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85
85. 새로운 공지(3)
시엘라가 당황할 법도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녀를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내가 추천한 후보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훈 님의 사역마가 아닙니까?”
이왕 성녀가 탄생한다면 내가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존재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이기적이라 욕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성녀란 최고의 패를 수중에서 놓을 생각이 없으니.
“안 되나요?”
내 은근한 물음에 시엘라는 뭐 이런 인간이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의 대리인인 성녀를 사역마로 삼겠다는 게 좋지 않게 느껴질 만도 했으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천사 시엘라는 마냥 내 제안을 부정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혹시 가이아와 대화를 나누는 걸까?
잠시 후, 시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대충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아챈 나는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알겠습니다. 성녀를 지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이상 지훈 님의 의견을 수용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지.
신이란 존재가 내 성향을 모를 리 없다.
어쩌면 가이아는 모두 예상하였을지도 모르는 일.
시엘라의 시선이 봉봉이에게 향하고 이어서 새하얀 빛이 폭사되었다.
최소한 봉봉이가 대비라도 할 수 있게 예고라도 해주던가 이렇게 바로 진행할지는 몰랐다.
괜히 봉봉이에게 미안해졌지만, 파워업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나쁠 게 없었다.
그나저나 성녀가 되면 봉봉이라 부르기가 조금 그런데…….
처음 식물일 때만 해도 누가 봉봉이가 예쁜 소녀가 되고 성녀가 되리라 생각을 했겠는가.
덕분에 나는 이 순간 자신 없는 작명센스를 발휘해 괜찮은 이름을 떠올렸다.
“호오, 이건?”
그런데 그때 시엘라로부터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의문을 표했는데, 잠시 후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크게 떴다.
[신수 트리아스의 격이 상승합니다.]
[신수 트리아스가 천사로 진화합니다.]
[새로운 천사에게 신명 엘리시아가 내려집니다.]
[소환수의 이름이 봉봉에서 엘리시아로 강제 변경됩니다.]
작명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감사하나,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나는 적응을 못 하고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파워업 정도가 아니라 개체의 종 자체가 바뀌었다.
나는 빛이 가시고 모습을 드러낸 봉봉이를 들어 올리며 여기저기 관찰했다.
“봉봉아, 어디 이상 없어?”
“응, 나 강해짐.”
생김새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살피면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고 느낄 수 있던 머리카락 형태의 나뭇잎이 실크처럼 온전한 머리카락이 되었으며, 등 뒤로 작은 날개 같은 것이 잡혔다.
“기존에 신수로서 갖고 있던 특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식물형 신수가 아니게 되었네요. 그녀는 이제 온전히 피륙으로 이뤄진 천사입니다. 천사는 남성과 관계를 가지면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쉽게 손대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봉봉이는 내게 있어 딸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다.
대체 나를 뭐로 보고.
내가 미간을 좁히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수호자와 성역은 엘리시아와 잘 의논하여 선택하십시오.”
그러면서 시엘라는 허공으로 떠올라 벙커를 관통하며 사라졌다.
바로 뮤대륙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아니다.
역시 다른 목적이 있던 걸까?
“봉봉이는 뭐할 수 있어?”
엘리시아라는 예쁜 이름이 있지만, 봉봉이가 입에 익어서 무심코 튀어나왔다.
그러나 봉봉이는 개의치 않아 했다.
“성녀가 할 수 있는 건 다할 수 있어. 그리고 트리아스의 기술도 전부 쓸 수 있고.”
천사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봉봉이는 일반적인 성녀와도 조금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나로선 대단히 만족스런 상황이었기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일단 서울 중심에 성역을 만들어야지.”
“응.”
* * *
서울 남산에 성역이 만들어졌다.
이제 남산을 중심으로 직경 20㎞ 내는 모두 안전구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역 외곽에 거대한 성벽을 만들어야겠군요.”
가능하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직경이 20㎞인 성역의 둘레는 무려 63㎞에 달한다.
이걸 모두 성벽으로 두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자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일 경우는 더욱.
“쉽진 않겠지만, 시도해 봐야지.”
하지만 힘들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시도는 해보는 것이 맞겠지.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보다 정상들이 내 눈치를 봐서 그리 힘들진 않았어. 오히려 힘든 건 봉봉이지.”
나와 김선아는 수행자 연맹 본부 회장실 책상에 나란히 앉아, 무너진 벽면 너머로 주황빛 하늘을 올려보았다.
사용하지 않은 지 꽤 된 데다가 지난 웨이브로 반파되면서 수행자 연맹 본부는 반쯤 붕괴한 상태.
하지만 이곳엔 건물이 무너진다고 죽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두 마리의 다이어 울프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봉봉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지만 공지는 나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녀의 등장과 관련된 내용은 각국에 빠르게 알려졌고, 텔레포트를 이용할 수 있는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급히 한국으로 날아왔다.
