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37화
106. 이스터 에그(2)
대체 왜 이런 모습으로 우릴 찾은 걸까?
이 모든 것이 가이아의 계략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답은 눈앞에 있는 시엘라가 알려주겠지만, 솔직히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시엘라 님께서 바라던 대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죠.”
진실 여부를 떠나 일단 이야기를 듣는 것이 먼저다.
시엘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께선 수행자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수행자란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
그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며 가이아를 의심하겠지만 말이다.
“형식적인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실 텐데. 우리에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정보가 주어졌던가요?”
가시 돋친 내 대답에 그녀는 무안한 듯 뺨을 긁적였다.
“실례했습니다.”
굳이 빙 돌려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아닌 그녀 쪽이었다.
시엘라는 나를 비롯해 수행자들을 스윽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실 수행자란 존재는 청소부입니다.”
“청소부?”
“네, 가이아를 대신해 세상을 정리하는 청소부인 거죠.”
아무래도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녀는 이전처럼 귀찮은 수수께끼를 내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것엔 수명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건 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죠. 현재 가이아의 수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런 가이아의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수행자 여러분인 겁니다.”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중간에 섞여 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떴고,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급히 물었다.
“수명이 끝나간다니, 가이아가 죽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내 물음에 그녀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당장 세상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서히 붕괴하겠죠. 적어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식이 살아가고 있는 동안 세상이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다행인 듯하면서도 결코 안도할 수 없는 대답.
이 세상도 가이아와 함께 시한부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닌가.
단순히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넘기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이었다.
“시엘라 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수행자들이 청소부라 불리건 말건, 충실히 가이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하듯 간단히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세상의 종말을 부추기는 짓이라고 해도요?”
“…….”
그게 무슨?
-팟!
시엘라는 앞으로 손을 뻗으며 흑마력으로 모래시계 형상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운의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모래시계 안의 알맹이처럼 말이죠. 생명이 수명을 다한다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이 품고 있던 기운은 세상이란 틀 안에서 돌고 돌아 다른 형태로 재구성이 되죠.”
그리고 그녀는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말했다.
“가이아는 이 모래시계를 관리하는 관리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신이 품은 모래를 아래로 흘려보내며 생명을 만들고 세상에 힘을 부여하죠. 그리고 죽음이란 ‘회수 시스템’으로 모래를 도로 거둬들여 다시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어렵지 않은 설명.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 시스템은 아니다.
그러나 시엘라가 모래시계 밑 부분을 퉁 치며 구멍을 내자, 내용물이 서서히 비워지기 시작했다.
모래 형태를 한 회색 알갱이는 바닥에 쏟아지자 먹물처럼 검게 물들었다.
“지금은 이 상태입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에 큰 문제가 생긴 거죠.”
“그 문제가 수명이 다한 가이아 본인이고요?”
내 물음에 시엘라는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모습에선 위기감이 결여돼 있다.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 가정한다면 오히려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
“그런데 가이아는 이 오류가 수정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적절치 못한 선택을 했습니다.”
당연히 그 선택에 우리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맞습니다.”
계속 웃는 낯이던 시엘라가 처음으로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가이아는 세상을 구성하는 기운을 마구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유한 모래의 양을 늘려 조금이라도 수명을 길게 가져가려는 계획인 거죠.”
창조주가 세계보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뜻인가?
대충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파악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시엘라가 여기까지 설명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멍청이는 일행 중에 없었다.
그때 김선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구에 몬스터가 등장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도 그것의 일환인 겁니까?”
“가이아는 자신이 만든 자식을 직접 제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상황을 바라는 대로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죠.”
지구에 대량의 몬스터를 풀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더욱 기습적으로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러네. 우리에게 대격변을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준 건 왜지?”
하지만 그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죽음을 더욱 크게 부추길 수 있는데 왜 굳이 여지를 줬냐는 것이다.
“세상은 두 개의 기운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플러스 기운을 얻으면 마이너스의 기운도 같이 얻어야 하죠. 바로 여러분이 가운데서 균형을 맞추는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동양의 사상가도 아니고 그놈의 음양 조화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번에 이블랜드의 마왕 둘이 당하고도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건 해당 기운이 가이아에게 흡수되었기 때문이겠네요?”
라그나베일의 충고와 달리 두 마왕이 죽고도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마왕의 힘을 가이아가 거둬들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어떻게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가지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선 상응하는 다른 기운도 흡수해야 하는 거잖아요. 마왕 정도면 엄청난 양의 기운을 지녔을 텐데, 따로 세계에 변화는 없었는데요?”
나름 맹점을 찾으려고 찔러본 질문인데도 시엘라는 일말의 동요 없이 쉽게 답을 했다.
“반대의 기운도 적지 않게 흡수했습니다. 그라디스는 아틀란티스B의 용인족으로, 브람기슈는 에이션트드래곤 타우러스로 말이죠.”
그런가?
