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206화
94. 이상한 꿈
사방이 새하얀 공간.
나는 그곳에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몸의 형체가 없지만 나 자신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느껴진달까?
마치 유령이 된 것만 같았다.
‘뭐야, 이거? 설마 꿈?’
사람이면 당연히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
뮤대륙에서 5일을 보내고 지구에서 깨어날 때가 된 수행자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지구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꿈을 꾸는 듯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마력을 운용하고, 오러를 운용하고, 신성력을 운용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어쩌라는 거야 대체? 자각몽이면 자각몽답게 원하는 장면을 비춰주던가.’
처음 수행자가 되고 뮤대륙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
나는 속으로 불편함을 토로하며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뜩 이곳이 수행자들이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휴게실과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반갑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말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다.
마치 글자가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것 같았다.
‘누구십니까?’
대화가 통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으로 물었고.
[나는]
원하던 대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쉬이 반응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가이아라 지칭하는 존재입니다.]
상대가 신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속마음을 숨기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세상을 왜 엉망으로 만드냐며 따져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새하얀 공간에 무언가가 나타나 정신을 집중해 바라보았더니….
-스스스.
누런색의 뇌가 척추를 길게 빼놓은 채 둥둥 떠 있었다.
이후 마치 전등을 껐다 켜는 것처럼 세상이 암전에 물들었다 밝아졌다를 반복했다.
시야가 한번 깜빡이니, 그 뇌에 안구가 생기고.
다시 한번 깜빡이니, 혈관이 줄줄이 생겨났다.
이어서 내장이, 골격이, 근육이 갖춰졌고,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띄어 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절세의 미인이었다.
가이아 교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신상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아니면 내가 알아보기 편하게 그 모습으로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 아아.”
자신을 가이아라 주장한 여성은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 목을 가다듬고는 듣기 좋은 미성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육신을 가져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나도 몸이 있다면 상관없다며 어깨를 으쓱일 텐데, 지금의 나는 육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유령 신세였다.
‘이런 곳으로 저를 부른 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내 태도에도 그녀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
“지훈 님을 뵙고 싶어서요.”
신이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신을 생각할 때면 TV를 앞에 두고 수행자들이 개고생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팝콘이나 먹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로 생각했다.
적어도 내 안에서 가이아는 선신이 아닌 악신으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전 그런 악취미는 없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벌어졌던 엿 같은 상황들은 뭔데?
내가 황당함을 표하자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단히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저는 OS(운영체제)의 사용자 권한을 가진 존재이고 이 세상은 여러 프로그램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있죠. 물리법칙 프로그램, 자연현상 프로그램, 동식물 프로그램 등등….”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인 걸까?
왠지 실제로도 그럴 것 같은 느낌이다.
“컴퓨터에서 신규 프로그램 보면 대개 버그가 많잖아요. 더구나 수시로 세계 간 차원 이동이 발생하는 ‘수행자 프로그램’은 ‘운명’이란 프로그램만큼이나 무겁고 많은 리소스를 잡아먹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계속 조정을 거치고 있죠.”
뭐랄까.
신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닌 느낌이다.
‘하지만 당신 입장에선 우린 단순한 프로그램의 조각이 아닙니까? 굳이 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무리해서 무거운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지훈님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헛웃음이 났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아무리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잘한 버그는 그렇다 쳐도 수십억의 사람이 죽게끔 프로그램을 짠 건 애초에 그녀가 아닌가.
아니, 그전에 내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진짜 가이아가 맞는 걸까?
“나에 대한 의심은 지구로 돌아갔을 때 자동으로 사라질 겁니다. 지금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뭐, 그렇다면야….
‘왜 절 만나고 싶었다는 거죠?’
“한가지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온화했던 표정을 지우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지훈님은 지구에서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나는 말을 잃고 잠자코 가이아를 바라만 보았다.
“당연하지만 지훈님이 죽는다면 지구는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죠.”
‘제가 누구에게 죽는다는 거죠?’
“그건 머지않아 알게 됩니다.”
소설이나 만화책 보면 이런 상황에서 항상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라.
이왕 도와줄 거면 확실하게 도와줘야지.
“직접 거론을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물을 적대할 수가 없거든요. 지훈님도 그 상대도 모두 보호해야 하는 대상인 거죠.”
창조물은 무조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다?
나름의 제약이란 걸까?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머지않아 자연히 알게 되실 거에요.”
하긴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가이아가 직접 지워도 될 텐데 그렇게 못하는 것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지훈님을 보호하기 위해 한가지 선물을 하려 합니다.”
지금도 상대를 처리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선물이라 칭하지 않는가.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는데.
[여신의 권능 / 팔찌 / 소환형 공용장비]
-가이아의 힘이 담긴 팔찌로 1회용 아티팩트이다.
