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28화
103. 하루 전(2)
타천사 그라디스.
마룡 라그나베일.
불사왕 브람기슈.
타천사와 마룡은 둘째치고, 어쩐지 조금은 약해 보이는 불사왕.
사실 급을 맞추기 위해 불사왕이라 표현한 것이지 툭 까고 말해 언데드다.
그것도 인간 출신의 데스나이트.
물론,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신마대전(신화종vs악마종)에서 악마종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신화종의 숨통을 트여주었던 신족의 힘을 짙게 물려받은 인간이지만 말이다.
지금은 인간이 대를 거듭하여 신족의 피가 옅어져 사라졌다시피 하지만.
신마대전 시대까지만 해도 드래곤에 밀리지 않던 신족에 가까운 인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러라는 규격을 초월했던 검사가 타락을 선택해 데스나이트화된 것이 바로 브람기슈였다.
[이곳을 인간이 찾아오다니.]
이블랜드 남부 빙하지대.
황성과 비교되지 않는 규모를 가진 거대한 얼음의 성 중심에 외롭게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앙상한 스켈레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스켈레톤으로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남쪽의 왕 브람기슈.
그 스켈레톤의 정체가 바로 이블랜드의 정점 중 하나인 2대 악, 브람기슈였다.
나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검사이기도 하기에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스켈레톤이 얼마나 위험하고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지를.
오히려 이 녀석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그라디스와 싸웠단 사실이 새삼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갑습니다. 저는 수행자의 대표이자, 미드랜드에서 베르트 제국을 다스리는 지훈이라고 합니다.”
예의 바른 자기소개에 턱을 딸깍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싼 얼음벽과 상반되는 검붉은 로브가 생겨나 브람기슈를 감쌌고, 동시에 재질을 알 수 없는 왕관이 불꽃 머리 위에 일렁였다.
[웃기는 녀석이로군. 네 운명이 어찌 될 거라 생각하기에 그리 여유를 부리는 것이냐.]
마치 몸을 옭아매는 듯 끈적한 살기가 전신을 감싼다.
이번 이블랜드행에 대해 지인들과 부모님은 하나같이 왜 어울리지 않게 무모한 선택을 한 거냐며 말렸다.
브람기슈의 살기를 정면에서 마주하니, 그들의 충고를 들을 걸 그랬다며 막심한 후회가 밀려올 정도.
하지만 이제 와서 공포심에 무너지기엔 갖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문지기를 제압한 것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브람기슈 님께 제안을 겸해 알려드리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오금에 힘이 빠져 절로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똑똑히 전했다.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사고 가속과 미래시, 파워 부스트는 사용된 상태이며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시간 정지 스킬의 사용을 준비했다.
[호오.]
내 제안이 흥미를 끌었을까?
아니면 굴하지 않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까?
해골바가지 안으로 번뜩이는 불꽃이 작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다.
녀석은 턱을 딱딱 거리며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커다란 낫의 형태를 한 데스사이즈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로브 차림에 저런 무기를 드니, 그림 속에 나오는 듯한 사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패기는 마음에 든다만, 고작 너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가치 있을 것 같진 않군.]
그라면 그라디스가 죽은 게 우리 때문이란 걸 알 텐데 철저하게 무시를 했다.
그리고 공격을 하기 위해 데스사이즈를 들어 올리자, 나는 양손을 흔들며 급히 말했다.
“브람기슈 님을 수행자도 만들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어질 공격에 대한 걱정.
덕분에 긴장감이 대단했다.
이어진 브람기슈의 대답은…….
[음, 그게 가능하다면 확실히 흥미로운 제안이군.]
우리가 바라던 반응대로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살기가 사라지자,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제안임에도 이를 전하기 위해 수행자 대표인 제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사이좋게 지내자고 뇌물을 받치러 온 게 아니란 것쯤은 누구나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이야기해 보란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사실대로 상황설명을 시작했다.
[…….]
설명할 내용이 그리 길지 않아 이야기는 짧게 끝났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안광만 잔잔히 빛났다.
살이 없으니, 정말 무슨 생각인지 전혀 유추가 안 된다.
[시간 회귀라……. 수행자들은 그런 것까지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브람기슈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라그나베일에 대한 역정이 아닌 시간 회귀에 대한 관심이었다.
[회귀를 하게 되면 죽음을 맞이했던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혹시 회귀자를 중심으로 전체 시간이 하루 전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 어떤 권능보다 막강한 권한이 아닌가. 이런 시스템을 가이아가 허락했다고? 아니면 단순히 너에 대한 선물이었나?]
[회귀는 몇 번이나 사용 가능하지?]
물음에 물음이 이어졌다.
나는 그런 브람기슈의 말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뒤로 물러났다.
항상 생각대로 현실이 이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많이 당혹스런 모습이군. 내가 그 쌍두룡에게 성이라도 낼 줄 알았나?]
그는 라그나베일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으니.
악마가 의리를 찾을 리도 없고, 라그나베일이 녀석을 잡아먹었다는 전제 조건이 틀렸을 가능성이 커졌다.
[뭐, 그걸 바랐겠지. 내분이 일어나는 것만큼 네놈들에게 좋은 시나리오는 없을 테니.]
그때.
나는 문뜩 한 가지 의심이 피어났다.
당연히 그의 기운이 라그나베일에 흡수가 되었으니, 브람기슈가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라는 의심이.
[어딜 도망가려고.]
