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8화
90. 2차 웨이브(3)
나와 청아를 향해 덮쳐오는 새빨간 불꽃.
하지만 확산하는 화염은 슬로우모션처럼 느릿느릿 다가온다.
사고 가속뿐만 아니라, 이미 미래시로 기습공격을 파악하고 있던 우리는 여유롭게 블링크로 해당 장소를 피하며, 공격을 취해온 적의 뒤를 노렸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검은 하늘을 가르는 검.
악마종에 추가 데미지가 붙는 오리하르콘 장검은 청아가 들고 있었다.
“흡!”
이글거리는 불꽃을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내 검을 향해 삼지창을 휘둘러 막아냈다.
[플레어 세르프 자작]
하지만 내 공격은 애초에 목숨을 노리기보다, 녀석의 빈틈을 유도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발밑에서 솟구쳐 오르는 7서클의 아이스 블레스터.
나와 동시에 블링크로 자릴 피했던 청아의 연계 공격이었다.
“제법이구나.”
여유가 있는지 자작위의 악마종 세르프는 새빨간 화염을 쉴드처럼 몸에 둘렀다.
7서클의 대마법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 세르프를 삼켰지만, 새하얀 수증기가 눈이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니, 적을 감싼 화염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7클래스의 보통 마법으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인 모양이다.
-콰아앙!
화염에 휩싸인 세르프의 창이 마법을 뚫고 나를 찔러 왔다.
거의 순간 이동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뻗어 창끝은 총알의 속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러나 이 공격 역시 예측 범위 내.
나는 그녀의 창을 기다렸다는 듯이 쳐내고는 지금까지 잠자코 중첩을 하고 있던 7클래스 마법을 개방했다.
‘익스플레인.’
디스펠과 비슷하지만, 마법이 아닌 적의 특수 능력을 해제하는 7클래스의 대마법.
증폭 스킬에 장비 옵션, 10중첩이 더해지니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8서클급으로 추측되는 악마종 세르프가 두르고 있던 모든 능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
당혹스런 의문을 토하는 세르프.
화염의 정령을 연상시키던 모습에서 눈과 머리카락이 붉을 뿐인 평범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극히 노출이 심한 여자 말이다.
그녀는 해제된 모든 능력을 급히 복구했으나, 그 틈을 노리고 오러를 포함해 각종 효과가 떡칠된 검과 청아의 3중첩된 대인 마법이 작렬했다.
-콰아앙!
하지만 적을 당황시키긴 했어도 결과적으로 유효타를 주진 못했다.
세르프가 마법사라도 되는 양, 공간을 도약해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자작위 악마종이 강할 거란 건 알고 있었으나, 상상 이상으로 까다롭다.
무엇보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오러 대신 화염을 창에 두르고 원거리 공격에 회피기까지 있는 완전한 마창사였다.
“젠장!”
-콰아앙!
그러나 상성을 떠나 이번 전투의 승리는 우리가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동한 방향에서 나타난 실레스틴이 세르프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을 한다는 사실을 미래시로 인지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더불어 내가 휘둘렀던 검은 아직 빗나간 것이 아니었다.
-푸확!
내가 쥔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다.
검신의 길이를 최대 100미터까지 늘릴 수 있는 마법검이었으니.
덕분에 피했다고 생각했던 검이 길게 늘어나 세르프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큭!”
하지만 검은 그녀의 어깨를 20cm 정도 벤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세라프가 급히 창으로 막으면서 검은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검의 크기를 줄이며 무기를 교체했다.
하늘검은 변수를 위한 무기였는데, 더는 같은 공격에 당할 것 같지 않아, 악마종을 상대로 최고의 공격력을 뽑아낼 수 있는 오리하르콘 대검을 뽑아 들었다.
-콰아앙!
나와 청아만 해도 까다로운데 실레스틴까지 끼어드니, 세르프는 공격 태세를 취하지 못했다.
그렇게 실컷 두들기는 우리의 공격을 막기 급급했고, 공간이동으로 피하면 공간이동으로 쫓아갔다.
거의 동시에 말이다.
사고가속 속에 청아와 실레스틴에게 오더를 내리니, 거의 셋이 하나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사방을 가득 채운 공격에 점점 유효타가 늘어났지만.
애석하게도 세르프는 물리 방어력 능력이 낮은 대신 빠른 회복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 유효타의 효과가 길지 않았다.
덕분에 공격 일변도로 두들기고 있는데도 좀처럼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겐 결정적 한 방이 부족했다.