거대한 안전구역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
그곳을 중심으로 인류의 생존과 산업의 재기가 이뤄질 것이 분명한 이상 추후 경쟁력을 생각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서울에 하나를 사용해서 남은 것은 9개였고 모두가 이를 배정받기 위해 열심히 알랑방귀를 뀌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한 국가에 하나밖에 설치할 수 없는 성역은 최종적으로 아시아에 5개, 북미 1개, 남미 1개, 유럽 3개가 배치되었다.
도시는 서울, 상해, 도쿄, 뉴델리, 자카르타, 워싱턴, 브라질리아,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아쉽게도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에는 하나도 배정이 안 됐다.
이번 성역 배정권으로 영국의 총리와 호주 총리가 가장 격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연맹에서 자체적으로 매긴 우선순위는 두 국가가 11번째, 13번째였으니.
대신 내가 7서클이 되면서 텔레포트 게이트의 자체 제작이 가능해진지라, 성역을 배정받지 못한 국가의 수도에 우선적으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아무리 아쉽다고 해도 계속해서 불만을 표했다가 내 눈밖에 나기라도 하면 좋을 것이 없기에 성역이 배치되지 않은 국가 지도자들은 텔레포트 우선 설치로 분을 삼켜야 했다.
수행자 연맹의 회장이자,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대마법사, 또한 성녀까지 수중에 보유하고 있으니, 지금의 내겐 미국 대통령이라 해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성녀는 마스터급 수호자 3명을 만들 수 있는데, 나는 이것을 타국에 배정하지 않았다.
수호자는 말 그대로 성녀를 지키는 존재.
내가 아무리 봉봉이의 주인이라지만 모든 권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경우에 따라선 권리를 대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봉봉이가 다이어 울프인 ‘다다’와 ‘차차’를 마스터급의 수호자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수에서 천사가 되었던 봉봉이의 경우처럼 두 마리의 다이어 울프는 막강한 전투 능력을 지닌 신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마지막 한 명의 수호자는 신중하게 고르고 있는 중이다.
8서클 마법사에게도 비빌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나.
7서클의 대마법사나 다름없는 마이오네트 둘.
천사가 된 성녀와 마스터급 수호자 셋.
아무리 연맹의 회장이라지만 지나치게 나를 중심으로 힘이 집중되어 있다.
초인들의 세계인 뮤대륙에서 이 전력을 고스란히 구사할 수 있다면 제국에도 깝칠 수 있는 전력이다.
물론, 봉봉이를 뮤대륙으로 데려갈 수단이 아직 없지만 말이다.
* * *
현재 각 비상피난처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시장 같은 정치인이나 정부 측 인사가 아닌 군인들이다.
물론 정부에서 파견한 행정관리자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군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군인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정치인, 재벌, 고위공직자들은 힘을 잃고 군권 중심으로 나라가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군인이지, 앉아서 펜대 굴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느 시대든 전쟁이 발생하면 군인들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은 똑같았다.
문제는 목숨을 걸고 싸워도 지금의 군인들에겐 돌아오는 것이 없다 보니, 이상한 보상심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강압적으로 바뀌어갔고, 점점 도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건 서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심해졌는데, 일전에 지훈이 청주에서 마주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군인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빨리 안 하냐?”
-퍽!
“죄, 죄송해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각 피난처에선 보강 공사가 이뤄졌다.
이 보강 공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민들에게 노역을 부여하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는데, 대구 피난처에서 보여지는 풍경은 마치 전시 수용소를 보는 듯했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들고 가다가 잠시 쉬자 이제 겨우 성인이 된 것 같은 앳된 모습의 현역 군인들이 그녀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겁에 질린 여성은 지쳤음에도 얼른 모래주머니를 들어 올렸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병사들의 잘못된 행동을 막아야 할 장교는 그런 여성의 시선을 무시하며 실소를 흘렸다.
목숨을 걸고 시민들을 지켜봤자 급여가 나오길 하나, 휴가가 나오길 하나.
아무런 이득이 없다 보니 군인들은 의욕을 잃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의욕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뭔데 그 눈빛?”
“네?”
“안 되겠다. 그년 끌고 가.”
“자, 잠시만요!”
총을 든 군인들이 이런 짓을 하니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고, 군인과 군인의 보호를 받는 시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자리를 잡아갔다.
끌려간 여성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도 쉽게 항의를 하지 못했는데, 군인들에게 대들다가 피난처 밖으로 쫓겨난 것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군인들의 착각은 점차 심해졌다.
자신들은 지도 계층이고 시민들은 지켜야할 대상이 아닌 노예라고 말이다.
하지만 군인들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서울에 자신들보다 아득히 윗 계급의 존재들이 똬리를 트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 사령관님. 수행자들의 지방배치가 시작된답니다.”
“뭐?”
서울 중심에 안전구역이 설정되고, 봉봉이와 마리오네트만으로 전력이 충분하다 보니, 더는 한곳에 무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훈은 수행자들의 지방배치를 시작했고, 이에 군인들의 갑질이 일상화된 많은 피난처들은 난리가 났다.
“서울만 지키면서 지방은 도외시 한 놈들입니다. 너무 주눅들 것 없어요.”
그러나 수행자들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