브람기슈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주변의 마력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작동한 미래시로 인해 나는 속박되기 직전에 자리를 벗어났고, 급히 성검을 소환했다.
‘각성.’
그리고 성검의 내재 스킬을 사용하자, 대천사의 힘이 몸에 깃들었다.
여기에 파워 부스트까지 쓰면 일시적이나마 브람기슈와 동등한 전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갑작스런 파워업은 브람기슈조차 당황 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런 브람기슈를 공격하지 않고 바로 도망쳤다.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구역입니다.]
마법사나 검사나 경지의 끝은 일통 한다는 말이 있듯, 녀석의 마력 장악능력을 보는 순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려 하나!]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유쾌한 말투로 데스사이즈를 휘두르는 브람기슈.
이제 보니 단순히 미친놈이었다.
결국 나는 아껴 놓았던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시간 정지.’
혹시라도 언데드라서 시간정지가 안 먹히는 것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 언데드도 시간의 속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녀석의 움직임이 굳자마자 미친 듯이 해당 장소를 벗어났다.
100m를 1초안에 주파하는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치에 각종 이동스킬이 더해지고, 오러와 마법, 대천사의 힘이 더해지니, 2초란 유지시간은 순간 이동이나 다름없는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저 개새끼.’
도망치더라도 그냥 도망치면 재미없지.
나는 녀석에게 10중첩 된 헬파이어를 선물해 주었다.
마왕급 데스나이트가 그 공격 한방에 사망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일종의 화풀이였다.
그렇게 고작 2초 만에 1㎞가 넘는 공간을 이동한 나는 텔레포트가 가능하단 것을 깨닫고는 바로 라그나베일의 영역인 이블랜드 북쪽으로 향했다.
부디 이번에도 헛다리가 아니었으면 한다.
* * *
-쿠르르릉! 쾅!
눈앞에 있던 지훈이 갑자기 사라지고, 얼음으로 된 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 브람기슈는 매우 짙은 안광을 뿌렸다.
[시간도 멈추는가? 대체 얼마나 많은 권능을 씌운 건지.]
브람기슈에게 지훈은 여러모로 재밌는 인간이었다.
[수행자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군.]
리치가 아님에도 리치와 같은 말을 하는 브람기슈였다.
-탁.
그가 데스사이즈의 창대로 바닥을 찍자, 무너지던 성이 금세 원상복구되었다.
[아마 녀석은 이블랜드 북쪽으로 향했겠지.]
반응으로 보아, 문제가 생기면 당하는 것은 라그나베일 쪽이란 것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상대를 너무 쉽게 생각했군.]
비록 인간일지라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을 당황시킬 정도의 힘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상태로라면 쉽지 않겠는데.]
이어서 브람기슈의 앙상한 몸 위로 로브자락이 펄럭이며 허공에 떠올랐고, 이내 텔레포트처럼 빛에 휩싸이며 모습을 감췄다.
* * *
시간 정지의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라디스의 레어로 향했다.
현재 대천사의 힘이 깃든 각성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데, 악마들의 반감을 사더라도 라그나베일의 상황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짜고짜 공격을 해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굴로 들어갔는데, 브람기슈 때와 달리 입구를 지키는 가디언도 없고 여러모로 무방비한 느낌이다.
어차피 어떤 가디언을 갖다 놔도 라그나베일 본인에 비할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크르르르.]
낮지만 강력한 힘이 깃든 마수 특유의 울음소리.
하지만 나는 라그나베일을 앞에 둔 긴장감보다도 코를 찌르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
[웬 놈이냐.]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뮤대륙 시간으로 2년여 전, 카카오섬에서 처음으로 라그나베일을 목격했을 때 느꼈던 웅장함이 아닌, 곧 죽어도 이상치 않은 모습을 한 마룡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예상 못한 상황에 나는 자기 소개를 하면서도 말을 더듬어야 했다.
[용사 희망자인가? 그 정도 힘이라면 지금의 나를 상대로는 헛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만한 수준은 되는군.]
“아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쌍두룡이라 부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 이유는 머리 하나가 뜯긴 상태였으며, 두 날개는 꺾이고 찢겨 하늘을 나는 용도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엄청난 부상에도 내뿜는 기세는 막강했다.
[그럼 왜 날 찾아온 것이냐.]
내가 싸우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님을 느꼈는지, 그는 용무를 물었다.
의외로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분위기.
그래서 나는 브람기슈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라그나베일은 코웃음을 쳤다.
[역시 그런가.]
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눈빛.
동시에 강력한 적의와 살의가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부상자에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라그나베일의 상태를 보는 순간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싸웠으면 좋겠다는 어부지리를 바랬는데, 이미 한 녀석은 거의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이런 상태일 것이라곤 예상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라그나베일은 최강의 악마다.
그런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 어찌 생각하겠는가.
“브람기슈의 짓입니까?”
내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상처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며 찬찬히 훑어보았다.
[브람기슈 한 녀석에게 당할 리가 없지.]
뭐가 또 있단 말인가?
나는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고 그는 건방지단 시선을 보내면서도 궁금한 점을 알려 주었다.
[크리드를 부리더군.]
크리드?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는데, 그것이 오래전 잊혀진 이블랜드의 동쪽 왕을 뜻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말은 브람기슈가 죽은 크리드를 살려냈다는 겁니까?”
[살려낸 건 육신뿐이야. 하지만 마력을 공유한다는 점을 빼면 별개의 존재라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