-가이아의 고위 권능 하나가 ‘무작위’로 부여된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설명이지만.
이왕 도와줄 거면 더 확실한 것을 줄 순 없는 걸까?
“뭐든 허용 한도라는 게 있거든요. 이것도 ‘무작위’란 설정 때문에 부여가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내 목숨은 운빨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이든 고위 권능이면 필시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내 목숨을 구할 장비라는데.
이 정도만 해도 완전히 특별 취급이다.
어느 수행자가 죽는다고 여신이 나서서 도움을 주겠는가.
-쿠르릉.
나는 그녀에게 수행자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와 현재 두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 현상에 대해 이유를 물으려 했다.
“이런, 시간이 되었군요.”
하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함인지, 용건은 끝났다는 건지.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고, 새하얀 세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요. 이번에 수행자가 된 구미호와 그 동료들을 믿어도 되는 존재인가요?’
내 물음에 가이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적어도 그들이 날 죽일 적은 아니란 뜻이니.
“부디 무사하시길.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순식간에 암전에 물들었다.
* * *
“어?”
익숙한 방의 회색 천장과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더없이 놀란 표정으로 울먹이는 클로이와 김선아의 모습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두 사람은 나를 와락 껴안으며 몸을 들썩였고, 열려있는 방문 뒤로 가족들과 친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가슴을 쓸어내린 정우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 30분이나 늦게 깨어났어.”
“그래?”
놀라긴 봉봉이 역시 마찬가지인지, 손에 깃들어 있든 빛을 거두고는 은근슬쩍, 부인들의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부인들과 딸이나 마찬가지인 봉봉이를 다독이곤 상체를 일으켰다.
-짤랑.
그때 문뜩 내 손목에 걸린 유리처럼 투명한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여신의 권능]
그 팔찌를 보고 나서야 나는 방금까지 꾸었던 꿈을 뒤늦게 떠올리게 되었고, 이내 표정을 굳혔다.
“너 때문에 완전 난리 난 거 알아?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 각국 지도자들이 청와대 텔레포트 게이트로 날아와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어.”
“회장님!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저 합참의장입니다!”
정우의 이야기와 인파를 헤치며 달려오는 군장성들의 모습에 뒤통수를 긁적인 나는 멀쩡한데도 괜히 부축해주는 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향해 괜히 어머님이 등짝을 때리셨다.
아무래도 너무 놀래켜 드린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정우의 물음에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가이아를 만났어.”
그에 수행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뜨며 크게 놀랐고, 가이아에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신을 만났다는 거야?’라며 주변에 물었다.
“진짜야?”
“어, 이 팔찌. 여신한테 받은 거야.”
그에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던 인식이가 정우와 내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와, 대박이네? 여신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 아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려나?
하지만 이 팔찌는 용도는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곧 내가 죽을 거라던데? 쉽게 당하지 말라고 주더라.”
내 이야기에 벙커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 *
큰 소동을 해결하고 가족들과 식사를 나누던 내게 봉봉이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아빠.”
“응?”
“검은 날개 네 쌍의 천사가 지구를 위기에 빠뜨린다는데?”
“그게 뭐야?”
내 물음에 봉봉이가 쥬스를 마시며 지나가는 말투로 답했다.
“신탁인가 봐. 처음 받아보네.”
“그래, 신탁이구나. 신탁 말이지. 응? 신탁?”
나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귀를 후벼야 했다.
“뭐라고 했어?”
“신탁.”
“…….”
설마 가이아가 다른 방식으로 적의 정체를 알려 준다는 게 신탁을 말하는 거였나?
[신탁의 정보를 성녀로부터 직접 습득했습니다.]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메시지 알림이 떴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클로이를 바라보았고, 뭐 아는 거 없는 말에 어머니표 매운탕을 먹던 그녀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서쪽의 왕 그라디스가 타천사란 특성을 갖고 있긴 한데.”
“아, 씨….”
생각 이상으로 까마득한 거물에 등장에 나는 부모님 앞임을 잊고 욕을 입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서쪽의 왕 그라디스라면 계속 지구로 넘어오던 악마종들의 보스가 아닌가.
즉, 3대 악인, 마왕 말이다.
“쎄?”
순진한 봉봉이의 물음에 ‘어, 존나 쎄.’라고 답하려다가 말았다.
밥맛 뚝 떨어지게 만드는 이야기에 모두들 수저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죠?”
기껏 진정시켜놨더니, 다시 불안에 떠는 클로이를 보며 말했다.
“준비해야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바로 싸우는 게 아니란 점이지. 1년 뒤에 하이랜드에서 맞이할 브람기슈의 사전 연습으로 생각하자.”
가이아가 머지않아 죽음을 당한다고 했는데, 이건 잘 생각하면 당장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