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34화
105. 평화의 시대(3)
하이랜드와는 사이가 굉장히 좋은 편이다.
물론, 라그나베일의 거취 때문에 약간의 마찰이 있긴 하지만, 엘프인 이브릴과 노바, 드워프인 쿠루스 등을 포함해 상당수의 인원이 수행자로 활동하며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이브릴의 경우 언령을 다루는 마법사로 엘븐하임에서의 여왕 다음으로 서열이 껑충 뛰었다.
그랜드 마스터인 노바 역시 서열 4위의 하이엘프였으니, 엘븐하임의 친 수행자 노선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처리하라는 퀘스트가 뜨다니,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다행히 해당 퀘스트에 접어든 수행자가 얼마 되지 않지만, 이는 추후 논란을 넘어 진영 간의 마찰로 번질 수 있는 문제였다.
“작위 악마종의 증발로 퀘스트 진행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체를 한다고?”
하이랜드의 고위전사는 마스터급(7서클)이고, 장로는 하이마스터급(8서클)이다.
등급으로만 따지면 작위 악마종의 훌륭한 대체재가 될 수 있으나, 그들은 우리와 동맹관계에 있는 동료가 아닌가.
아니, 애초에 악마라면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라는 인식이라도 있지, 하이랜드의 신화종은 미드랜드에 아무런 악영향을 주지 않는 존재들이다.
“라그나베일의 말이 사실이던가.”
가이아를 믿지 말라던 말.
아리엘 성녀는 악마에게 들을 이유가 없는 말이라며 성을 냈지만, 요즘 따라 무시할 수 없게 다가오는 충고였다.
다른 수행자들과 달리 나는 직접 가이아를 만났다.
비록 꿈속이긴 했지만, 그녀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고 가이아는 자신은 악신이 아니라며 변명하듯 현재 상황을 설명했었다.
‘컴퓨터로 비유하자면, 신규 프로그램들은 버그가 많잖아요. 더구나 수시로 세계 간 차원 이동이 발생하는 ‘수행자 프로그램’은 ‘운명’이란 프로그램만큼이나 무겁고 많은 리소스를 잡아먹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계속 조정을 거치고 있는 거죠.‘
내게 내려지던 시련 같은 상황들은 단순한 오류라던 말.
그러나 지금 엘프를 비롯해 하이랜드를 공격하라는 퀘스트 지문은 단순한 오류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이마를 짚으며 짜증을 내자 김선아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하이랜드 관련 퀘스트는 수행하지 못하게 막아 놓도록 하죠.”
“당연히 그래야지.”
퀘스트는 수행자 성장의 주요 수단이다.
그런 퀘스트가 일정 구간에서 멈춘다면 불만이 생길 수 있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행자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동료를 배신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기에 앞으로 관리 감독이 중요해질 것이다.
만약 이번일로 하이랜드 수행자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재앙이 될 것이다.
하이랜드엔 수행자가 아니어도 지구를 오갈 수 있는 차원의 틈도 있고, 나를 제외한 다른 수행자들은 어떻게 비벼보기 힘든 강자들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점점 막장으로 치닫는군.”
“오빠의 퀘스트도 말이죠?”
“그래.”
나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발생]
등급: 신화
내용: 이스터에그 찾기
보상: 선택형 신화급 보상카드 1장
심플한 퀘스트 내용.
그리고 보상 역시 내용만큼이나 간결했다.
하지만 전설을 넘어선 ‘신화급’의 등급과 이스터에그 찾기라는 의미 불명의 내용을 보면 그리 간단히 여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터에그’는 게임 속의 비밀메시지, 또는 숨겨진 시스템을 뜻한다.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이 세상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란 뜻으로 여기면 되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굉장히 불친절한 퀘스트가 아닌가.
그런데 하이랜드와의 분쟁을 요구하는 듯한 최신 퀘스트 목록과 함께 이 신화급 퀘스트를 보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화급의 보상이 궁금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두고두고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로 어쩌면 수행자가 수행할 수 있는 마지막 퀘스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구나 브람기슈를 처치하여 마왕 퀘스트를 완료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해당 퀘스트가 떴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참, 이브릴이나 노바는 어떤 퀘스트가 뜨려나?”
노바와 이브릴을 비롯해 하이랜드의 수행자들의 공통점은 퀘스트 진행에 목을 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충분히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력 외에 시스템적인 보조능력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퀘스트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설마 같은 동족을 처리하란 내용은 안뜰 테니.”
“퀘스트가 미쳐 돌아가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건 미드랜드를 공격하란 거겠네.”
김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좁혔다.
큰 위기 없이 순조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시스템적인 변수가 생기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내부 감사팀을 만들어봐. 수행자들이 돌발행동을 하지 못하게.”
내 지시에 그녀는 수긍하며 물었다.
“인선은 어떻게 할까요?”
“은우랑 태영, 사치코가 한가해 보이던데.”
충실히 나를 따르는 측근들.
아직도 내 제자로 알려진 태영과 사치코에 김선아와 히로시의 뒤를 잇는 마스터급 무력의 소유자 은우(마검사)는 믿고 중책을 맞길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확실히 그들이라면 문제는 없겠네요.”
* * *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변화된 퀘스트 내용은 수행자들 사이에 금세 퍼졌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며, 가이아의 의도를 의심했다.
몬스터나 악마가 아닌 동료나 다름없는 존재들을 어찌 해하냐며 격하게 반응했는데, 여기에 지훈이 관련 퀘스트 진행을 공식적으로 금지시키자 하이랜드 소속 수행자들은 큰 소란 없이 침묵을 고수했다.
