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4화
89. 하이랜드의 신화종(2)
무엇보다 엘프는 인간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드워프들에게 들었다.
그런 엘프들이 인간의 나라에 친선 대사로 찾아왔다?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나는 회의를 파하고 왕좌가 있는 대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띄는 흰색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공왕성 대전에 들어섰다.
모델 체형의 남녀 5명.
엘프라 하면 아무래도 자연 친화적인 복장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해서 무채색의 로브를 쓰고 오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그들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세력의 친선 대사답게 화려하기 그지없는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로브는 앞섬을 풀자 망토처럼 어깨에 걸친 모양새가 되었다.
수행자 연맹의 제복과 비슷한 분위기의 흰색 복장.
미스릴 실로 짠 듯 연푸른빛이 도는 은색의 자수가 용도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는데, 해당 마법진이 왼쪽 가슴에 국기처럼 자리했다.
치마 없이 모두가 바지 차림.
그러나 전체적으로 의상이 타이트해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상당한 색기가 흘렀다.
‘남자들 복장은 좀 펑퍼짐했으면 좋겠는데.’
남자의 몸매를 감상하는 취미가 없는지라 내 시선은 자연히 여성 엘프들에게 고정이 되었다.
“과연 미의 종족이라 할만하군요. 신의 은총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 어린 감상이었다.
연두색, 레몬색, 하늘색, 화려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머리카락에 외모는 모두가 청아, 연아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내 인사말에 다섯 명의 엘프들이 예의 바르게 한쪽 무릎을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귀족들이 왕에게 올리는 미드랜드식의 인사였다.
“신의 선택을 받은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엘븐하임의 제2 마법사장인 ‘이브릴 바넷’이라 합니다.”
비단 같은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천사 같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네왔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정신 줄을 놓을만한 아득한 미모였지만…….
나는 여성의 미모에 흔들릴 정도로 순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연아와 청아로 인해 미모에 단련된 것도 있지만 말이다.
그녀의 미모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지만,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그에 이브릴이란 이름의 여성 엘프의 눈빛에 호감 깃들었다.
인간을 싫어한다는 특성을 가진 것치곤 의외로 호의적이지 않은가.
“베르트 대공국의 공왕인 지훈 조 이엘 베르트입니다.”
“급한 방문임에도 이리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 간 볼 필요는 없죠. 전 단도직입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내 말은 길게 사설을 달 필요가 없다는 뜻.
그에 이브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은 수행자들의 리더인 공왕 전하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요즘 따라 부탁이 많이 들어오네.
아무리 영향력이 커졌다고 해도 상대에 따라 부탁이란 단어는 무섭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상대가 엘프라면 더더욱 말이다.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동맹 말입니까?”
생각보다 건전한 내용.
그런데 갑자기 우리와 동맹이라니,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인다.
“네, 수행자 여러분과 엘븐하임간의 동맹 말입니다.”
“베르트 대공국이 아닌, 수행자 연맹과의 동맹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동맹이라면 연맹보다 국가와 맺는 것이 더 나을 텐데요? 아직 수행자들의 힘은 여러모로 미숙합니다.”
더구나 동맹을 맺는다고 해도 라인 산맥에 가로막힌 하이랜드와의 교류가 쉬울 리 없었다.
“죄송하지만, 엘프들은 정서상 인간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아서. 국가 간의 동맹은 고려치 않고 있습니다.”
“수행자도 인간입니다만?”
그러나 이어진 이브릴의 말은 역시 엘프란 종족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과장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행자 여러분은 신의 선택을 받은 전혀 다른 법칙 속에 살아가는 새로운 종족이죠. 인간과 별개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엄연히 인간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엘프가 인간의 어떤 점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싫다면 수행자도 싫어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더불어 대마법사와 대정령사, 소드마스터가 넘쳐나는 엘븐하임에서 관심을 가질 정도로 수행자는 강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약하더라도 수행자들은 추후 뮤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힘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하이랜드의 특성을 생각하면 국가 간의 동맹은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규모 교역의 제약이 크니까.
대충 용건을 알게 되었으니,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이유를 알아야 답을 할 것 아닌가.
“갑자기 동맹을 청한 이유가 뭐죠?”
내 물음에 이브릴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남쪽의 왕 브람기슈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드랜드를 거치지 않고 바다를 건너 하이랜드로 쳐들어올 생각입니다.”
남쪽의 왕 브람기슈는 이블랜드의 3대 악 중 1인으로 나와 연이 없는 존재였다.
3대 악 중 하나인 북쪽의 라그나 베일은 카카오섬에서 직접 목격을 했고, 서쪽의 왕 그라디스의 경우 그의 휘하에 있는 남작 작위 귀족을 둘이나 처리했었다.
“그게 가능해요?”
지구가 둥근 것처럼 이블랜드에서 남서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하이랜드 북동부와 이어진다.
그런데 이블랜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다를 건너 하이랜드를 공격한 적이 없었다.
