼고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만큼 음신전의 값어치가 대단한 것 아닐까요?”
나는 뺨을 긁적이며 손등을 바라보았다.
검은 색 문양을 손으로 긁어보고 톡톡 건드려 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음신전.’
‘음신전 관리자 콘솔 실행.’
이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
사용에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손등에 새겨진 문양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야 하는 건진 몰라도 지금 상태에선 사용이 불가능해 보였다.
“응?”
“왜 그래요?”
그렇게 음의 신전을 나서자 희뿌연 강물이 다시 우릴 반겨주었고, 지상으로 올라오고 나서 스마트폰을 꺼내든 구미호가 미간을 좁혔다.
“음신전에 입장하고 고작 30분밖에 안 지났어요.”
나와 구미호를 제외하곤 전자제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두의 팔엔 거의 필수라 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손목 시계가 채워져 있어서 시간을 살피는덴 무리가 없었다.
“정말이네.”
모두가 구미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와서 시간의 흐름이 다른 공간이 등장한다고 신기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다들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갈 뿐이다.
‘이 정도로 공을 들였다면 이스터 에그와 관련이 있는 건 분명 한 것 같은데.’
시엘라와 가이아의 뜻대로 움직였으나, 여전히 내 입장에선 영문 모를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 이런 식이란 말이지.’
자기들이 인간의 위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아주 거만하지 않은가.
나를 이용하고 싶으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지, 이건 바보 취급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중요하다면 앞으로 그만한 노력을 해줘야 할 것이다.
이제 끌려만 다닐 생각은 없었다.
‘파업이다.’
* * *
로아이스 연방 제국에 소속된 베르트 제국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보내며 빠른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도시 어디를 가나 개발 붐에 따른 일자리가 넘쳐났으며, 평민들 사이에도 돈이 돌고 돌아 재산이 형성되었다.
예전에 세금을 내고 남은 한 줌의 돈으로 식량을 사고 월동 대비를 하는 것이 끝이었으나, 이젠 먹고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성 소비도 가능해졌다.
물론, 사치라고 해봐야 귀족들에 비할 수준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좋은 재질의 옷을 사 입고, 놀이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평민 사치였다.
그런데 이 소소한 소비의 행복은 계급 사회에서 노예나 다름없던 평민들에겐 상당한 충격이었고, 평민계층의 소비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평민과 귀족의 소비 규모가 1:9였다면 지금은 오히려 쪽수를 앞세운 평민들의 소비규모가 귀족을 추월해, 약 7:3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귀족들의 소비 규모에 비해 평민들의 소비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서, 나라의 경제 지도가 귀족 중심에서 평민 중심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 평민들 사이에 큰 부자들이 탄생했으며, 귀족 외에 두터워진 상인 계층이 하나의 새로운 계급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지금도 평민 출신의 부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귀족 중엔 위기감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평민들로 인해 커진 경제 규모는 영주들의 지갑을 더욱 두둑하게 만들어줬으며, 평민들이 부자가 된다고 해봐야 그들의 거래는 결국 귀족들의 상회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현 상황에 불만을 표하는 귀족들은 우민 정책을 지지하는 시대착오적 귀족들뿐이었다.
당연히 그런 귀족들은 내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고 출세 코스에서 멀어졌다.
베르트 제국의 귀족 중 절반은 수행자였기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평민들의 경제 참여를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로이아스 연방 제국은 베르트 제국뿐만 아니라 케일론 제국, 칼바도스 제국에도 많은 수의 수행자들이 귀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변화는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 볼 수 있었다.
“베르트 황제 폐하 만세!”
“베르트 제국 만세!”
더 이상 퀘스트 수행을 위해 뛰어다닐 필요가 없어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황성에서 수행하거나,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데 썼다.
돈이 썩을 정도로 넘쳐 나다 보니, 나는 사치를 즐겼는데 부자가 이렇게 해서라도 돈을 풀지 않으면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대표 사치품 중 하나인 공중정원.
천공의 성을 본뜬 정말 공중에 떠 있는 정원에서 가족, 지인들과 식사를 즐겼다.
그러나 지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간을 좁혀야 했는데,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황성 입구에 모여 만세를 불러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사하단 뜻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저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되는 장면이란 점이다.
“좋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오글거려서.”
뮤대륙의 황제이자 지구의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의 의장임에도 내 말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제 생후 2년 3개월(한국 3~4살)이 되면서 부쩍 커진 로아가 팬케익을 맛있게 먹고 있는 소녀를 빤히 올려보았고, 그런 로아를 뚱하게 바라보던 소녀가 말했다.
“황성에 라그나베일이 있다고 해봐 그럼 무서워서 바라보지도 못할 테니까.”
소녀의 정체는 바로 이블랜드의 패자인 라그나베일.
아예 우리 집에 눌러앉은 식객이었다.
“그랬다가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요.”
“쓸어버리면 되지. 걱정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라그나베일을 귀찮게 하는 로아를 안아 들었다.
“계속 그런 식이면 전 폐허의 황제가 되겠네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맛있는 음식을 구하기 힘들어질 텐데요?”
“……그건 곤란하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위엄이 많이 사라진 라그나베일이었다.
그는 내 눈치를 힐끔 살피고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 후로 별다른 반응은 없어?”
주어가 빠졌지만, 그가 무엇을 묻는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네, 하지만 급한 건 제가 아니죠. 어떤 반응이 나타날 거라 생각합니다.”
내 대답에 라그나베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악마로 보이지 않는 그는 마속성의 모든 힘을 무력에만 때려 박은 듯 성격은 모나지 않고 말도 잘 통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지인에게만 그렇게 행동하지,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는 습성을 갖고 있었다.
이건 내가 그에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볼 수 있을 것이다.
“흑마력은?”
이어서 라그나베일의 시선에 내 손등으로 향했다.
“변화 없어요.”
음의 신전이 깃든 문양 역시 그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볼수록 신기하군. 신성력에 흑마력, 자연마력에 오러까지 품고 있다니.”
나머지 세 개를 제외한 흑마력은 내 통제에 따르지 않으니, 온전한 내 것이라 보긴 힘들었다.
라그나베일은 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세상이 멸망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식이다.
다만 내가 지원을 요청하면 그땐 힘을 보태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는 그의 목숨을 구원해준 대가라 했다.
내가 보기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줄 부하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얘 이것도 먹어보렴.”
어머니는 상대가 마왕이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그나베일을 애처럼 대했다.
“이게 뭐지?”
반말로 반응을 해도 어머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시멜로라는 건데, 식감이 특이해.”
“호오!”
하지만 그런 어머니와 어울리는 라그나베일을 보면 꽤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행차하신 건가?”
라그나베일이 눈동자가 파충류처럼 가늘어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반겼다.
“음.”
그런데 거대한 마력파동을 뿌리며 등장한 존재는 기다리고 있던 시엘라가 아닌,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사냥의 신이군.”
상대의 정체는 라그나베일이 알려주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디아나 님. 조지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냥의 여신 디아나는 악수를 건네온 내 손을 거칠게 쳐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미쳤나,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