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29화
104. 마왕 대전
한 놈이 죽기 일보 직전이라 좋아했는데, 동급의 또 다른 놈이 튀어나왔다.
아주 엿 같은 상황이 아닌가.
“브람기슈가 라그나베일 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거군요?”
[건방진 녀석이군. 하지만 네놈의 추론이 맞겠지.]
그때서야 라그나베일이 이런 꼴이 된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현재 뮤대륙에서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야 하니.
[브람기슈의 마력이 리치인 크리드의 라이프베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녀석만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크리드까지 함께 정리되는 것이지.]
위급상황이기 때문일까?
그는 묻지도 않은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보라 거절할 이유가 없지만, 그 말속에는 브람기슈에 대한 적의로 가득했다.
성녀가 사전에 크리드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마력을 공유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가이아의 시스템을 무시한 공격은 어떻게 이뤄진 거죠?”
미래시를 뚫고 이어진 공격.
그런 공격을 내키는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나와 리치형인 크리드가 협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가이아의 규칙을 뚫었다기보다, 시간 공간을 뛰어넘은 빈틈 공격인 거지.]
시간과 공간이라니, 꽤 SF스러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짚는 부분에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시를 가진 사람끼리 싸우면 미래시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니까.
그것과 비슷한 맥락인 게 아닐까?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나는 라그나베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북쪽의 왕께선 이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 물음에 붉은 바탕에 샛노란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전형적인 파충류의 눈.
하지만 그 눈동자는 마치 우주를 담은 듯 깊이가 있었다.
[아마 다시금 쳐들어오겠지. 그럼 또 싸울 것이다.]
그의 사전에 잠시 피신을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부상부터 치료하시는 게 나을 텐데.”
[어차피 저주 때문에 치료도 되지 않아.]
그래서 이 꼴인 거구나.
지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 녀석을 어떻게든 활용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고민했고, 그런 나를 보며 라그나베일이 물었다.
[설마 인간 주제에 날 도울 생각인가?]
“그게 우리 진영에 도움이 된다면요.”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라그나베일에게 제안했다.
“지금은 손을 잡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말이 꽤 잘 통하는 상대 같기도 한데다가 지금 이대로 라그나베일을 방치해서 어제 겪을 일을 또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이건 그의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지만.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어째서인지 거절을 해왔다.
[녀석들과의 전투에 승리한다고 해도 네 녀석들이 뒤통수를 칠 게 뻔하지 않나.]
여기선 아니라고 잡아떼고 싶지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부정하기 힘들었다.
거짓말을 해봤자 바로 들킬 테고.
“그럼 앞 통수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황당한 답이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뚫린 입이라 마구 지껄이는군, 내가 이 꼴이라 만만해 보이더냐.]
“어차피 녀석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처리하고 저희를 상대로 승리하면 뮤대륙은 라그나베일님의 것이 되겠군요.”
[웃기는 놈이군. 대륙 따윈 어찌 되든 상관없다.]
말은 험하지만, 그가 날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어느 정도 내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 판단했다.
“엘릭서로 치료해 보셨어요?”
고위 수행자가 비싼 물약처럼 사용해서 그렇지, 본래 엘릭서는 귀하디귀한 보물이다.
그래도 왕가나 황가에선 한 개나 두 개 정도 보관하고 있는 수준이니, 그라면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물음에 라그나베일은 쓸데없는 짓 말라며 바닥에 턱을 기댔다.
-쿵.
그에 의문을 표한 나는 본인의 허락 없이 엘릭서를 사용했다.
그런데 엘릭서는 그의 몸에 스며들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배리어가 라그나베일의 전신을 감쌌다.
[엘릭서가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짓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저주의 효과가 아니라 라그나베일이 치료 효과를 막아낸 것이다.
“혹시 엘릭서와 상성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
“상성이 안 좋아도 엘릭서를 쓰면 일단 저주는 해제될 것 아닙니까?”
