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82
84. 종전(2)
“컥…… 비, 비겁한.”
내 전투가 끝나고 김선아, 히로시와 전투 중이던 마스터를 뒤치기로 사살했는데,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물을 흘리며 죽는 적군의 마스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김선아와 히로시의 전투 경험을 위해 내버려 뒀겠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수행자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만큼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하우트 후작이라 했나? 마스터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갖고 있는 게 별로 없네.’
물론 그가 아공간에 쌓아놓은 재화만 해도 엄청난 수준이지만, 앞선 두 마스터처럼 특수한 장비를 갖고 있진 않았다.
덕분에 김선아 일행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앞서 얻은 게 많다 보니 살짝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나는 하루트 후작에게서 얻은 아공간 반지와 장비들은 모두 히로시에게 건네주었다.
아직도 비서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김선아는 내 부인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사소한 재화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엠브리오 공작, 수고하셨습니다.”
크로스비 왕국의 대마법사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자국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덕분에 빈손으로 내려온 엠브리오 공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반갑게 그를 맞이해 주었다.
이제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김선아와 히로시, 청아, 엠브리오 공작은 아군 병사와 수행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다.
나는 대표로 슈엔다르크, 크로스비 왕국의 사령부로 향했는데, 아마 양군 사령관은 마스터들의 결말을 뒤에서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마스터 3명이 깔끔히 제거됐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를 포함한 기사단 전력은 우리가 압도하고 있었으며, 소드 아머를 포함한 수적 열세를 뒤집고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여기에 마스터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 3명에 대마법사가 더해지면?
그냥 끝난 거다.
“머, 멈추시오!”
나는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쳐라!”
하지만 공격을 해온다면 무시하지 않고 확실히 목을 끊는 것으로 대응했다.
당연히 사령부를 지키는 후방 병력 역시 아군의 마스터들이 패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덕분에 달려드는 이는 생각보다 적었고,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아군처럼 노터치로 사령부에 도달했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르트 폐하.”
폐하는 제국의 황제를 포함해 독립국의 국왕들이 쓸 수 있는 호칭으로 속국의 왕인 나는 왕족이나 공작과 같은 전하란 호칭을 쓰는 것이 맞다.
즉, 위치를 넘어선 극존칭인데, 아부에 침략이 용서될 리가 없는지라 내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항복하시죠.”
내 말에 슈엔다르크 왕국과 크로스비 왕국의 사령관들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는데.
“알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버텨봐야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몰살을 당할 뿐이었다.
항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흰 어떻게 되는 걸까요?”
슈엔다르크 왕국 사령관은 지난번 내 인공 메테오에 당해 죽는 바람에 임시직이라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곧 새 사령관이 임명되어 올 텐데, 설마 양군 합쳐 70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한 전쟁이 이렇게 순식간에.
그것도 후퇴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끝이 나버릴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승리한 입장에선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고 패배한 입장에선 역사의 악몽으로 남을 패전이다.
슈엔다르크 왕국의 임시 사령관의 물음에 나는 친절하게 답했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이 말은 결코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위한 게 아니다.
내 성향이 애초에 그렇지도 않으니.
“대신 승자의 권환을 이용해 두 국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을 셈입니다. 그걸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쟁은 지속되는 거죠.”
크로스비는 그나마 괜찮지만, 이 군대가 먹힌다면 슈엔다르크는 더 이상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다.
뻗댄다면 멸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안색이 새파래진 두 사령관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흘렸다.
* * *
슈엔다르크에서 은밀하게 각국 왕실과 황실로부터 자금을 원조받아 진행했던 대리전의 대패.
덕분에 각국은 패전국이 되어버린 두 국가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이번 일의 배후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길 꺼렸다.
아예 수행자 VS 원주민 구도로 해서 전쟁을 치른다면 모를까, 각국이 원하는 것은 파워 밸런스의 붕괴를 막기 위함이지 무조건적인 수행자 배척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으로 베르트 대공국, 케일론 왕국의 군사력은 일반 제국 수준이라는 것이 판명 났다.