물론, 육로상 거리보다 4배는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교단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감수할 수 있는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악마들이 굳이 바다를 건너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육로로밖에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이 뮤대륙 보호를 위해 악마종에게 걸어놓은 일종의 저주였다.
“아무래도 제약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브람기슈가 파훼법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고요.”
“음…….”
3대 악이 강하고 위험하단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3대 악이 싸그리 몰려오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마리니, 하이랜드의 힘이면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하이랜드엔 신화종의 정점인 드래곤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드래곤들에 엘븐하임과 같은 강한 종족이 힘을 더한다면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이야기가 나오자 엘프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브릴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이제 단 1개체만 남아 있습니다. 그 마지막 드래곤도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고요.”
“…….”
드래곤의 멸종이라니, 그럼 파워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닌가.
물론 드래곤이 없다고 해도 미드랜드에선 라인산맥 너머의 하이랜드를 넘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하이랜드에 상성이 좋은 이블랜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3대 악 중 하나만 나서도 하이랜드는 쑥대밭이 될 테니까.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 9클래스의 대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마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저보다 성녀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싫어도 패망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물론, 여의치 않으면 성녀에게도 도움을 청할 겁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성녀에겐 악감정이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행자가 나설 틈은 없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브람기슈가 당장 쳐들어오는 건 아닙니다. 아마 마지막 드래곤께서 임종하신 다음에야 쳐들어올 겁니다. 아직 1년 정도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1년이라면 1회차 수행자 중에 마스터나 대마법사가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악마종의 군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마음 같아선 도와드리고 싶지만, 대참사가 일어날 게 뻔한 상황이라 선뜻 나설 수가 없군요.”
보상도 수행자로서의 힘을 보존하고 있어야 쓸모가 있지, 죽어서 낙오자가 된다면 말짱 꽝이 아닌가.
그리고 수행자들의 리더로서 동료들에게 위험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브릴은 내 대답을 예상했는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공왕전하께선 나서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수행자들도 당사자기 때문이죠.”
내가 계속 설명하라며 턱짓을 하자,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이랜드에 지구와 연결된 차원의 틈이 존재합니다.”
“뭐?”
이브릴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히로시와 김선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도 무심코 반말을 내뱉을 정도로 당황했는데, 이브릴은 신경 안 쓴다는 듯 무서운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 차원의 틈을 이용하면 지구로 넘어갈 수 있단 뜻이죠.”
* * *
D-DAY가 닥쳐오길 기다려야 했던 입장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두 세계가 혹시 이어지기라도 하는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었다.
뮤대륙이란 땅 자체가 워낙 변수가 많은 곳이었고,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 보니,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클로이를 비롯한 내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기쁘지만, 생존에 대한 위험도가 높아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몸이 두 개인 수행자들이 같은 세상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예측조차 안 되었다.
‘빌어먹을!’
‘네시’라는 괴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유명해진 스코틀랜드의 네스호.
그런 네스호가 내려다보이는 오래된 성터, 어커트 캐슬 위로 검은색의 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엘프인 이브릴이 떨어졌는데, 그 장면을 지켜본 인물들은 하나같이 손톱을 깨물었다.
“믿어주시겠습니까?”
아직 의심의 여지는 많지만, ‘진실의 눈’은 반응이 없었다.
차원의 틈은 이브릴을 토해낸 후 크기가 축소되었는데,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차원의 틈 주변은 몬스터의 영역으로 이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이런 이변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차원의 틈을 이용하는데 제한 같은 게 있나요?”
“네, 마스터나 7서클 이상의 인물이어야 합니다. 안 그럼 몸이 버티질 못하거든요.”
그럼 고위 악마종에겐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단 소리였다.
나는 허공에 떠서 차원의 틈에 손을 가져갔다.
[수행자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차원이동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인지 사용할 수 없었다.
“차원의 틈을 이용할 때 아공간이 파괴됩니다. 대신 직접 물건을 지니고 이동하는 것은 가능한데, 부피에 제한이 있어서 많은 짐을 한 번에 옮기진 못합니다.”
이브릴은 이미 수차례 실험을 거쳤는지 차원의 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지구와 뮤대륙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이 발생해도 전혀 이상하진 않다.
두 차원이 서로에게 간섭하는 듯한 모습이 몇 번이고 나타났으니.
그녀의 말대로 이것으로 인해 수행자와 지구는 하이랜드의 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애초에 브람기슈의 목적이 이 차원의 틈일 수도 있는 것이고.
조금은 스스로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닥쳐온 위협은 이 정도 능력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거 잘하면 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는데요?”
모두가 걱정에 빠져 있을 때 이어진 김선아의 이야기.
그녀의 말은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도 희망적이어서 모두가 의아해했다.
“악마종은 신성력에 약하잖아요. 그 브람기슈라는 3대 악은 지구에도 성녀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
그녀의 생각을 납득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즉, 차원의 틈을 잘만 이용하면 두 명의 성녀가 힘을 합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