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92화
88. 비밀상점(2)
너무 자연스러운 천사의 접근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상점 내부에는 수행자와 능력자들이 상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물건 구매에 필요한 검은 마석의 보유량을 파악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상품들의 가격을 살폈다.
[A플 맥북 프로 레티나 2020-검은 마석 20개]
[S성 갤럭시 노트 11-검은 마석 10개]
검은 마석은 몬스터를 사냥하면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다.
즉, 게임으로 비유하면 드랍률이 있다는 뜻인데, 오크를 열 마리 잡아야 하나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강한 몬스터일수록 드랍률이 상승하고 상급 몬스터라면 한 번에 여러 개를 토해낼 수도 있다.
고위 수행자라면 문제없이 이용할 수 있는 가격이지만, 비밀 상점은 수행자뿐 아니라 능력자와 일반인도 사용이 가능한 장소였다.
이런 점을 따지면 물건들의 값이 싸다고만 보긴 힘들다.
“노트북 인터넷은 어떻게 해요? 스마트폰은 바로 전화할 수 있나요?”
인터넷이 안되는 컴퓨터와 전화 기능이 없는 스마트폰처럼 답답한 게 어딨겠는가?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는 장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통신망을 구축하시면 사용 가능합니다. 본 상점에서는 통신망 구축을 위한 장비도 판매하고 있으니 함께 어떤가요? 심지어 통신위성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쓸데없이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살펴본 주요 통신 장비들은.
[올인원 통신 교환기- 검은 마석 30,000개]
[통신위성- 검은 마석 10,000,000개]
값이 살인적이었다.
내가 이번에 파리에 가서 벌어온 검은 마석은 총 4만여 개.
근래 들어 이렇게 미친 듯이 싸운 게 오랜만이었으나, 통신망 구축을 위한 장비는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올인원 통신 교환기는 기존의 통신망을 즉시 사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줍니다. 해당 장비 20대면 대한민국의 유선망을 모두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단락된 회선은 여러분이 직접 복구를 해야 하지만요.”
복잡하지 않은 것은 좋지만, 대한민국 통신망의 복구를 위해선 무려 60만 개의 검은 마석이 필요했다.
“통신위성은 단 한 대만으로도 아시아 전 지역을 커버할 수 있습니다. 이론상 3대의 인공위성이면 지구 전체를 연결할 수 있다고 하죠.”
시대가 시대다 보니, 유선 통신망은 여러모로 유지관리가 어렵다.
차라리 위성이 나을 수도 있지만, 위성의 가격은 천문학적이었다.
검은 마석 천만 개를 어느 세월에 모으는지.
“뭐, 인터넷을 연결한다고 해도 데이터베이스가 없다면 달라지는 건 없지만요. 대신 두 장비 모두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쓸데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조금씩 O반도체를 발전시키며 기초장비를 확충해나가고 있으니, 차라리 현재 운용 대수가 턱없이 부족한 컴퓨터를 대량 공급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판매제품들을 살폈다.
슈퍼컴퓨터에 탱크, 전투기, 유도미사일 같은 첨단병기까지 안 파는 게 없다.
상품 대부분이 현재 지구에서 생산 불가능한 물건들이었으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첨단제품일 뿐, 굉장히 다양한 제품이 존재했다.
[미스릴 1kg 주괴–검은 마석 100개]
[아다만티움 4kg 주괴–검은 마석 150개]
겉으로 보이는 부피는 같지만, 무게가 다른 두 개의 금속처럼 뮤대륙에서만 얻을 수 있는 광물과 그 광물로 만들어진 장비들.
[7클래스 텔레포트 스크롤–검은 마석 500개]
[엘릭서–검은 마석 2,000개]
뮤대륙에서 구입하기 힘들어진 7클래스의 마법 스크롤, 병 타입의 엘릭서같이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물건은 물론이고.
[마력 발리스타–검은 마석 500개]
[골렘–검은 마석 500개]
수행자와 능력자가 없다면 상대하기 힘든 대형 몬스터와의 전투에 도움이 될만한 마법 아티팩트까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능력자와 일반인들도 검은 마석만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수행자 수준의 무장이 가능했다.
상점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상품들을 일상공간에 넓게 펼쳐 놓는다면 종합운동장은 우습게 채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판매 상품을 살피며 느낀 건 사회 재건을 위한 물건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연구용으로 사용할 OS포함 PC세트(검은마석-20개) 500대를 구매했다.
하지만 깡 PC만 있을 뿐, 프로그램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물론, 컴퓨터 소프트웨어들도 마석 1~2개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이 문서프로그램과 게임이었다.
“원하시는 프로그램은 미리 말씀해 주시면, 다음날 바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영업 정신이 투철한 천사의 이야기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OS를 제외한 각 소프트웨어의 시리얼은 5회까지만 사용 가능합니다. 불법 복제는 절대로 하시면 안 돼요.”
쓸데없이 구체적이긴.
고개를 내저은 난 소프트웨어에서 시선을 뗐다.
지금은 프로그래머들도 단순 피난민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을 이용하면 간단한 프로그램 정돈 자체 제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만, 똥값이 된 지금 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용 프로젝터, 오디오 세트(대형 300개, 소형 200개)도 파네. 피난처에 설치해 줄까?’
영화나 만화, 드라마 등의 상영회를 하면 무료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프로젝터 세트를 대형 위주로 50대를 구매했다.
컴퓨터가 있고 영상을 출력할 장비가 있으니, 중간중간 뉴스 소식과 프로파간다 영상을 내보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카메라까지 추가 구매했다.