대왕국인 크로스비와 중견 왕국 중 가장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슈엔다르크를 너무도 가볍게 분쇄했으니, 더는 왕국 수준의 군사력이라 평가하기 힘들었다.
대신 각국의 국왕들이 협의하여 금지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중력과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고고도 공격을 금한다.]
같이 죽자는 심보로 방어망이 허술한 도시에 공격을 가한다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구의 핵미사일처럼 엄격히 사용을 금지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모아 케일론 왕국과 베르트 대공국에 보냈다.
두 국가는 이미 써먹었으니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훈 역시 대공국의 모든 지역을 지킬 수가 없는지라 슈엔다르크에서 미친 척 공격을 해오는 것 아닐까 걱정했었고.
약간의 머리를 굴리면 마법으로도 쉽게 제어하지 못할 진짜 메테오에 가까운 공격을 재현하는 것도 가능했다.
때문에 지훈 역시 그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각국의 나라님들이 의견을 한데 모아 합의한 내용은 대륙법이 되었고 이를 어긴 국가는 대륙의 공적이 되어 경제적, 군사적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종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그렇소.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하는 말이지.”
“이익…….”
“슈엔다르크 왕국은 선전포고해놓고 전쟁에 진 패전국인 데다가 더는 우리 군을 막을 여력이 되지 않소. 그냥 전쟁을 진행하면 멸망하는 것은 필연. 이런 와중에 북부, 서부 지역을 내놓으라는 것이 문제라 생각되지 않는군.”
“지도에 표시된 영토는 우리 슈엔다르크의 6할에 해당하는 수준이오! 이건 너무하지 않소!”
하지만 종전 협상은 쉬이 합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협상가와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협상가 사이의 생각 차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본국은 아직 완전히 패한 것이 아니요. 여전히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무엇보다 외교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국가가 제법 되지.”
“할 말이 그게 다요?”
하지만 아쉬운 것은 슈엔다르크 쪽이었다.
이미 은밀한 협력을 이어온 국가들은 개입을 거절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전 협상 중이던 슈엔다르크 왕국에서 이번 전쟁이 다른 국가들의 협력으로 이뤄진 대리전임을 밝히는 돌발행동을 해버렸다.
이는 조금이라도 케일론, 베르트 대공국을 위축시키고자 하는 위협이었는데,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두 국가는 꿈쩍도 안 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다른 국가들이 이런 슈엔다르크 왕국의 발언을 부정했다.
오히려 슈엔다르크 왕국의 행동은 스스로가 고립된 상태라는 것을 광고한 꼴이 돼버렸다.
협상이 부진해지자, 베르트 대공국과 케일론 왕국은 병력을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전진 배치했다.
협상이 틀어지면 바로 쳐들어가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협상을 진행하던 슈엔다르크 왕국은 조금씩 지쳐 양보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케일론 왕국과 베르트 대공국은 이번 기회에 미드랜드 중부로 진출하고자 했고, 결국 슈엔다르크 왕국은 이를 막지 못하고 국토의 절반을 넘기고 말았다.
대왕국이나 다름없던 슈엔다르크가 일 순간에 소왕국으로 몰락한 것이다.
더구나 지구로 따지면 전술 무기라 할 수 있는 마스터 2명을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배상금으로 가뜩이나 안 좋은 내수시장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베르트 대공국의 경제 속국이 되어갔다.
크로스비 왕국도 국토 일부와 상당한 수준의 배상금이 매겨졌다.
인구 대국인 크로스비 왕국은 아직도 전쟁을 치를 충분한 여력이 남아 있었다.
더불어 슈엔다르크와 다르게 인접국인 위스워드 제국을 끌어들일 능력이 있었기에 서로 양보할 거 양보하고 베르트, 케일론 측은 실리를 챙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크로스비 국왕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던 만큼 그 실리의 파이도 적지 않았다.
곡창과 많은 금속의 매장 가능성이 큰 산맥 등 슈엔다르크가 내놓은 땅의 2할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덕분에 지난 내전으로 로엘 제국에 내주었던 케일론 왕국의 북방 영토보다 5배는 큰 땅을 새로 얻게 된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있겠는가. 새로 얻은 영토는 절반으로 나누세.”
