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36화
106. 이스터 에그(1)
타천사 그라디스가 등장했던 아틀란티스B는 완전히 멸망해 생존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던 사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슬픔에 빠지거나 분노를 느낄 만큼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희생된 불쌍한 사람들이란 느낌이 강할 뿐이다.
그래도 아틀란티B에서 마주했던 용인족들은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인물들이었고,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엘프 납치 사태의 진실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나는 발아래서 버둥대는 용인족 여성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용인족들의 삶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건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온 거라 봐도 되는 거지?”
당연히 범인은 뮤대륙에 있을 것이란 생각에 지구의 존재들은 용의 선상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미드랜드와 하이랜드 수행자들의 분란을 부추긴 범인이 용인족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물론 이는 범인들을 가까이에 두고도 의심을 하지 않은 내 안일함에 대한 짜증이기도 했다.
사실 그들을 의심하려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가이아의 입장에서 꽤나 부려먹기 좋은 존재들이었다.
“무, 무슨 말인지…….”
약자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발밑에 깔려있는 용인족 여성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녀의 경지는 하이마스터 수준으로 엘븐하임의 고위전사(마스터급)가 왜 그렇게 쉽게 당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발뺌하지 마. 지금부터 너희들의 도시로 향할 생각인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 도시가 파괴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컥!”
배를 짓이기는 압력에 결국 그녀는 피를 토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만 않는다면 살릴 수 있는 수단이 있었기에 그녀를 고문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쿵!
“…….”
그런데 너무 그녀에게만 신경을 쓴 걸까?
오토쉴드가 어떤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본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에리카 님에게서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돌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악을 쓰는 소년의 모습.
그리고 황급히 소년을 막는 어른들과 겁에 질린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지금이 완전히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뿔이 솟아난 그녀의 지금 모습은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지만, 이들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대충 상황을 보니 그녀가 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장 각하.”
그때, 내 등 뒤로 베르트 공화국 소속 수행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김선아와 히로시, 이브릴과 노바, 미드랜드 평화위원회 소속 6인까지 총 10명의 인원이었다.
가장 약한 히로시와 김선아조차 드래곤하트를 섭취한 하이마스터 직전의 검사고, 나머지는 모두 하이마스터와 그랜드마스터급의 존재였다.
여기에 내가 보유한 전투 마리오네트 9기까지 더하면 마왕 레이드에 도전할 법한 전력이 되는데, 마음먹기에 따라서 아틀란티스 하나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검은 제복에 범상치 않은 포스를 지닌 사람들이 등장하자 캠프의 주민들은 더욱 움츠러들고 용인족 여성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찾았습니까?”
내 물음에 이브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지하도시가 있더군요. 그곳에서 정령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브릴의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챈 용인족 여성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녀의 배에서 발을 거두며 청아와 연아를 소환했다.
“끌고 와.”
“네, 주인님.”
내 명령에 마리오네트 둘이 피를 줄줄 흘리는 용인족 여성을 짐처럼 끌고 왔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겁에 질려 아무 말을 못 하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곤 캠프를 나섰다.
그리고 한 걸음을 옮기자 주변의 풍경이 싹 바뀌었다.
9서클의 마법사가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50km 거리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이브릴의 이야기에 끔찍한 몰골의 여성이 뭐가 좋은지 헛웃음을 흘렸다.
“에리카랬나? 아까 남자애가 그렇게 부른 것 같던데. 맞지?”
내 부름에 무력하게 제압당한 에리카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무슨 뜻이지?”
나는 뭘 모른척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대로 쳐들어가서 용인족을 척살할까? 아니면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줄까?”
당연히 두 번째 보기를 선택하게 된다면 그녀가 나서서 동료들을 설득해줘야 할 것이다.
내 물음에 그녀는 글게 볼 것 없다는 듯 고개를 팩 돌렸고, 나는 혀를 차며 이브릴에게 말했다.
“결계 깰 수 있어요?”
기술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힘으로 파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룡의 안배로 언령의 힘을 다루게 된 그녀라면 무리없이 결계를 파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네.”
대답과 동시에 결계에 구멍이 생긴게 느껴졌다.
덕분에 에리카의 눈은 더없이 커졌고, 우린 그대로 바닥을 뚫고 지하로 향했다.
-쿵!
마지막 금속 부분까지 깨끗이 뚫어버리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웅장한 지하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도시 아틀란티스A를 발견했습니다.]
[포인트 5000을 획득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합니다.]
B에 이어 A인가.
규모는 이전에 보았던 B보다 조금 더 큰 수준으로 보인다.
