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6화
90. 2차 웨이브(1)
[웨이브 발생까지 남은 시간–43:03]
수행자라면 이 문자를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다.
마치 게임처럼 시야 하단에 이런 메시지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힘을 보태주시겠죠?”
동맹이 좋은 게 뭐겠는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란 것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동맹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물론이죠.”
그녀는 간 보는 것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엘프들이 어느 수준의 도움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8서클 마법사인 이브릴이 나서는 것만으로 전력이 크게 확대된다.
지난번보다 더욱 수월하게 웨이브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온전한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었고, 대마법사 세팅을 갖춘 마리오네트 또한 둘이나 있다.
더불어 성녀와 마스터급의 수호자와 ‘매스 텔레포트’가 가능한 8서클의 마법사까지 도움을 주니, 더욱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 웨이브는 한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바쁘게 오갈 생각이다.
중앙아시아와 중미에 천공성을 배치시켜 놨는데, 그곳에 국제 연락소를 설치하여, 도움이 필요한 국가의 우선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이젠 웬만한 주요 국가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모두 설치돼서 빠른 정보 교환이 가능했다.
참고로 한국에는 연맹의 지하 벙커 외에 청와대와 대구에도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굳이 청와대에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한 이유는 외부인이 연맹 지하벙커를 들락날락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전폭적인 지원을 예고하는 듯한 모습.
나는 이브릴의 의미심장한 반응에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며칠 동안 그녀와 함께하며 느낀 건데, 엘프들은 결코 허튼말을 하지 않았다.
의외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상당히 하는데, 이브릴의 이야기에 한 번도 진실의 눈이 반응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엘프들을 꽤나 신뢰하고 있었다.
“수행자들의 부담을 덜겠군요.”
“그래서 도와드리는 거죠. 우린 지구인들을 돕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분들을 위해 나서는 거니까요.”
결과적으론 그게 그거지만, 그들은 결코 인간을 위해서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 오셨군요!”
나는 이브릴, 연아, 청아와 함께 비밀 상점을 방문했다.
혹시 웨이브에서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볼 겸, 이브릴에게 지구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브릴은 천사가 종업원으로 일하는 가게를 보며 기겁했다.
“어째서 천사가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저야 모르죠. 가이아 님이 괴짜이신 거 아닙니까?”
나는 괴짜라기보다 싸이코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브릴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천사는 엘리시아를 자주 보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내 반응에 이브릴은 전혀 입장이 다르다며 미간을 좁혔다.
“지훈 님의 품에서 자라 격이 상승한 천사와 가이아님에 의해 만들어진 천사는 전혀 다르죠.”
“만들어진 천사?”
내 물음에 이브릴은 뭔가 설명을 덧붙이더라가 귀여운 천사 점원이 시선이 향하자 입을 꾹 닫았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이브릴의 분위기를 보면 지금 천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편이 나을 것 같다.
“비밀 상점에서 구매한 물건은 뮤대륙에서도 사용 가능합니까?”
“네, 물론이죠! 하지만 뮤대륙에 존재하지 않는 물품은 소유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항상 그랬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브릴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고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이브릴이 지구에 머물며 공학서를 많이 봐왔던 만큼 전자제품의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자제품 대신 뮤대륙에서도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뭐죠?”
그러다가 이브릴의 시선이 한참 동안 머물러 있는 금속에 향했다.
[아르지움 1kg 주괴 – 검은 마석 1,000개]
미스릴 1kg 주괴가 검은 마석 100개에 거래되던 것을 생각하면 10배나 비싼 금속이긴 한데, 설명이 너무 애매해서 구매조차 고려하지 않던 것이다.
-뮤대륙 극지에서 희소하게 발견되는 금속.
강도와 마력전달 능력은 미스릴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탄성이 매우 강하다.
여기서 말하는 탄성은 탄소를 말하는 것이 아닌 휘거나 튕기는 탄성을 뜻했다.
금속에 탄성이라니,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격이 가격인 만큼,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비밀 상점에는 영문 모를 금속 외에도 구매할 게 많았다.
“이, 이건 스펠보우를 만들 때 쓰이는 아주 귀한 금속입니다. 하이랜드에서도 매우 구하기 힘들고 귀하게 여겨지는 금속이죠. 엘븐하임에서의 가치는 미스릴의 열 배 수준이 아닙니다.”
금속으로 활을 만든다.
일반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탄성이 강한 금속이 있다면 모르는 일이다.
“이건 뮤대륙에 존재하는 금속이니,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는 거죠?”
천사는 언제나처럼 영업적인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맹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대신 웨이브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러면서 나는 그녀에게 30kg에 달하는 아르지움괴를 구매해 건넸다.
“괜찮겠습니까?”
그녀의 조심스런 반응에 나는 문제 될 것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에겐 정말 귀한 금속인 듯 이브릴은 깍듯하게 선물을 받았다.
“뭐, 어차피 이브릴님이 사냥을 다녀도 금방 모을 수 있을 텐데요.”
8서클의 마법사가 광역 마법 난사하고 다니면 검은 마석 3만 개 정돈 며칠이면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해서 검은 마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 물론 뮤대륙 수행자는 제외하고요.”
“그래요?”
그런데 이어진 천사의 보조 설명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즉, 내 선물의 가치는 격하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차원의 틈으로 출퇴근을 하는 만큼, 굳이 수행자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거 봐서 이브릴에게도 지정권을 사용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무역을 해도 되겠는데.’
