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7화
90. 2차 웨이브(2)
수행자 연맹의 검은 제복은 지나치게 외형에 치중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러한 모습이 상당히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마치 모두가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시기에 귀족 계급임을 뜻하는 듯한 복장 같았으니.
“회장님께서 ST그룹에 다니던 시절 직속 상사시라고요?”
“네, 뭐…….”
막상 소리치긴 했지만, 모르는 수행자가 말을 걸어오니 괜히 주눅이 들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그리고 수행자들이 자신을 부르자 움찔한 박상호가 부인을 바라보았지만, 부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관여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D-DAY 이후 실망스런 모습만 보여줬더니, 관계가 많이 소원해진 두 사람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수행자들에게 다가갔다.
-쿠쿵!
하지만 그때.
피난처가 크게 흔들리고.
박상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애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행자들은 실소를 흘렸고, 얼굴이 붉어진 박상호를 잡아끌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부축해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박상호는 이들에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훈씨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아뇨, 회장님께선 한국에 안 계십니다.”
“네?”
“이번에 웨이브에서 한국 전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다른 나라들을 돕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천공성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그, 그럼 절 어디도 데려가는 겁니까?”
수행자들은 말없이 웃기만 했고 박상호는 점점 겁을 먹었다.
그때, 박상호의 몸이 허공으로 1m 정도 떠올랐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콘크리트를 떡칠해 좁아진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박상호는 맥없이 끌려갔다.
수행자들이 마음먹고 달리니 자동차에 타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몇 개의 역을 지났을까.
이들은 한산한 역에 도착했다.
[신용산역]
지금까지 지나온 역과 달리 그곳은 피난민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피난 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인지 각종 사무집기와 통신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몇 안 되는 군인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그 속에서 홀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것처럼 얌전히 차를 마시고 있던 여성을 향해 박상호를 끌고 온 수행자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이 여자가 연맹의 부회장?’
덕분에 박상호도 얼떨결에 인사를 건네고는 고개를 들었다.
연예인만큼 예쁜 여성이 탐색하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싸늘한 분위기는 굉장히 콧대 높고 도도해 보였다.
“순회 중이던 역에서 발견해 데려왔습니다. 전에 회장님 이름 팔고 다니는 사람 있으면 잡아 오라고 하셨잖아요.”
수행자들의 보고에 연맹의 부회장 김선아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사람이?”
“네, ST그룹에서 근무하던 시절 직속 상관이라며 소리치던데요? ‘조지훈 나오라고 해!’ 이런 식으로요.”
마치 고자질을 하듯 재잘거리는 수행자들의 모습은 어딘가 신나 보였다.
반면 보고를 들은 김선아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박상호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곤 급히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잘 데려왔습니다.”
김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행자들에게 돌아가란 듯이 손짓을 했다.
수행자들은 이어질 상황을 기대하며 남아 있고 싶어 했으나.
김선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군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2차 웨이브가 다가오면서, 회장님의 이름을 팔아대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죠.”
“네?”
“그래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랍니다.”
그러면서 김선아는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자제품의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얻은 검은 마석 덕에 전자장비 한두 개 정도는 갖고 있었다.
아직 통신망이 살아난 건 아니지만, 스마트폰은 카메라와 동영상, 자료저장 등 사용처가 많은 만큼 수행자들이 모두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보는 건지 신경이 쓰였지만, 뒤에서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또 다른 남성들의 모습에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김선아는 그런 박상호를 향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박상호 씨군요.”
그곳엔 박상호의 사진과 함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순간 그는 자신의 정보가 왜 바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선아는 그런 박상호의 의문에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블랙 리스트거든요.”
“네?”
“회장님을 괴롭혔던 불합리한 존재들의 기록이죠. 대격변 이전에 국정원을 통해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해 놨는데, 요즘 따라 쓸 일이 많습니다.”
박상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눈빛에서 진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시켰습니까? 블랙리스트 사람들을 찾아 복수하라고?”
“그럴 리가요. 회장님께선 그리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아마 당신따윈 오래전에 잊었을 테죠.”
그럼 본인이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나서서 이러냐는 듯한 박상호의 눈빛에 김선아는 진득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회장님의 뒤에 서는 것이 허락된 그 순간부터 스스로 정한 게 있습니다.”
“…….”
박상호는 도망치려 했으나, 뒤를 막아선 거구의 남성들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회장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벌레들을 쳐내기로요.”
그러면서 김선아가 턱짓을 하자, 남성들이 박상호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자, 잠깐! 돌아갈게요! 피난처로 돌아가서 얌전히 있겠습니다.”
사람의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마치 금속 구속 구에 포박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김선아는 혀를 차며 태연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박상호를 붙잡고 있던 베르트 대공국의 기사들이 으슥한 곳으로 사라졌다.
아직 이 나라엔 법이란 것이 존재하지만, 김선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행자 연맹이 대한민국 정부보다 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2번째 몬스터 웨이브.
스타트 난이도는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오늘을 대비해 왔던 만큼 희생도 급격히 줄어들어 안정적으로 삶의 터전을 지켜내고 있었다.