“바퀴벌레 같긴.”
7서클에 최상급 익스퍼트.
종합 능력 면에선 8서클과 고위마스터도 상대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자작위 악마종에게 고전하는 것은 당혹스러웠다.
물론, 녀석이 자작위 악마종 중에서도 백작위에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다.
애초에 상대가 인간이 나눈 경지로 재단할 수 없는 특수 존재였으니 말이다.
녀석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선 일반적인 7클래스가 아니라 5번 이상 중첩된 7클래스 마법을 적중시켜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고가속을 사용한다고 해도 7클래스 마법을 한순간에 캐스팅할 수 없다.
5중첩을 하기 위해선 적어도 사고가속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10여 초가 필요했고, 가장 확실한 공격인 10중첩을 위해선 약 30초가 필요했다.
그레서 청아가 실레스틴과 함께 계속 마법을 사용할 때, 나는 근접 전투를 벌이면서 마법을 중첩해 기회가 보일 때마다 한 방을 노리는 식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콰아아앙! 쾅!
전투가 속 시원하게 전개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린 우위를 놓지 않았다.
공격을 계속하다 보면 기회가 생기기 마련.
그러나 영양가 없는 전투가 지속되는 것은 그리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만 떨어지거라!”
그런데 지지부진한 전투 상황이 불편한 것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힘이 우리보다 위라고 생각했는지, 세르프의 공격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덕분에 꾹 닫혀 있던 내 입이 서서히 호선을 그려갔다.
‘알아서 빈틈을 만들어주다니.’
감정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여유가 없다는 뜻.
그리고 상대가 냉정함을 잃어준다면 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었다.
“네놈이 베르트 대공이렸다?”
화염의 벽을 친 채 나와 무기를 맞댄 세르프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에 나는 그녀의 성질을 긁기 위해 조소를 흘렸다.
“말투 한번 고풍스러우시군. 꼴에 귀족이라는 건가?”
내 도발에 세르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악마종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이유는 거절하지 못할 보상을 약속받아서라고 지난번 창원에서 만났던 악마종에게 들었다.
아마 세르프도 같을 것이다.
“자신이 수행자들을 단련시키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지?”
세르프는 이를 갈며 불의 갑옷을 크게 확대 시켰다.
-쿵!
갑옷과 창에 씌워진 불길이 자유롭게 움직여서 근접 전투가 상당히 까다롭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석이 정령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 무술에 조예가 깊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벌써 이긴 듯한 말투군!”
아직 이긴 건 아니지만, 질 수는 없는 조건이다.
결정적 한 방을 못 넣어서 그렇지, 전투의 주도권은 한 번도 내주지 않았으니.
더불어 내 도발에 넘어가 잔뜩 흥분한 그녀는 점점 허점이 드러냈다.
자멸의 길을 선택해 주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적이란 말인가.
* * *
남작위 악마종을 상대하러 갔던 엘프들이 천공성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다음 출동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이브릴이 사용한 마법으로 지훈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전투 능력이 상당하군요. 저 비정상적인 캐스팅 속도는 대체 뭐죠?”
한 엘프의 물음에 이브릴이 답했다.
“아마도 수행자 전용 스킬이겠지.”
“저 능력 하나만으로도 같은 등급의 마법사 2명은 쉽게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다.”
이브릴은 동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들이 칭찬 일색인 것과 달리 전투의 행방은 쉽게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나보다 강하군.”
영상만으론 확실한 무력이 와 닿지 않았는지, 이브릴의 평가에 엘프들은 크게 놀랐다.
이브릴은 엘븐하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은 지훈이 7서클의 대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하긴 해도, 8서클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브릴은 다른 엘프들이 생각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짚었다.
“웨이브는 이제 막 시작했어. 베르트 전하께선 이번 전투에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의 엘프들.
이브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영상 속의 지훈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갈등의 기운이 깃들어 있거든.”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헛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엘프들은 쉽게 수긍을 했는데, 이유는 바로 그녀가 일반 엘프가 아닌 하이엘프였기 때문이다.
하이엘프가 가진 눈은 특별하다.
그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진실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으니.
“과연 가이아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군요.”
“아니, 이건 베르트 전하께서 특별한 거지.”
지훈을 향한 시선이 심상치 않은 이브릴.
그에 다른 엘프들이 ‘설마?’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농담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부인이 둘이나 있는 사람을 상대를 이성으로 보겠어? 절대 그런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마. 다만….”