하지만 이블랜드 악마왕들에 비하면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
특히 용인족은 그라디스와 비밀 정도는 아닌 듯한데.
“그리고 마저 흡수하지 못한 기운은 대천사 하나가 타천하는 것으로 상쇄했죠.”
“그게 시엘라 님이 검은 날개를 갖게 된 원인인 겁니까?”
황당함이 가득 담긴 내 물음에 그녀는 헤실 웃음을 흘리며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엘라는 나를 유혹하듯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저는 여러분을 막아서는 새로운 마왕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성녀가 소환한 대천사를 제물로 공멸하는 것이 가이아의 시나리오였죠.”
시엘라가 앞서 말 한대로 수행자는 완전히 청소부 역이다.
“하지만 타천하면서 그전까지는 갖지 않았던 여러 의문이 떠오르더군요. ‘내가 왜 가이아의 계획에 따라야 하는 걸까? 굳이 지훈 님과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고 말이죠.”
다른 마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또한 타천을 하게 되면서 반 가이아 성향을 띄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충실히 가이아의 계획에 따르는 척하면서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한 거죠. 지훈 님이 라그나베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랬군요.”
가이아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의 포지션으로 우릴 끌어들였다는 뜻.
이걸로 그녀의 입장은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앞으로 시련은 지구뿐만 아니라 뮤대륙에도 닥칠 겁니다. 인간과 이종족을 포함한 문명은 꾸준히 파괴되며 규모가 축소될 것이며 세계는 점차 폐허가 되어가겠죠. 수행자는 기운을 원활하게 회수하기 위한 가이아의 장기 말로 쓰이다 버려질 예정이고요.”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덕분에 수행자는 모두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분명 눈에 띄는 이상징후가 있을 텐데요?”
“음…….”
생각해 보면 이번 엘프 사건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수행자들의 분란을 야기한 종족 간 사냥 퀘스트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수행자의 내부분열이 아닌, ‘하이랜드 vs 미드랜드’ 형식으로 이어져서 자칫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구나 이 문제는 해결된 게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시스템적 대립은 앞으로도 두 대륙 간의 마찰을 계속 유발할 게 분명했다.
“잘 이해했습니다. 그럼 시엘라 님께선 우리 수행자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걸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가이아를 몰아내는 것에 힘을 보태주시면 됩니다.”
너무도 심플한 이야기지만, 그것엔 많은 문제점이 있지 않은가?
가이아를 정리하면 이 세상은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게 가능하긴 해요?”
이거다.
우리가 천상계에 있는 가이아를 무슨 수로 몰아낸단 말인가?
“신족 중에 가이아의 행동에 문제점이 많다고 느끼는 존재가 많습니다. 그들이 힘을 보태줄 거예요.”
마왕 토벌 자체도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하물며 신족도 아닌, 창조주를 몰아내자니.
신들의 힘을 합쳐도 가능하긴 한 일인가 의문이 든다.
이런 우리의 반응에 그녀는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훈 님께서 이스터 에그를 손에 넣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터 에그요?”
그러니까.
그 이스터 에그가 대체 뭔데?
“이스터 에그는 안배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생명을 직접 죽일 수 없다는 룰을 무시하는 가이아의 검인 거죠.”
검이라는 건 말 그대로 무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의미일 것이다.
나에겐 직접적으로 살인을 지시할 수 있다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룰을 무시하는 이스터 에그의 힘은 가이아의 목을 칠 수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가이아가 그 계획에 얌전히 당해줄 리가 없어 보인다.
혹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내가 이스터 에그를 손에 넣는 순간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지, 여러모로 꺼림칙했다.
“가이아의 감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에게 이 계획을 제안한 신족이 열심히 눈을 가리고 있을 테니까요.”
“의심만 하는 것 같지만, 제 입장에선 어쩔 수 없습니다. 솔직히 지금의 시엘라 님은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뼈 아픈 말씀이군요.”
지나치게 형편 좋은 이야기.
당연히 나는 그녀의 제안에 바로 알겠다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수행자들의 이종족 관련 퀘스트 진행을 제한하면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만……. 뭐, 좋습니다. 어차피 저의 제안에 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 * *
엘프들은 시엘라의 힘으로 뮤대륙으로 돌려 보내졌다.
시엘라는 타천사 그라디스가 지구에 침입했던 방법을 보강하여 차원이동 스킬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비록 왕복으로 3일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그 3일이란 제한이 있어도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힘은 큰 메리트가 있었다.
시엘라는 우리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습을 감췄는데,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 마치 가이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덕분에 시엘라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아틀란티스A의 용인족들은 당황하며 우리에게 바짝 엎드렸다.
당연히 모든 일의 원흉은 시엘라지만, 엘프들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준 것은 용인족들이기에 간단히 용서해줄 수는 없었다.
가장 간단한 처벌은 용인족들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베르트 공화국의 병사로서 목숨 바쳐 싸우게 만드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아틀란티스A를 베르트 공화국에 합병시킨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