속으론 불만을 느끼고 있을지언정 이게 수행자들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기에 분을 삼키는 것이다.
“난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네.”
“저도 지훈 님을 믿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이랜드 소속 수행자들은 지훈을 매우 신뢰했다.
그래서 모두가 방관을 선택했다.
“이브릴 장로님! 노바 장로님!”
그런데 신뢰란 단어는 굉장히 섬세하고 연약해서 깨지기가 쉽다.
아무리 굳건하게 지킨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한방을 허용하게 되면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미드랜드의 교역에 나섰던 고위전사 데릴 님과 시즈 님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뭐!?”
지훈의 퀘스트 진행 불가 명령이 떨어지고 겨우 뮤대륙 시간으로 3일이 지나지 않아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목격자는?”
“없습니다. 자리에 있던 동포 모두가 납치된 것으로 보이는…….”
“빌어먹을! 하필 이 시기에!”
덕분에 난리가 난 것은 하이랜드 진영만이 아니었다.
지훈을 비롯한 미드랜드 진영 역시 난리가 났다.
“수행자가 아닌, 악마나 다른 존재의 짓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긴 하죠. 하지만 시기와 장소가 너무 공교롭다는 게 문제네요.”
이브릴과 노바 등 하이랜드를 대표하는 수행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각하게 회의를 했다.
“고위전사의 사망도 크지만, 교역에 나섰던 동족들이 납치를 당했다는 게…….”
엘프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외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고, 엘븐하임에는 국가적 비상상황이 선포되었다.
모처럼 하이랜드와 미드랜드가 손을 잡고 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엘프들의 사망과 납치 사건은 외교 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여왕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어.”
“일단 지훈 님께서 조사를 진행하고 계시니 결과를 보고 행동을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덕분에 지훈만큼이나, 노바와 이브릴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하이랜드 관련 퀘스트 구간까지 진행한 수행자가 얼마나 되지?”
“아마 10명 내외일 겁니다.”
미드랜드 평화위원회 소속 6명과 김선아, 히로시, 최은우까지 총 9명의 인원이 최상급 퀘스트 마지막 구간에 도달한 상황.
즉 수행자 연맹 중추에 소속된 인물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단 뜻이었다.
“곤란하게 되었군.”
“그들이 이런 짓을 저지를 리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동포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 결국 수행자라 해도 그들의 기본 뿌리는 인간이니까.”
이브릴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 * *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나는 클로이의 보고에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번 사건이 수행자의 짓이라 한다면 용의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용의자로 꼽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측근에 수행자 연맹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컸다.
“상식적으로 수행자의 짓이라고 볼 수가 없어.”
나는 굳이 미드랜드, 하이랜드를 나눠 편 가르기를 할 생각도 없고 범죄자를 감쌀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발생한 돌발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부의 짓이라 보긴 힘들었다.
“뇌가 박혀 있다면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 퀘스트 한번 수행하고 보상을 받는다고 극적으로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걸리면 여지없이 처리될 텐데.”
“이브릴님과 노바님이 열심히 변호를 해주고 있긴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겠지. 어쨌든 이건 미드랜드에서 발생한 사건이니.”
신경질적으로 황좌에 깊이 몸을 뭍은 나는 이를 갈았다.
“누구의 짓인지 밝혀지기만 하면…….”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블랜드쪽도 조사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클로이의 물음에 나는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스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그래도 라그나베일에게 직접 부탁했어.”
엉덩이 무거운 그가 직접 움직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지시라도 해놓을 것이다.
이제 그 정도의 부탁은 할 수 있는 관계였으니.
그러다가 문뜩 너무도 공교로운 상황 속에 발코니 너머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당신의 짓입니까?”
마치 인간과 이종족을 이간질하려는 듯한 퀘스트.
그리고 절묘하게 이어지는 이 상황까지.
잘 짜여진 하나의 시나리오 같지 않은가.
가이아를 믿지 말라던 라그나베일의 충고와 맞물려 모든 상황이 하늘의 장난 같이 느껴졌다.
“진짜라면 가이아 님은 전쟁을 바라는 모양이네요.”
당연히 나는 가이아가 그걸 바란다고 해도 절대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 * *
지훈을 비롯해 수행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엘프를 공격한 범인을 색출하고 있던 그때.
범인들은 의외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성과를 자랑했다.
“어때?”
“이야, 확실히 예쁘긴 하네요.”
“그렇지?”
한 무리의 남성들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엘프 여성들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영문 모를 상황에 휘말린 엘프들은 공포에 질렸고, 그런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감성을 자극하는지, 입맛을 다시던 남성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엘프. 실존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잡아 온 거 아니겠냐.”
“그런데 남자들은 전부 죽였어요?”
“아니, 에리카 그년이 끌고 갔어.”
“에, 에리카님이요? 그거, 참…… 안됐네요.”
넓은 공동.
빼꼭하게 건물로 가득 찬 지하도시.
엘프들은 겁에 질렸지만, 낯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주변을 스캔했다.
“소용없어. 이곳은 벗어나고 싶어도 주인의 허락 없이 벗어날 수 없는 땅이거든.”
목적을 들킨 엘프 여성들은 흠칫 놀랐으나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죠? 여긴 어디고요?”
그에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남성은 감출 필요가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여긴 스리랑카 남부에 위치한 아틀란티스A란 지하도시다. 나는 너희들의 주인인 카라스 님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