남녀 관계에서 확실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이브릴.
엘프는 평생 동안 단 한 사람만을 반려로 맞이하기 때문에 정서상 지훈을 연애상대로 볼 수가 없었다.
뜸을 들이는 이브릴을 보며 엘프들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동맹 상대로는 더없이 훌륭하지. 앞으로도 수행자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야겠어. 우리 하이랜드를 위해.”
다른 엘프들은 이브릴의 결정에 반발하는 일 없이 얌전히 동조했다.
이브릴을 대한 엘프들의 태도는 꼭 주군을 대하는 신하들 같았다.
“끝나가는군.”
그녀는 한 군인이 황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지훈을 비추던 마법 영상을 없앴다.
* * *
“이, 이럴 수가….”
강한 상대들이 생을 마감할 때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
나는 세르프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은 오리하르콘 대검에 힘을 주어 위로 들어 올렸다.
덕분에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은 좌우로 쪼개졌고, 갑옷과 창에 깃들어 있던 화염이 주인인 세르프를 태웠다.
“빡세네.”
그렇게 세르프를 처치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잠시 후 예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어 세르프 자작의 아공간 내용물을 수거할 수 있습니다. 수거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아니요를 말할 리가 없지.
나는 예전에 경험했던 것처럼 엄청난 양의 내용물이 쏟아질 것을 대비해 아공간을 열었다.
이어서 엄청난 양의 보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대부분이 귀금속이었는데, 중간중간 쓸 만한 매직아이템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인 물건은….
[세르프의 파르티잔 / 창 / 소환형 공용장비]
세르프가 자작위와 함께 남쪽의 왕에게 하사받은 무구다.
-창날 40cm, 손잡이 150cm. 무게 2.1Kg
-내장 스킬 ‘멸화의 불꽃’ 기능(일정 마력을 이용해 오러블레이드 수준의 불의 검을 생성한다.)
-스킬, 오러, 마법, 마기 효과 145% 증폭
-성속성의 적에게 200% 추가 데미지
-자가수복
[세르프의 브레스트 아머 / 갑옷 상의 / 소환형 공용장비]
세르프가 자작위와 함께 남쪽의 왕에게 하사받은 방어구다.
-창날 40cm, 손잡이 150cm. 무게 2.1Kg
-내장 스킬 ‘멸화의 불꽃’ 기능(일정 마력을 이용해 8서클 수준의 불의 방어막을 생성한다.)
-방어 스킬, 방어 마법효과 50% 증가
-자동회복 LV+8
-자가수복
당장 내가 주력으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는 장비들이었다.
아직도 방어구는 포인트샵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지라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
장비가 노출이 심한 여성용이란 것이다.
입고 다니면 변태 소리 듣기 딱 좋다.
창은 그대로 내가 쓰고 갑옷은 잠시 김선아에게 사용토록 한 다음 포인트 샵에서 외형 변경을 하던가 해야 할 것 같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 향상됩니다.]
[보상으로 강화보주 5개를 습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선택형 최상급 보상카드 1장을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최상급 보상카드 2장을 획득했습니다.]
나는 기분 좋게 보상카드를 수습하곤, 다시금 대기를 위해 천공의 성으로 돌아갔다.
* * *
악마종의 대거 등장에도 2차 웨이브는 1차 웨이브에 비해 피해가 극히 적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백작위 악마종 사냥 퀘스트가 뜨긴 했으나, 이후 자작위의 악마종이 2마리가 더 등장하고 그 이상의 존재는 등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꽁꽁 아껴 놓은 힘을 사용할 기회 없이 웨이브가 마무리되었는데, 눈치 빠른 이브릴이 내게 말했다.
“끝까지 전력을 드러낼 만한 일이 없었네요.”
뜬금없지만 날카로운 이야기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간파 능력을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브릴은 거짓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어차피 들킬 거 굳이 비밀에 부칠 필요가 없단 생각에 손위로 기운을 모았다.
“그건?”
이브릴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고,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신성력이죠.”
자체적으로 성스런 기운을 내뿜는 오리하르콘 무구로 인해 신성력은 제법 친근한 기운이었다.
나는 손 위로 모인 신성력을 움켜쥐며 말했다.
“악마종과의 싸움이 점점 많아질 테니, 대비를 해야죠.”
“어째서 지구의 성녀께선 수호자를 둘밖에 삼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이미 세 번째 수호자가 존재했던 거군요.”
그렇다.
봉봉이의 3번째 수호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