나는 바쁘게 사람들이 오가는 천공성의 텔레포트 광장 본부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내 옆으로는 언제든지 텔레포트로 날아갈 수 있게 청아와 연아가, 맞은편에는 연맹의 검은색 제복과 묘하게 매치가 되는 백색 제복의 사람들이 이브릴과 함께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많은 대마법사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 든든해지는군요.”
이번 웨이브를 대비하여 엘븐하임에서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대마법사 5명에 소드마스터 5명, 대정령사 5명이란 엄청난 자원을 말이다.
소드마스터와 대정령사는 텔레포트 마법을 가진 마법사보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만큼, 국가를 지정해 그곳에 수행자들과 함께 고정으로 배치했다.
대마법사들은 나와 함께 언제든 지원을 갈 수 있게 대기 중이었으며, 성녀인 봉봉이와 수호자들은 한국에 남겨놓은 상태다.
지난번에 마스터 수준의 무력을 지닌 존재가 나 혼자였다면, 이번엔 무려 22명에 달했다.
이 정도면 칼바도스 제국이나 위스워드 제국을 정면에서 쳐들어가도 될 만한 막강한 전력이었다.
“여왕폐하께서 아르지움 선물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죠.”
“다행이군요.”
이번 일로 엘프들에게도 뇌물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워프도 그러더니, 종족의 특성에 맞는 선물을 주면 아무리 신화종이라 해도 안 받고는 못 배기는 모양이다.
처음 계획했던 지원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애초에 예상했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그렇게 나는 이브릴을 비롯한 엘븐하임의 초인들과 차를 마시며 안면을 익혔다.
그러나 여유도 잠깐.
우리가 나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악마종이 출현했습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나타나자마자 위와 같이 소리치는 중국인의 모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악마종에게 작위가 있던가요?”
“네, 남작위를 가진 악마였습니다.”
보통 악마들은 고유의 아공간을 지니고 있는 만큼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남작위가 아닌 자작위 악마종의 등장을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퀘스트 발생]
등급: 최상
내용: 이블랜드에서 자작위를 가진 악마종 퇴치
보상: 선택형 최상급 보상카드, 최상급 보상카드 2장, 강화 보주 5개
요즘은 하나 깨기가 너무 힘든 퀘스트.
이블랜드에 쳐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지구로 넘어오는 악마종을 처치해야만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이브릴이 마법사 두 명에 지시했다.
“상하이라면 대전사 데이브가 파견 가 있을 겁니다. 두 분이 지원을 가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엘프 대마법사 2명이 자리를 비웠다.
이후로도 작위를 가진 악마종이 꾸준히 등장했다.
“런던에 남작위의 악마종이!”
“브라질리아에 남작위의 악마…….”
일반적인 난이도는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작위를 가진 악마종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2회차보다 까다로워졌다는 것을 뜻했다.
만약 1차 때 작위를 가진 악마종이 이렇게 등장했다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다.
남작위 악마종의 무력은 마스터와 하이마스터 중간 정도.
1차 웨이브 당시 이런 존재를 막을 수 있는 전력은 지구에서 나밖에 없었다.
지원을 온 엘프 대마법사 모두와 연아까지 자리를 비우고 나와 청아, 이브릴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내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들려왔다.
“시드니에 자작위를 가진 악마종이 등장했습니다. 지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으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호소의 장이 되어버린 듯한 천공성의 텔레포트 광장에 자리를 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드릴까요?”
이브릴의 물음에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청아만 데려가도록 하죠.”
8서클의 마법사라면 단독으로 남작위의 악마종을 격퇴할 수 있으며, 자작위의 악마종도 상대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나를 따라나서는 것은 인력 낭비였다.
나는 얼른 시드니의 텔레포트 게이트 주소를 떠올리며 청아와 함께 공간도약을 했다.
‘이번 웨이브에서 백작위 악마종까지 처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작위 다음은 백작위 악마종이 나올게 뻔하다.
이번에 이브릴도 있겠다, 깰 수 있는 퀘스트를 최대한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왕이면 3대악인 브람기슈와 싸우게 될 때 관련 퀘스트를 받은 상태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아무리 빨리 강해진다고 해도 1년 만에 3대악과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긴 힘들 것 같지만 말이다.
“연맹 회장이다!”
주변이 바뀌면서 회색의 풍경이 나와 청아를 반겨 주었다.
그곳은 호주 군사령부의 지하 벙커였다.
지금은 호주 총리도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내가 등장하자마자 고위 인사들이 달려왔다.
“빠른 지원 감사합니다.”
“악마종은요?”
반가움이 가득 담긴 그들의 인사에도 나는 바로 적을 찾았다.
한국을 제외한 10개 국가에 엘프 대정령사와 소드마스터가 배치되었지만, 애석하게도 호주는 그 10개 국가 속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호주에 있는 악마종은 아무런 방해 없이 날뛰고 있을 것이다.
“이곳 벙커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시드니 천문대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청아와 함께 좌표를 수정해 다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콰아아앙!
회색의 벙커에서 항구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장소로 배경이 바뀌고 등장과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우리를 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