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5화
89. 하이랜드의 신화종(2)
“성녀요?”
이브릴이 차원의 틈을 조사하면서 지구에 대한 조사까지 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봉봉이의 정보는 쉽게 얻을 수가 없으니 성녀에 대해 알고 있을 턱이 없다.
지난번 4회차 수행자의 몸을 차지했던 정신체 악마가 지구에는 신성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구에 오기 전부터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 대략적인 정보는 갖고 있던 것이다.
그 정보는 정확하지 않아 결국 지구 성직자들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지만, 만약 녀석이 상황을 조금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나를 잘 알았다면 그리 쉽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
이브릴도 그 악마처럼 지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듯하지만, 아주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네, 아직 성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던 존재가 성녀가 되면 능력치가 더욱 높을 거라고 대천사가 말했다.
개인적으로 평민 출신인 뮤대륙의 아리엘 성녀에게 봉봉이가 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험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있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수였던 봉봉이는 성녀가 되면서 천사로 진화하지 않았던가.
그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얼굴이 환해지는 이브릴의 모습에 나는 낙관적으로 말했다.
“성녀 두 명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3대 악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이랜드 전력에 성녀 두 명이 더해진다면 무리 없이 3대 악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내 물음에 이브릴은 손으로 스윽 자신의 뺨을 훑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능성은 높을 겁니다.”
시원치 않은 대답.
바로 ‘그렇다’라고 답을 할 줄 알았기에 나를 비롯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던 김선아와 히로시가 의아함을 표했다.
“예전에 3대악이 4대악이라 불리던 시절. 동쪽의 왕이 미드랜드에 침공했다가 당시 가이아 교단의 성녀께서 소환한 대천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더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 아닌가요?”
친하게 지내는 드워프 장로 쿠루스는 엘프들을 가리켜 앞뒤 꽉 막힌 꼰대들이라 표현했다.
그런데 이브릴은 들었던 것과 달리 유연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심각한 우리의 표정에 죄송하다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내가 알지 못한 동쪽의 왕 침공 사건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 전쟁에서 4대 악의 일각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 하이랜드의 에이션트 드래곤인 나탈님의 개입이었습니다.”
하이랜드의 개입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럼 그때 고룡과 대천사가 힘을 합쳐서 동쪽의 왕을 물리쳤단 말인가요?”
“함께 힘을 합쳐 싸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쪽의 왕이 대천사를 소환한 성녀와 싸울 때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거죠. 그때 전투로 나탈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이랜드에 드래곤이 단 한 개체밖에 남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나탈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성녀와 대천사가 패하고 말았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지금까지 대천사, 드래곤, 3대 악이 같은 등급의 초월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3대악이 대천사나 드래곤보다 한 단계 강하다는 뜻 같지 않은가?
3대 악의 속성이 ‘마’, 대천사의 속성은 ‘성’, 드래곤의 속성이 ‘자연’인 것을 따지고 봤을 때.
당연히 상성에 따라 먹고 먹히는 가위바위보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천사가 상성 상 우위를 갖고도 상태가 좋지 않은 동쪽의 왕에게 어렵게 이겼다면, 절대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브람기슈가 그 동쪽의 왕과 비슷한 수준인가요?”
“애석하게도 브람기슈를 조금 더 위로 평가할 수밖에 없겠군요. 브람기슈는 대인 전투 능력에 특화된 데스나이트 형태거든요.”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그때서야 이브릴이 또 다른 성녀의 등장에 기뻐하면서도 쉽게 안심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식이면 악마종들이 바다를 건너갈 필요도 없잖아요? 성녀가 하이랜드를 지원하는 것을 염두에 뒀을 것 같은데요.”
“지난 이블랜드와의 전쟁으로 미드랜드 곳곳에 많은 성지가 생겼거든요. 브람기슈도 그걸 알기에 태연히 미드랜드를 향해 발을 내딛지 않는 겁니다.”
좋은 말을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계속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위기심을 심어주는 모습이 어처구니없다.
전혀 생각지 못한 화법이었다.
“그래도 절대 불리하지 않습니다. 우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뒤늦게 두 주먹을 불끈 말아쥐어 봤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의 성녀께선 문제없이 차원 이동이 가능하시겠죠?”
또다시 이어진 그녀의 걱정.
그런데 차원의 틈을 수행자가 이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연아야, 엘리시아(봉봉이) 데려와.”
“알겠습니다.”
결국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구의 성녀를 스코틀랜드로 불러들였다.
차원의 틈이 확인된 순간 청아가 이곳 성터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했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참, 두 세계 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합니까?”
우리 수행자들은 지구에서 하루를 머물고 뮤대륙에선 5일을 머문다.
만약 실시간으로 두 세계를 들락날락할 수 있다면 다시 시간적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 무슨 말씀 하는지 알았습니다. 시간은 상당히 뒤죽박죽이더군요. 어느 땐 거의 비슷하거나 뮤대륙이 느리게 흘러가고 어느 시간을 기준으론 며칠이 지나 있곤 합니다.”
어느 정도 두 세계의 시간 차가 적용되고 있다는 뜻일까?