“역시 회장님이셔. 사회와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시잖아.”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것만 보고 있었는데…….”
“차가운 척하셔도 항상 주변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분이야.”
나야 청아와 연아, 마스터급 다이어 울프 두 마리가 사냥한 몬스터들의 마석까지 갖고 있어서 여유가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대량 구매를 거듭하는 내 모습은 자연히 시선을 끌었고, 예상치 못하게 이미지 관리를 하게 되었다.
칭찬이 심히 오글거렸지만, 나는 애써 안 들리는 척 무시했다.
대량의 장비를 구매하고도 아직 1만 개가 넘는 검은 마석이 남았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추가적으로 필요해질지 알 수 없으니,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위치에서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겁니까?”
내가 적지 않은 검은 마석을 소비해서인지 더욱 살가워진 표정의 천사가 답했다.
“아뇨, 일주일마다 위치가 바뀝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가끔 특수 아이템이 풀리니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과연…….
괜히 비밀 상점이 아니란 건가?
‘앞으로 몬스터 사냥의 열풍이 불겠군.’
아마도 한동안 상업 활동은 비밀 상점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 또 오세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영업력 충만한 천사를 뒤로한 나는 어째 세상이 점점 게임처럼 되어간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예상대로 비밀 상점의 소식이 알려지고 이를 직접 확인한 사람들은 몬스터 사냥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2회차 수행자들은 종일 사냥을 하면 하루 동안 50개 정도의 검은 마석을 얻을 수가 있었으며, 3회차는 20~30개, 4회차는 10개 정도의 마석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가만히 있어도 청아, 연아, 다이어울프들이 마석 2만 개 전후를 벌어왔다.
군대도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군인들을 움직여 몬스터 사냥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피난처 곳곳에 비밀상점에서 구매한 물건이 배치되면서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피난처 중심 광장엔 밤마다 상영회가 열렸으며, 곳곳에 대형 텔레비전이 배치되었다.
덕분에 그동안 우울하기만 하던 분위기 속에 조금씩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문화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전 아이윌 멤버 출신 능력자 ‘주아’ 결혼 전격 발표!]
[프랑스 국민들을 구한 수행자 연맹의 회장 조지훈.]
더불어 바깥소식에 어두운 시민들을 위해 뉴스를 겸한 프로파간다 영상이 흘러나왔는데, 이는 신문을 통한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조지훈 회장, 천공의 성에 연구단지와 공업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 밝혀…….]
천공의 성은 더 이상 꽁꽁 싸맬 필요가 없어졌다.
지난번 청주 때는 시민들에게 철저히 함구를 시켜서 천공의 성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지진 않았지만, 이번 프랑스 사태로 수행자 사이에 완전히 퍼져버렸으니.
천공의 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뿐인지라, 사람들은 그에 대해 관심이 매우 컸다.
혹시라도 안전해 보이는 천공의 성으로 이주할 순 없을까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천공의 성은 거주구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수행자 가족들에게 자리를 내줄 순 있지만, 이는 지금보다 더욱 큰 상대적 박탈감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게 천공성의 사용처가 정해지면서 서울 상공엔 거대한 부유성 두 개가 상시 모습을 드러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작업을 위해 각종 자재와 함께 투입되었다.
“의외로 비밀 상점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PC가 대량 배치된 것만으로도 산업 전반의 레벨이 올라간 느낌이다.
덕분에 사람들의 눈빛 속에 예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희망적인 생각을 경계했다.
“매달 진행되는 웨이브를 잘 막아내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가이아는 결코 선신이 아니다.
물론 그동안 열심히 채찍질을 당한 덕분에 선심 쓰듯 당근을 내려 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겪은 게 워낙 많다 보니 뜬금없이 상황이 좋아지면 그만큼 의심과 걱정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렇죠.”
“이번 웨이브가 지난번처럼 18일에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느슨한 마음을 가져선 안 됩니다.”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천공성을 올려보던 국방부 장관이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이제 내게 줄을 댔다는 것을 감출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활동했다.
나는 딱히 정부의 지휘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뮤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통령이 상황 판단이 되는 사람이라 다행이지, 전 일본 총리처럼 자신의 권력 유지에 목을 맸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 고위층들은 내가 국방부 장관 같은 사람들을 사전에 쳐내길 바라겠지만, 능력자의 등장으로 정부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리면서 굳이 아쉬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우리 한국은 축복을 받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수행자분들이 버티고 있으니까요.”
나는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능력자 협회의 회장인 파이로 키네시스 성우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심하는 순간 골로 갑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수행자 연맹 회장, 능력자 협회 회장.
얼핏 보면 비슷한 위치로 보이지만, 수행자 연맹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조직이며 이들 능력자 협회는 한국에 국한된 세력이었다.
또한 한국의 능력자는 세력이 양분되어 있는 상태인데.
3할이 연맹의 소속이었고, 나머지 7할만이 온전히 능력자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처럼 회장의 직위를 달고 있지만 그는 내게 엉겨 붙을 수가 없는 위치였다.
덕분에 정부를 위해 의욕적으로 우리를 견제하려 했던 협회장 성우식은 그 목적을 접은 상태다.
수행자 연맹은 자신들이 견제할 수 없는 세력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연맹에 굴복한 것은 아니다.
리더가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여전히 정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나와 달리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엔 나 역시 국민들을 끔찍이 위하는 애국자로 보이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역시 그가 말을 걸어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방부 장관은 성우식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 말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었다.
“뭔가요?”
“검은 마석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반드시 이자를 쳐서 갚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