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13화
97. 마왕 강림(2)
그라디스의 현 위치를 알려주던 마를 쫓는 별이 파괴되었다.
녀석의 최근 위치가 멕시코였으니, 당장 한국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지만, 갑자기 탐지 성물이 파괴되었단 부분이 걸렸다.
지금까지 그라디스를 잘 따라다니던 탐지 위성이 예고 없이 제거당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은 만큼 어쩌면 전부터 성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성물이 파괴된 것보다 꺼림칙한 이변에 중점을 두어 만약을 대비했다.
노바와 이브릴을 포함한 엘븐하임의 지원군.
미드랜드 평화 위원회의 위원들.
8서클 세팅이 되어 있는 마리오네트에 봉봉이와 수호자까지.
3대 악과 싸울 수 있는 수준의 전력을 대기를 시켰다.
“진짜 나타날까요?”
“의도적이라면 녀석은 정말 약은 놈입니다. 그럼 다짜고짜 지구의 심장부에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죠.”
새삼스럽지만, 현 지구의 심장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이다.
정확하겐 한국에 자리 잡은 나 때문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는 의심일 뿐 확실치 않은 일이기에 내 개인적인 판단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지, 국무총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연맹 지하 벙커의 가족들은 물론, 새로 얻은 천공의 도시로 서울 시민들을 피신시키고 있다.
그라디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뻘짓으로 끝나겠지만, 차라리 뻘짓으로 끝나더라도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3대 악이 등장하면, 그때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을 테니.
내 독단적인 행동에 정부는 난감함을 표했지만, 지금은 사정설명을 하기보다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기에 현재 내 위치로 불만을 찍어눌렀다.
그렇게 서울 시민들이 피신을 시작하고 30분 후.
아직 절반도 태우지 못했건만 주변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하늘에 먹구름이 생기더니, 서서히 태풍처럼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3분 후, 3대 악 그라디스가 등장합니다.]
확인 사살을 하듯 상세 내용을 알려주는 친절한 메시지에 나는 시민들의 피신을 중지시키고 바로 천공의 도시를 태평양 상공으로 이동시켜버렸다.
“남은 시민들의 통제 부탁합니다.”
내 외침에 겁을 먹은 국무총리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어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3대 악 공략팀과 함께 서울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들은 내가 준비한 각종 아티팩트로 떡칠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하늘을 날지 못해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대한 영토와 군세를 지니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는 3대 악은 그야말로 마왕이다.
음침한 하늘이 마왕의 등장을 예고하니,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해도 속으론 몹시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엘리시아.”
“응!”
내 호명에 봉봉이는 오리하르콘 재질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작게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
이어서 봉봉이의 지팡이에 빛이 깃들기 시작하며, 허공에 새하얀 입체 마법진이 떠올랐다.
신성 마법진은 마치 정교한 기계식 시계를 보는 것처럼 움직였는데, 그곳에서 발생한 빛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전에 등장했던 대천사 시에나처럼 4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나타났다.
[대천사 헤리엘]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는 천사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름다운 대천사는 금빛으로 빛나는 크로스 스피어를 뽑아 들었고, 연기처럼 하늘거리는 금색의 얇은 솔이 갑옷처럼 몸과 손을 감쌌다.
[3대 악 그라디스가 등장합니다.]
[그라디스 레이드 성공 시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지급됩니다.]
흥미를 끄는 메시지 내용이지만, 문제는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린 예정대로 대천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뭐야 이거, 어째서 공간이동에 딜레이가 있는 거야?”
그리고 소용돌이치던 먹구름의 중심을 뚫고 나타난 것은 헤리엘이란 대천사와 비슷한 백발을 가진 미청년이었다.
그는 불만스레 혼잣말을 내뱉고는 스윽 주변을 살폈다.
“헤리엘이라. 새로 만든 녀석인가? 처음 보는군.”
역시 우리 쪽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대천사 헤리엘이었기에 그라디스도 그쪽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도 헤리엘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라디스는 실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재미없네,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장기 말은.”
프로그램이란 단어를 거론하는 그라디스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분명 눈앞에 위치한 헤리엘과 다름없던 대천사 출신이다.
어째서 타락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말만 들어선 세상의 법칙이란 것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당연히 악마종이니, 그렇겠지만…….
그가 대천사 출신이라는 게 걸렸다.
우리가 모르는 중대한 비밀 같은 게 있는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인데?”
그런 나를 보며 그라디스가 말했다.
“여쭤 보면 답을 해주실 건가요?”
“상황에 따라?”
의외다.
지성이 높은 만큼 말이 통하는 인물이란 걸까?
“어째서 지구로 넘어온 거죠?”
“이곳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거든. 완전히 가이아의 뜻대로 움직이는 뮤대륙과는 전혀 다르지.”
가이아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지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아니 달라. 지구는 아직 조정 중인 상태지. 덕분에 가이아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나는 예전에 봉봉이를 성녀로 만든 시엘라란 대천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 지구가 완전히 동조된 상태가 아니라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녀인 봉봉이가 소환한 헤리엘은 예외인 모양이지만, 그라디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너희만 제거하면, 가이아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는 땅이 내 것이 된다.”
하지만 묻는 말에 순순히 답을 해준다고 그가 적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수행자는 천사와 함께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으니.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내 물음에 그라디스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원랜 적당히 놀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이 이상 시간을 주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눈앞에 위치한 우리의 전력을 가볍게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유들유들한 행동에도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전투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나는 사고가속과 미래시를 최대로 가동하며 파워 부스트를 사용했다.