어느 시간을 기준으로 며칠이 지나 있다는 것은 우리가 2시간의 꿈으로 뮤대륙에서 5일을 보내고 있을 때를 뜻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차원의 틈이 사용 불가능한 때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지구에서 잠자고 있을 때는 뮤대륙의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가 지구에서 활동하는 시간에는 뮤대륙의 시간이 매우 더디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두 세계의 시간 차이를 고려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차는 차원의 틈으로만 관리를 하면 되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아빠!”
그때 봉봉이가 늑대 두 마리를 이끌고 연아와 함께 나타났다.
이브릴은 그런 봉봉이와 늑대들을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는데.
“처, 천사가 아닙니까?”
그런 게 느껴지나?
나도 대마법사가 되면서 기운에 굉장히 예민해졌기 때문에 봉봉이가 지닌, 신성력의 거대함이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천사란 사실을 알아볼 순 없었는데, 이브릴은 바로 알아봤다.
“그리고 다이어울프에서 왜 신성력이······.”
“소개하죠, 이쪽이 지구의 성녀인 엘리시아. 그 두 다이어울프가 엘리시아의 수호자입니다.”
내 소개에 이브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표정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아마 그녀가 말하는 설명이란 성녀가 왜 천사가 되었는지, 왜 다이어 울프를 수호자로 삼았는지를 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고위 수행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굳이 이를 감추지 않았다.
이브릴은 성녀를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지정권을 내 사역마로 등록된 신수 봉봉이에게 사용했다는 부분에서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고 봉봉이에게 수호자를 편하게 지정하도록 뒀더니, 또 다른 사역마였던 다이어울프를 수호자로 만들어 부분에서 황당함을 표했다.
“과연 그래서 지구의 성녀님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투입이 가능하단 식으로 단정하신 거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변화.
모든 이야기를 마친 나를 향해 이브릴은 말이 안 나온단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이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상식을 파괴하는 분이셨군요.”
“스스로는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우린 봉봉이의 차원이동이 가능한지를 살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봉봉이는 문제없이 차원이동을 할 수 있단 사실을 확인하곤 다 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했습니다.”
모든 장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브릴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한동안 전하와 동행을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의외의 선언.
주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 되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루 몇 시간,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허락하죠.”
그 이유는 엘븐하임의 제2 마법사장인 이브릴이 8서클의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미드랜드에 8서클의 마법사가 단 한 명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이건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8서클 마법사가 누굴 가르친다는 것은 가볍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이브릴은 선뜻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오히려 감사한 건 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함께 싸워야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이해가 일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브릴과 악수를 나눴고, 이로써 우리의 동맹이 결정되었다.
* * *
브람기슈란 거대한 적과 싸울 수밖에 없게 되면서 나는 더욱 스스로의 단련에 열을 올렸다.
이브릴은 그런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마법수련을 도와주었다.
김선아는 그녀를 보며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인 건 아닌지 긴장했지만, 나와 이브릴은 친근하게 행동해도 서로에게 전혀 사심이 없었다.
내가 이런 성격을 가진 덕분에 이브릴이 부담 없이 나를 대하는 거지, 사심을 갖고 그녀를 대했다면 이브릴의 대응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 정도로 완성된 마검사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왠지 수명이 긴 엘프라면 마검사도 많을 것 같은데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령검사는 있어도, 마검사는 거의 없거든요. 당장 지훈 님의 전투 능력이라면 우리 엘븐하임에서도 20위 안에 들 겁니다.”
미드랜드에선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라 생각하는데.
엘븐하임에서의 평가는 꽤나 짰다.
물론, 엘븐하임에는 전설의 9서클 마법사, 그랜드마스터, 정령왕의 계약자도 있다고 하니, 미드랜드와는 격이 달랐다.
사실 이러한 경지 차이는 애초에 종으로서의 격이 인간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1천 년이란 긴 수명이 한몫한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엘프를 하이랜드의 신화종 중에서 드래곤 다음 서열에 놓는 것이었다.
드워프도 장수종이긴 하나 수명은 엘프의 절반 수준이고, 전투에 특화된 수인족은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뮤대륙의 엘프래.”
“부인들은 따로 있다던데.”
“완전 주인공 포지션이네, 혼자 살판났구만.”
연아와 청아처럼 이브릴이 뒤를 따라 다니니, 피난처를 돌아다니면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아무래도 요즘 살만해진 모양이다.
내게 관심이 많아진 것을 보면 말이다.
“이곳 인간들은 특히 남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는군요.”
“그게 한국인들의 특징이기도 하죠.”
“불편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선에 익숙해져서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다.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내가 슬쩍 시선만 주어도······.
“헙!”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치니까.
아직 평화로운 시대의 버릇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따끔하게 혼을 내는 게 났지 않겠습니까?”
이브릴의 조언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일일이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혼을 내지 않아도 그들은 혼이 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지훈 님의 눈치를 보는 군인들이 알아서 정리한다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고, 곧 몬스터 웨이브거든요.”
한 달에 한 번.
세계는 인간을 따끔하게 혼을 내는데, 그때가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