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79
83. 개전(2)
한때 슈엔다르크 왕국은 제국 수준의 국력을 보유한 적도 있고, 케일론 왕국, 로엘 제국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의 위기를 겪은 적도 있다.
슈엔다르크 왕국은 그렇게 2천 년의 역사를 이어왔는데, 이 긴 역사의 증거로 꼽히는 것이 바로 드라이덴의 왕성이었다.
비록 지금은 1세기 동안 대마법사가 등장하지 않고 있으나, 슈엔다르크 왕성은 수많은 대마법사들의 손을 거치면서 막강한 방어력을 갖추게 되었다.
건국 초기에 존재했던 8서클 대마법사가 제자들과 함께 설계하고 각 시대별 7서클 대마법사가 왕성의 결계를 보강해왔다.
그리고 500년 전 등장했던 슈엔다르크 역사상 두 번째 8서클 대마법사가 이를 완전히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데, 이론상 9클래스의 마법마저 한두 차례 방어해낼 수 있다고 한다.
결계의 완성도만 놓고 따지면 대마법에 특화된 것으로 유명한 케일론 왕성의 것을 크게 상회했다.
덕분에 국왕은 왕성이 공격받는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의미 없는 짓이 어딨겠는가.
드라이덴 왕성은 슈엔다르크 왕국의 자랑이었다.
“폐, 폐하!”
베르트 대공이 벌이는 게 분명한 경제 테러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자국의 시장 상황에 분노를 터뜨리던 국왕은 대책회의 중 갑자기 군무 차관이 들이닥치자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한눈에 봐도 저기압으로 보이는 국왕의 모습에 군무 차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는데.
“원정군이 베르트 대공국으로 향하던 중 기습을 받아, 병사 5만여 명과 기사 150가량이 사망했으며 사령관인 가르트 후작 각하 역시 전사하였다는…….”
국왕은 잠시 이게 뭔 개소린가 싶어 자신의 귀를 후비며 다시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돌아온 이야기는 다름이 없었고, 크로스비 왕국의 피해 건까지 보고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군무 차관의 뺨을 올려쳤다.
“차관은 짐을 우롱하는 건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믿기지 않지만, 이는 참모인 아르한 백작 각하로부터 전달된 정보입니다.”
국왕은 좀처럼 믿기지 않는지 황당하단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그에 차관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뗐는데.
“그게…….”
-콰아아앙! 쾅! 콰앙!
그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성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뭐, 뭐냐?”
기사와 마법사들이 황급하게 안으로 들어서 국왕을 둘러쌌다.
당연히 8서클 마법사의 정수가 깃든 왕성에 이상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살 떨리는 충격음은 아무리 고압적인 국왕이라 해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왕성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국왕의 시선이 테라스로 향하고 곧 무언가가 날아와 충돌했는지 푸른빛의 경계선이 드러났다.
“혹시 쇠공을 이용한 공격인가?”
군무 차관이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근위기사에게 물었고, 질문을 받은 기사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이것이옵니다!”
그리고 이어진 차관의 주어 없는 말에 국왕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 공격에 행군 중이던 아군이 당한 겁니다.”
“그럼 이 짓이?”
“예, 베르트 대공국 또는 케일론 왕국의 소행인 것이죠.”
난리는 5분여가 흐르고 나서야 멈췄다.
더 이상 충격음이 들려오지 않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 국왕이 발코니로 향했고, 성 주변의 공원 곳곳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으득.
“베르트 대공 개자식이.”
케일론 왕국이건 베르트 대공국이건 슈엔다르크 왕성의 결계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아직 정확하게 누구의 짓이라 판명은 안 났지만, 슈엔다르크 국왕은 이게 베르트 대공의 짓이라 확신했다.
이런 상식 밖의 돌발행동을 케일론 왕실에서 계획했다고 보긴 힘들었으니.
이는 누가 봐도 무력시위를 겸한 경고였다.
“당장 베르트 대공국 수도에도 똑같이 보복하도록!”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훈은 자신이 계획한 함정에 당할 만큼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다.
슈엔다르크 왕국의 보복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폐하 병력 손실은 어떻게…….”
“3군을 빼서 지원한다. 크로스비 왕실에도 추가 지원을 요청하도록.”
국왕은 더 이상 이번 전쟁이 타국의 지원으로 치러지는 대리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전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국왕의 분노와 별개로 이번 사태는 빠르게 치솟던 슈엔다르크 물가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에 따른 물가 상승은 필연.
하지만 피해 여부를 떠나 수도가 공격당했다는 것이 슈엔다르크 상계에 치명타로 작용했다.
공격을 당한 것은 베르트 공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루트화 대란과 대출금 일시 상환으로 워밍업을 했던 슈엔다르크 왕국의 피해가 월등히 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맞붙기 전부터 슈엔다르크 국왕이 1차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 * *
“베르트 공국에 덤비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제대로 경험시켜 주시네요.”
나는 클로이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대치 중인 슈엔다르크 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중심에 생화학 무기 터트리면 딱 인데.”
“독의 일종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쉽지만 뮤대륙에선 전쟁에 독을 사용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이는 명예와 직결된 일이며, 자칫 대륙 공적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기습은 되는데, 독은 안 된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름지기 전쟁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것 아닌가.
이 와중에 명예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슈엔다르크와 크로스비에서 10만의 병력을 충원한다고 합니다.”
내가 선물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마음에 들었는지, 제대로 응해주는 두 왕국.
하지만 우리는 후속과의 합류를 얌전히 지켜봐 줄 이유가 없다.