그리고 생활하는 인구도 상당히 많았는데, 우리가 등장하자마자 이상을 알아챈 용인족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에리카!”
광장으로 보이는 장소에 내려선 우리는 용인족에게 포위를 당했다.
그러나 딱히 신경 써야 할 수준의 상대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책임자가 누구지?”
심플한 물음.
하지만 용인족들은 에리카의 몰골 때문인지 완전히 눈이 돌아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들과 길게 대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리오네트를 일시에 소환했고, 그들에게 10중첩된 헬파이어를 생성토록 했다.
덕분에 공동을 가득 채우는 태양과 같은 거대 화염구 9개가 생성되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9서클을 상회하는 힘이 응축되어 있다 보니, 살 떨리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기운들을 내뿜었다.
소란스러웠던 지하도시가 침묵에 물들자 나는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다시금 말했다.
“책임자 데려와.”
잠시 후,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달려왔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화염구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에리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죽일 생각인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차하면 이곳의 용인족 모두를 정리해 버릴 수도 있지.”
“그런가?”
원래 아랫사람이어도 쉽게 말을 놓지 않는 나지만, 지금은 이들을 대우해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누군가 아나?”
내 물음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은 파악하고 있는 듯하니, 길게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납치해간 엘프들 당장 데려와.”
그에 작게 한숨을 내쉰 중년의 용인족 남성이 누군가에게 턱짓을 했고 잠시 후, 뮤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엘프들이 대령되었다.
“장로님!”
납치된 엘프는 남자 넷에 여성 여섯이었다.
그들은 이브릴과 노바를 보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고, 여성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쏟았다.
이브릴을 바라보니, 여성들을 살핀 그녀의 눈빛이 표독스레 변했다.
그들이 대충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게 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의 남성.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아틀란티스는 일종의 감옥이지. 대부분의 용인족들은 이 땅을 벗어나지 않고 지하에서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니.”
별로 이들의 인생사에 대해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점만 간추리라 했고, 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거기 있는 에리카를 포함해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용인족이라 할 수 없네. 그들은 용인족임을 포기하고 천사의 종자가 되었으니.”
“천사?”
“그래, 네 쌍의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
네 쌍의 검은 날개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공교롭게도 아틀란티스 B를 멸망으로 몰고 갔던 마왕 그라디스가 떠올랐다.
그는 타천사로 검은 날개가 트레이드마크인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 천사는 매일 밤 자정에 찾아오지.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이상한 지시를 내리네. 그 엘프들의 납치와 같은 지시를 말이야. 그리고 그 지시에 충실히 따른다면 상당히 큰 힘을 내려주지.”
내키지 않는 방향의 이야기.
당연히 나를 비롯해 이야기를 듣던 수행자들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바로 등 뒤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크게 놀란 나와 수행자들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뵙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거깄었는지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가 우릴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크게 당황했다.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는 나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네, 시엘라입니다.”
바로 봉봉이를 성녀로 만들어 줬던 대천사 시엘라였다.
* * *
[타천사 시엘라]
잠시 후, 거의 반강제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나와 수행자들은 눈앞에 위치한 미녀의 머리 위로 떠 있는 명칭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라디스가 대천사 출신의 마왕이다.
혹시 그녀가 그라디스와 같은 포지션이면 우리에겐 큰 위협이었다.
물론, 라그나베일처럼 무해한 마왕도 있다.
그녀 역시 우리에게 적의가 없어 보였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때문에 나와 동료들은 언제든 싸울 수 있게 준비를 갖췄다.
“설마 우릴 부르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정황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럼 왜 직접 안 부르고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거죠?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를 바라보는 이브릴과 노바의 눈빛이 매서운 것처럼, 데려간 엘프들에게 해코지만 안 했어도 조금은 좋은 분위기가 연출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부르기 위함이라면서 엘프 고위전사 둘을 죽이고 10명의 엘프를 용인족들의 노리개로 만들어 버렸다.
“엘프들 건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더욱 의혹으로 가득해졌고, 이브릴과 노바는 금방이라도 무기를 뽑을 것처럼 적대적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내 만류에 분을 삼켰지만, 그만큼 지금 시엘라의 행동은 모순덩어리였다.
“혹시 마에 물들면서 성향이 바뀐 겁니까?”
타천사는 신성력의 성질이 흑마력으로 변하면서 더욱 큰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덕분에 생긴 것만 천사지 성향은 악마나 다름이 없다.
직설적인 내 물음에 그녀는 눈을 껌뻑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 행동이 여러분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