이번 협상은 베르트 대공국과 케일론 왕국이 단일 협상팀을 구성하였는데, 대공국이 속국인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더불어 패전국들이 괜히 잔머리 굴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의 이득을 나누기 위해 베르트 대공국와 케일론 왕국이 2차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케일론 왕국의 국왕은 심플하게 새로 얻은 영토를 반으로 나누자고 지훈에게 제안했다.
이번 전쟁에서 베르트 대공국이 가장 큰 활약하긴 했지만, 이는 분명 케일론 왕국의 대대적인 파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케일론 왕국에서 지원한 병력의 규모는 베르트 대공국의 3배에 달했는데 그만큼 병력 손실도 대공국보다 컸다.
또한, 베르트 대공국은 케일론 왕국의 속국인 만큼 이번 전쟁의 이득을 나누는 것에 있어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다.
지훈은 괜히 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쿨한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새로 얻은 영토는 자로 잰 듯 세로로 쪼개서 크로스비 왕국과 인접한 서쪽은 케일론 왕국이, 몰락한 슈엔다르크 왕국과 가까운 동쪽은 베르트 대공국이 갖게 되었다.
케일론 왕국은 서남방면으로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베르트 대공국은 남쪽 길게 영토가 늘어났다.
덕분에 베르트 대공국은 케일론 왕국, 슈엔다르크 왕국을 제외하고 새로운 이웃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참고로 이번 영토 이전으로 슈엔다르크 왕국과 크로스비는 국경이 떨어져 완전히 견우와 직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협상까지 완료가 되면서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베르트 대공국과 케일론 왕국은 새로 얻은 땅을 온전히 수습하기 위해 많은 자금과 인력을 퍼부어 안정화에 힘을 썼다.
이번 전쟁으로 다른 국가들은 수행자들의 무서움은 빠른 성장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부와 권력이 지훈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 일로 많은 국가가 지훈에게 직접적으로 수행자 분배에 대해 의논했고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심플했다.
“지금보다 더욱 좋은 대우를 해주면 수행자들은 굳이 베르트 대공국으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베르트 대공국에 있는 수행자들이 다시 넘어올 만한 제안을 하라.”
수행자들의 입지는 더욱 넓어져 갔다.
이번 전쟁의 배후에 다른 국가들의 사주가 있었다는 것은 지훈으로서도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혹여 원주민과 수행자 간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입장으로서 수행자 영입 정책을 펼치는 국가들을 보며 안도했다.
그렇게 D-DAY와 전쟁으로 파란만장했던 지구의 8월이 끝이 나고, 대기실 입장의 시간과 5회차 수행자의 입장 시간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에 앞서 축하해야 할 일이 생겼다.
* * *
오랜 정체 끝에 6서클을 넘어 온전한 대마법사, 또는 초인 구역이라 할 수 있는 7서클에 들어섰다.
당연히 많은 사람의 축하가 이어졌고, 히로시는 가뜩이나 강한 내가 대마법사까지 되었다며 언제 따라잡나 신세 한탄을 했다.
7서클 대마법사에 익스퍼트 최상급의 마검사.
이 정도면 8서클의 대마법사나 하이 마스터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붙어봐야 알겠지만, 이제 마스터나 7서클 대마법사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러까지 마스터를 찍으면 좋겠지만, 그동안 마법 수련에 열중해서인지, 오러는 아직도 익스퍼트 최상급 중반에 걸쳐 있었다.
이제부터 오러 수련에만 열중하면 멈춰있던 경험치 게이지가 오르지 않을까?
“뭐? 결혼?”
그런데 내가 대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인식이와 수행자들의 호감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전 걸그룹 멤버 주아가 결혼을 하고 싶다며 둘이 손을 꼭 잡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굳이 내게 허락받을 일은 아니었기에 당연히 축하해 주었으나 인식이가 아이돌 마누라를 얻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뭐, 지금 사회에서 수행자는 특권 계층이 된 지 오래지만.
곰 같은 녀석이 ‘행복합니다’라는 오라를 뿜고 다니는 것이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