아르지움같은 금속은 보물이라 칭할 정도니, 필히 비쌀 것이다.
그것을 엘븐하임에 팔면 상당한 소득이 발생하지 않을까?
‘아니지.’
하지만 당장 검은 마석을 뮤대륙의 돈으로 바꾸는 것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마석으로 지구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으니.
나는 연이은 이브릴의 인사에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비밀 상점을 살피는데, 이브릴이 의외의 사실을 집어주었다.
“차라리 엘븐하임에 아르지움을 선물한 것처럼, 다른 물건으로 지원군을 고용하는 게 어떨까요?”
지원군이란 말에 나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그래요 저깄는 식재료 중에 타르가 고기라는 거 보이십니까?”
“네.”
“타르가는 하이랜드의 고유종인 네 발 달린 새를 뜻하는데, 수인족에겐 더없이 귀한 식재료죠. 지금 하이랜드에선 타르가의 개체 수가 급감하여, 쉽게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타르가의 고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수인족들은 어김없이 힘을 보태겠죠.”
비밀 상점의 물건으로 하이랜드에서 용병 일을 할 이종족들을 고용하란 뜻.
가능하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용병 고용에 사용한 검은 마석은 나라에서 갚도록 하면 되니까.
“좋은 생각이네요.”
방어시설을 보강하거나,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 등, 반전을 위한 아이템은 없었다.
하지만 검은 마석과 비밀 상점의 적절한 사용법을 발견한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진짜 그녀의 말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더욱 안전하게 웨이브를 방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 *
-쾅!
“제길, 또 왔어.”
왕십리역 지하에 몸을 움크리고 있던 시민들은 귀를 막으며 몸을 떨었다.
서울은 성녀의 탄생과 함께 성역이 선포되면서 도심 한가운데서 몬스터를 볼일이 더는 없었다.
하지만 안전구역은 웨이브가 발생하게 되면 제 기능을 못 한다.
그래서 지하철을 벗어나 한동안 태양을 보며 살던 시민들은 다시 곳곳의 피난처로 이동해야 했다.
정부에선 이번 웨이브가 끝나면 서울 재건 사업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는데, 그건 살아남고 난 다음의 이야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난처들이 지난 웨이브를 겪으며 대폭 보강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스웜이 지하철 역사의 철로를 뚫고 기어 나오지 못하게 금속과 콘크리트로 보강했으며, 벽면도 대폭 보강하며 지하철역들은 방공호나 다름없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시민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진 땀의 결과였지만, 견실해 보이는 방어시설도 막상 웨이브가 발생하니, 여지없이 흔들렸다.
서울 시민들도 매일 무료로 배포되는 신문으로 대충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높은 군인 밀집도와 수행자들의 활약 덕에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의 웨이브로 멸망한 국가가 무려 80여 개에 달했으며, 추정 사상자가 20억에 달한다는 것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정부에선 국내 사망자 100만 명이라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권은 수행자들 덕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지방 도시들은 자기들끼리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더구나 몇몇 도시들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는데 결코 사망자가 100만 명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전 ST그룹 소속으로 지훈의 직장 상사였다가 어느 날 원인도 모른 채 회사에서 쫓겨나야 했던 박상호는 자신의 부인을 부둥켜안은 채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소리를 내질렀다.
“거참! 불안하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소!”
결국 옆자리에 있던 거구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남자가 돼서 가족을 지켜주지 못할망정 애처럼 굴다니. 옆에 있는 부인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그러나 박상호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이 인간이 진짜.”
남성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박상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박상호의 부인은 남편이 맞기 일보 직전의 상황임에도 지친 표정으로 고개만 내저었다.
“거기! 뭐하는 겁니까!”
“쯧!”
하지만 군인이 나타나 소리치자 결국 남성은 혀를 차며 박상호를 밀쳤다.
그에 엉덩방아를 찧은 박상호가 군인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 그래. 조지훈! 조지훈 나오라 해!”
조지훈.
그 세 글자의 이름이 갖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소문에 의하면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수행자 연맹의 회장이라는데, 조지훈이 바로 수행자 연맹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에서 지훈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찌질하게 구석에서 소리나 내지르던 남성의 입에서 조지훈이란 이름이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 ST그룹에서 일할 때 조지훈 직속 상사였어! 조지훈한테 나 좀 데려가 달라고 전해!”
머리론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진짜일까?’란 의심이 들 만한 외침.
덕분에 박상호를 대동댕이 쳤던 남성이 흠칫 놀라고, 군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뭐해! 전하라니까!”
박상호의 외침에 군인이 그렇게 하겠다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름만 팔아도 그 상대가 지훈의 지인이라면 무시할 수 없었다.
“괜찮겠어?”
부인의 물음에 박상호는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는 못 살아.”
“하지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며?”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사람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무릎 꿇고 빌면 무시하기 힘들어.”
“그건, 그렇지만.”
“자존심 따윈 필요 없어.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겨달라고 구걸해야지.”
그런데 그때였다.
방금 박상호의 말에 따라 자리를 떠났던 군인들이 검은 제복 차림의 사람들을 데려온 것이.
“저 남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제복은 바로 수행자 연맹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훈이 이렇게 빨리 나타날 리가 없다.
당연히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수행자들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자 박상호 또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