“시간을 주면 네놈과 같은 수행자가 계속 등장하지 않겠나.”
핏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선명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높게 평가해 주는 것은 좋지만, 그는 우리에게 쓸데없는 선물까지 주었다.
[서쪽의 왕 그라디스가 제압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90% 감소합니다.]
[내성 능력 적용. 그라디스의 제압 능력을 완전히 방어해 냈습니다.]
“호오?”
자신의 기운이 튕긴 것을 느낀 걸까?
그라디스가 작게 감탄했다.
대천사는 그렇다 쳐도 설마, 나까지 온전히 자신의 기운을 튕겨내리라곤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그랜드 마스터들조차 입술을 깨물며 버티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현자의 돌이 지닌 보조 효과가 제대로 적용된 모양이다.
“치료 부탁해.”
내 지시에 얼굴이 새파래진 봉봉이가 다시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에 새하얀 빛이 주변을 쓸었고, 곧바로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풀렸다.
역시 파티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 파티에 있는 성직자는 일반 사제가 아닌, 성녀가 아닌가.
-콰아앙!
봉봉이가 사람들에게 걸린 디버프를 풀어주는 동안 그라디스가 대천사 헤리엘에게 달려들었다.
천사들의 주력 무기인지 그라디스 역시 크로스 스피어를 들고 있었다.
물론, 금빛으로 반짝이는 자태가 신비로운 헤리엘의 장비와 달리 매우 악마스런 디자인을 자랑했지만 말이다.
-콰아앙! 쾅!
그 둘이 충돌을 할 때면 어김없이 사방을 뒤흔드는 충격파가 발생했다.
만약 지상에서 싸웠다면 전투의 여파만으로 서울이 금세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봉봉이를 통해 대천사에게 서울을 조금씩 벗어나게 했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큭!”
헤리엘이 그라디스에게서 밀려 튕겨나는 순간.
나와 청아, 연아, 설아의 10중첩된 8클래스의 헬파이어가 그라디스를 덮쳤다.
-콰아아아아앙!
말이 8클래스지, 10중첩에 파워부스트, 장비옵션과 높은 스텟이 더해지니, 일반적인 9클래스급 마법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 펼쳐졌다.
마치 허공에서 핵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폭발이 발생해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쿵!
덕분에 서울 서부에 위치한 장벽이 충격파에 붕괴되어 버렸다.
막강한 공격이지만, 3대 악이 이리도 쉽게 제거될 리 없으니 미래시에 집중하며 이어질 상황에 대비했다.
“흡!”
그리고 내 눈앞에서 그라디스가 나타나는 미래를 보곤 바로 해당 자리를 벗어났다.
-콰아앙!
나와 마리오네트가 벗어난 자리를 그랜드 마스터인 바르토스 황제와 노바가 대신했다.
“큭!”
두 그랜드 마스터의 공격은 그라디스의 검은 날개에 막혔는데, 그 날개 사이를 비집고 나온 창이 노바의 왼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단순한 찌르기일 뿐인데, 그 공격은 노바의 왼쪽 어깨를 포함해 몸통의 절반을 날려 버렸다.
“부활!”
보통이라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
하지만 봉봉이의 주문 한 번에 그의 부상은 순식간에 완치되었다.
역시 살아 있는 엘릭서다운 면모였다.
그런데 문제는 부상을 회복하더라도 그라디스가 여전히 눈앞에 있다는 점이다.
-콰아앙!
“크아악!”
창과 검들이 부딪힐 때면 그랜드 마스터의 몸은 버티질 못하고 몸 여기저기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대천사가 빠르게 달라붙어 둘이 경험한 지옥은 2초여 만에 끝났지만, 단 한 번의 격돌로 둘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환골탈태를 거친 그랜드 마스터들이 단 몇 초의 시간을 끄는 것이 고작.
더구나 성녀가 없었다면 죽음을 맞이할 부상도 많았다.
-컹!
그라디스의 등 뒤를 노렸던, 꼬리가 아홉달린 거대 여우가 손짓 한 번에 피투성이가 되어 추락한다.
대천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달라붙었다 하면 피를 봤다.
덕분에 봉봉이는 쉴틈 없이 회복 주문을 읊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이기고 지고를 떠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뭔가 반전이 필요했다.
* * *
그라디스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쳐들어온 덕분에 아직 서울에는 미쳐 피난을 하지 못한 시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안전한 쉘터에 들어가지 못해 붕괴되거나 새롭게 건축 중이던 건물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말을 잃었다.
“도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능력자의 말에 지훈을 대신해 수행자들을 이끌고 있던 김선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의 수준으론 상처 하나 못 냅니다.”
“그거야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죠.”
차곡차곡 힘을 길러온 수행자들과 달리 갑자기 큰 힘을 능력자 중엔 ‘자신은 특별하다’며 귀족 병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지금 김선아에게 의견을 제시한 인물 역시 그런 유형이었는데, 상황파악 못 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김선아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군이 싸우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냥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
그에 능력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김선아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콰아아앙!
“미, 미친!”
전투로 인한 충격파에 견고한 서울 외벽이 붕괴되고, 마치 위성이 연달아 떨어지는 것처럼 곳곳에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충격파가 이 정도면 직접 공격은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걸까?
결국 공포심이 그의 오만함을 짓이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