[언제 브람기슈가 나타날지 모른다. 엘릭서의 기운이 침투해 전투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
자기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를 살리고자 치료를 하려는 게 아니었으니.
그저 조금 더 잘 싸울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미드랜드로 통신을 보냈다.
성녀를 비롯해 9서클 마법사와 그랜드 마스터에게 이곳으로 와달라고 말이다.
처음엔 통신을 받은 구미호가 꽤나 당황한 눈치였으나, 이내 알겠다며 내 지시에 따랐다.
“귀족들은 모두 어디 갔습니까? 왕이 이렇게 다쳤는데.”
그러다가 문뜩 가디언도 없이 방치된 라그나베일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고 그는 짧게 혀를 차면서도 묻는 말에 바로 답해 주었다.
[강한 자에게 붙는 것이 악마의 특성 아니겠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악마란 명칭이 아깝지 않은 존재들.
보아하니 내일 발생할 대대적인 침공은 브람기슈의 독단이었던 모양이다.
[왔군.]
라그나베일이 검은 피를 질질 흘리며 다시금 턱을 들어 올렸다.
대가리 크기만 웬만한 대형 선박보다 큰 녀석이 몸을 쭉 펼치니, 축구장 몇 개는 합쳐놓은 너비의 거대한 공동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는 부러진 날개를 대신해 마력으로 몸을 허공에 띄워 출구를 나섰다.
나는 그런 라그나베일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하의 마룡께서 인간과 붙어먹다니. 아주 볼만한 풍경이야.]
거대한 낫인 데스사이즈를 든 사신 브람기슈가 이죽거리자 리빙아머처럼 관절에서 녹색의 기운이 흐물거리는 기이한 형태의 괴물이 투구를 달그락거리며 웃는 모습을 연출했다.
저게 과거 4대 악이 존재하던 시절 동쪽의 왕을 자처하던 ‘악령왕 크리드’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째 리치인 크리드는 갑옷 차림에 지팡이를 들고 있고, 데스나이트인 브람기슈는 로브 차림에 근접무기를 들고 있다.
둘의 무기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1:1로는 덤빌 생각도 못 하는 녀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나는 대천사의 힘이 깃드는 각성 스킬의 남은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은 약 10분.
이 정도면 미드랜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후우.”
어쩌다가 이블랜드에서 마왕들의 전투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으나.
나와 미드랜드를 살리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었다.
성검 허공에 던지고는 5강의 오리하르콘 장검과 방패를 소환해 움켜쥐었다.
성검은 어검으로써 내 주변을 위성처럼 회전했으며, 5강까지 강화된 화이트 드래곤 방어구 세트가 소환되어 자동 장착되었다.
성검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5강 장비인지라 소환 이펙트가 쓸데없이 화려했다.
수호자로써 지닌 신성력에 대천사의 힘이 더해진 지금 나는 완전히 성전사나 다름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꺼림직한 기운이군.]
장비들은 철저히 악마종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
그래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브람기슈의 안광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듯 강렬하게 타올랐다.
이 정도면 각성 스킬이 끝날 때까지 한 명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크리드를 맡도록.]
손을 잡을 생각이 없다고 해놓고 내게 지시를 하는 라그나베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브람기슈만 처리하면 크리드는 자동 사망아닙니까?”
그는 내 거부 의사에 낮게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중상을 입고 있음에도 기운은 어찌나 강대한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지만, 이 상황은 둘도 없는 기회였기에 애써 무시했다.
‘실컷 당해놓고도 정정당당함을 원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든 타입이었다.
악마 주제에.
[네 녀석…….]
전투마리오네트는 바로 소환 가능하지만 굳이 꺼내지 않았다.
조금 더 난전이 되면 모를까 이 전투에서 소환해 봤자, 바로 파괴될 것이다.
“이기는 것만 생각해요. 라그나베일님이 맥없이 패하기라도 하면 대참사니까요.”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 속에 포인트처럼 노란 점이 찍힌 붉은 달 두 개가 나를 향한다.