나는 케일론 왕국군 총사령관인 레이튼 후작과 동석한 엠브리오 공작에게 말했다.
“총공격하죠.”
그에 두 사람은 크게 당황했다.
“수비의 이점을 버리고 선제공격을 하잔 뜻입니까?”
작위는 엠브리오 공작이 높지만, 그는 중요한 전투 전력인지라 사령관의 자리는 전 법무대신 레이튼 후작이 맡았다.
레이튼 후작은 재상인 크로이센 공작파였는데, 비협조적인 것은 아니지만 병력 손실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강했다.
엠브리오 공작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지만 레이튼 후작은 역시 반발했다.
그의 행동은 잘못된 게 아니다.
모름지기 사령관이라면 불필요한 병력 손실을 아까워할 필요가 있으니.
“굳이 지원 병력의 합류를 지켜볼 필요 없죠. 8만의 손실이 난 눈앞의 적을 처리하기만 하면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분명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8만이 줄었다고 해도, 아직 32만이 넘는 병력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보다 많은 숫자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42만과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요?”
“저는 차라리 42만을 상대로 방어전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공격을 하자고 하겠는가.
“의외로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으시군요?”
그때서야 레이튼 후작은 내가 아무 대책 없이 공격하자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비밀 병기가 있습니다.”
“비밀 병기요?”
“여기저기 눈이 많아 시연을 할 순 없으나, 적의 마법사와 기사들만 잘 견제하면 병사끼리의 전투에선 절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정확한 건 직접 보면 안다며, 비밀을 밝히지 않자 레이튼 후작은 고민을 했고 결국 왕실에 보고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정보가 새어나가게 되면 비밀 병기의 위력이 반감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지구에서 병기들을 끌어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미드랜드에는 슈엔다르크 왕국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수행자들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고 있는데 다른 세계의 무기를 가져와 학살을 자행한다면 여론은 더욱 안 좋아질 것이다.
자칫 베르트 대공국이 공적이 되어 다른 국가의 추가개입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만큼 지구의 무기는 사용을 완전히 배제했다.
애초에 지구에서 내게 무기를 퍼줄 만큼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엔 마법이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었다.
“폐하께서 믿어 보시겠답니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제 판단에 따라 군의 후퇴를 이해해주셨으면 한다고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역시 미하엘 국왕은 말이 통해서 좋다.
나는 기대에 부응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령관 각하, 적군이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뭐?”
슈엔다르크 왕국과 크로스비 왕국의 합동 사령부에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진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어전의 이점을 버리고 공격을 하겠다고?”
헛웃음을 흘리는 크로스비 왕국군 사령관의 모습에 슈엔다르크 왕국의 임시사령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후속 병력과의 합류를 막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흠, 그럴까요.”
그래도 국경 요새를 끼고 싸우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혹시 또 수를 쓰려는 걸까?
이미 한번 거하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두 사령관은 말없이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양군 사령관을 향해 한 기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녀석들이 알아서 복수의 기회를 제공해 주겠다는데, 좋지 않습니까. 우리가 방어대형을 갖춰 맞이해주면 되는 일입니다.”
그는 슈엔다르크 왕국의 새로운 소드 마스터 하우트 후작이었다.
사령관 막사에는 그 외에도 다른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전력이지만 엄연히 이들은 전투 자원이지 참모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모진이 아니라 해도 사령관조차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중 분위기를 깼음에도 아무 말은 못했다.
“물론 저들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잊어선 안 되죠.”
이번 전쟁의 목적.
그건 바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베르트 대공국에 소속된 수행자를 줄이는 일이었다.
당연히 마스터와 대마법사는 절대로 당해선 안 되지만 일반 병력의 손실을 일일이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완전히 전쟁을 승리로 가져가 베르트 대공국을 차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을 상대로 방어전을 치를 기회를 버리고 후속과 합류한다면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차라리 고민할 시간에 방어진을 펼치는 게 나아 보입니다만?”
말투가 아니꼽긴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우트 후작의 모습에 슈엔다르크 왕국의 제일 검 데이슨 공작이 경고했다.
“결정은 사령관께서 하시는 거다. 자신의 입장을 착각하지 말도록.”
완전히 상사의 말투지만 하우트 공작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사령관.”
이는 하우트 후작의 스승이 데이슨 공작이었기에 상황이었다.
다소 강압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우트 후작각가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맞댄다고 해도 답이 나올 리 없기에 결국 이들은 방어의 유리함을 버리지 않고 방어진을 펼쳤다.
그리고 3시간 후, 넓게 포진된 방어진을 향해 베르트 대공국+케일론 왕국의 연합군이 똑바로 진격을 해왔다.
“응? 저게 무엇이오?”
그런데 진격해오는 적들 사이에 기괴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마치 유목민족의 게르(원형 텐트)를 연상시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시설물이었고, 사람이 1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직접 움직이는 시설이었다.
여기저기 보병 틈에 끼어 있는 그것은 수백 개에 달했는데, 용도를 알 수 없으니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안에서 활을 쏘는 기구 아니겠습니까?”
“그럼 굳이 저렇게 막대한 양의 철을 이용해 만들 필요가 없죠. 갑옷을 입히는 되는 거니.”
“하지만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방어를 위한 시설물로밖에 안 보이는 데요?”
불길하기 그지없는 생김새에 사령부가 술렁이고, 그 정체불명의 장비를 앞세운 적군은 점점 가까워졌다.
“일단 접근을 허락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에게 요격을 시키죠.”
슈엔다르크 왕국 사령관의 말에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