그것은 라그나베일의 눈동자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친 듯이 디버프 메시지가 떴지만, 내 능력치가 상당했기에 바로 해제되었다.
‘시간 정지.’
시간 정지는 2초밖에 유지가 되지 않지만, 횟수 제한없이 쿨타임이 짧은 것이 장점.
누군가의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기에 나는 바로 영겁의 사슬을 꺼내 들고 몸을 날렸다.
-쾅! 콰콰콰아앙!
“큭!”
하지만 브람기슈는 경험한 게 있으니 바보처럼 당해주지 않았다.
모두의 시간이 멈췄음에도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강력한 폭발이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나는 템빨과 엘릭서를 믿고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쇄 폭발.
폭발은 규모가 크지 않아도 응축된 힘이 하나하나가 소규모의 헬파이어나 다름없었다.
미래시로 보았는데, 지금은 어느 방향으로 달려들어도 이 폭발이 발생했다.
폭발의 비밀은 브람기슈 주변에 먼지처럼 뿌려진 마력 기폭제가 원인.
그래서 나는 두들겨 맞으며 나아갔고, 끝내 영겁의 사슬을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무슨?”
시간정지가 풀리면서 갑자기 자신을 옥죄어오는 사슬이 나타나자 브람기슈가 당황했다.
“베일님!”
[건방진 녀석!]
내 외침에 죽기 직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붉은 광선이 뻗어왔다.
이제 보니 어제 경험한 공격은 라그나베일의 브레스였던 모양이다.
-콰아아아앙!
이어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과 빛 발생했다.
브레스로 발생한 충격파만으로 주변의 산이 증발했으며, 주변을 노닐던 구름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라그나베일의 공격은 브람기슈에게 적중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크리드가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그 공격을 방어해냈기 때문이다.
-퉁!
하지만 미래시를 가진 내가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덕분에 나는 크리드에 의해 상쇄되는 브레스를 등지고 브람기슈 앞에 나타나 직접 무기를 휘둘렀다.
영겁의 사슬에 포박이 되면 그라디스가 그랬던 것처럼 브람기슈 역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영겁의 사슬은 공간이동도 제약했다.
물론 모든 움직임을 봉쇄하는 게 아닌지라 브람기슈는 당황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예리한 5강의 오리하르콘 무기, 파워 부스트 스킬에 의해 극도로 강화된 내 오러블레이드는 미스릴 이상의 강도를 지녔다는 브람기슈의 뼈를 깔끔하게 갈랐다.
[귀찮긴!]
우습게도 녀석의 두개골이 갈라지면서 머리에 뚜껑을 만들어 줬는데, 그 순간.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날아드는 것을 미래시로 보곤 최대한 빠르게 방패를 끌어당겼다.
-투투투툭!
허공에서 무수히 생성된 검은 칼날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마치 아이언 메이든에 갇히는 느낌을 받은 나는 급히 엘릭서를 사용하며 블링크로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저 많은 게 모두 심검인가?’
다행히 대부분의 공격은 5강의 방어구를 뚫지 못했다.
아마 그가 집중된 한 방 공격을 날렸다면 오리하르콘 제를 제외하곤 무조건 뚫렸겠지만, 공격력이 떨어지는 대신 범위를 키워 갑옷이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공격이 워낙 치밀해 여기저기 틈을 뚫고 들어온 게 느껴졌다.
갑옷의 방어력과 별개로 한번은 죽고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촤르르륵!
영겁의 사슬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그 사이 크리드를 옆으로 날려 버린 라그나베일의 브레스가 다시금 브람기슈를 덮쳤다.
-끼기기긱!
거대한 압력이 브람기슈를 짓누르며 그대로 붉은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웃기지 마라!]
이대로 전투가 끝나길 기대했다면 너무 간 것일까?
브람기슈의 포효와 함께 허공에 거대한 칼날이 생성되더니, 브레스 채로 라그나베일을 갈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