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꿈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77
82. 베르트 대공국(3)
미드랜드에 화폐는 2종류가 있다.
하나는 국가 자체 주화, 다른 하나는 미드랜드 전체에서 통용되는 공용 주화다.
애초에 미드랜드의 화폐는 금속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두 화폐의 차이는 주조 시 들어가는 금속의 합금 비율뿐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별로 가치가 다른 국가 단위 주화는 사라지고 사용하기 쉬운 미드랜드 공용 주화가 기준이 되었다.
공용 주화는 각국의 왕실 또는 황실에서만 찍어낼 수 있다.
만약 국가에서 합금 비율을 속여 유통하다 발각될 경우 어마어마한 벌금이 매겨지게 되며, 개인이 공용 주화를 제조하면 관련자 모두가 처형을 당한다.
때문에 주화 제작 시 타국에서 파견 나온 감독관들이 철저하게 감시를 하며, 이 감독관은 왕족 또는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게 뭡니까? 왜 돈을 안 주고 이상한 종이를 주시는 거예요?”
“자네 어디 시골 벽촌에서 올라왔는가? 그게 돈이야. 공용 주화를 원하면 그 돈 들고 은행에 찾아가게 그럼 바꿔줄 테니.”
하지만 최근 이 공용 주화를 대신하는 신종 화폐가 퍼지고 있는데, 그것이 베르트 은행에서 발행되는 ‘수표’와 ‘지폐’다.
수표는 자신의 계좌에 보관된 금액을 다른 사람이 출금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전표로 계좌에 보관된 금액보다 많은 돈은 출금할 수가 없다.
그래서 거래 시엔 베르트 은행의 공증을 받은 수표로 거래하는 것이 안전하며, 공증이 안 된 수표는 반 공표나 다름없어 악용 소지가 컸다.
지폐는 개인의 자산을 통해 발행하는 수표와 달리 베르트 은행 자체에서 발행하는 화폐로 완전한 공용 주화의 대용품이다.
지폐는 한 장, 한 장이 은행의 공증을 받은 수표나 다름이 없으며, 지폐를 들고 은행을 찾아가면 공용 주화로 교환할 수 있다.
애초에 지폐가 공용 주화 본위제로 발행되고 있는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폐의 주 사용자들이 상인인지라 바로 주화로 바꾸기보다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계좌에 예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은행에선 주화를 흡수하고 시장엔 지폐가 주화의 자리를 대신했다.
상인들은 인지를 못 하고 있지만, 지폐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상행은 은행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슈엔다르크 왕국 수도 드라이덴
올해 모피 교역에 뛰어든 신입 상인 보거트는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수도의 가죽 상회에서 대뜸 비싼 모피를 받고 종이쪼가리를 돈이라며 건네줘서 당황했다.
“그냥 공용 주화로 주시면 안 됩니까?”
“귀찮구만. 자네가 공용 주화로 결제하면 받긴 하겠지만, 우린 지금 소지하고 있는 공용 주화가 없네.”
신종 사기인 걸까?
그는 손에 들린 한 장의 지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50,000루트]
이게 백금화 5개와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데 어떻게 믿겠는가.
“그냥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죠.”
결국, 아무리 값을 잘 쳐준다고 해도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보거트는 질 좋은 모피가 쌓인 지게를 지며 상회를 떠나려 했다.
“거참…….”
하지만 상회의 상인은 보거트의 모피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시골의 상인에 친절을 베풀기로 한 것이다.
“따라오게. 지폐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겠네.”
“네?”
그렇게 상인은 보거트를 이끌고 수도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지구로 향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뭐긴, 루트화를 발행하는 은행이지.”
그리고 그는 귀족의 저택처럼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로 안내했는데, 이렇게 고급스러운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처음인지라 보거트는 절로 긴장이 됐다.
은행을 오가는 사람들은 평민부터 귀족까지 다양했다.
“잘 보게.”
그러면서 상인은 보거트를 이끌고 창구로 향했는데, 똑똑해 보이는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어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5만 루트를 공용 주화로 환전해 주시게.”
상인은 여직원에게 지폐를 건넸고, 여직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백금화 5개를 돌려주었다.
“자, 봤지? 루트화는 은행에서 발행한 공용 주화 증명서와 같은 것이네. 그뿐만 아니라 은행에 계좌를 만들어 돈을 보관하면 원금에 이자가 붙고, 담보 및 신용도에 따라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지. 자네 이참에 대출 한도라도 알아보는 게 어떻겠나?”
보거트는 은행이 새로운 형태의 돈을 전문으로 다루는 상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대출 이야기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자가 아무리 낮다고 해도 사채가 망조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출 이자에 대해 듣는 순간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 5푼에서 1할(5~10%)이요?”
“네, 이자는 상환 잔금을 기준으로 책정되며, 중도 상환을 하시면 이자는 사용한 기간만큼만 내시면 됩니다. 연 1할의 이자가 걸린 대출금을 6개월 만에 상환하시면 5푼의 이자만 은행에 지불하게 되는 것이죠.”
이 얼마나 양심적인 수치란 말인가.
이자에 이자가 붙어 금세 원금보다 이자가 많아지는 고리대금업자들의 사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대출 한도를 알아보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백금화 5개가 연 이자 7푼(7%)의 조건으로 대출 가능하단 이야기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뭘 보고요?”
보거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은행 여직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상인 출신의 노예가 백금화 5개에 거래가 되거든요.”
“…….”
즉, 제때 돈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간다는 뜻이었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잠시 은행이란 곳을 기부 단체로 착각하고 말았다.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대출금 상환의 의지가 있으시다면 상환 기간을 연장해 그때 동안 이자만 갚으면 되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여지를 주는 것이 역시 양심적이었다.
돈을 못 갚으면 몸으로 갚는 건 고리대금업자 쪽도 마찬가지니.
“대출을 진행하시겠습니까?”
현재 보거트의 자본금은 백금화 5개.
하지만 대출을 받게 되면 백금화 10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전에 두 배는 큰 상행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
흥미가 도는 것이 당연했다.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큰 생각 없이 은행에 들어섰던 보거트는 대출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럼 수고하게.”
보거트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모피를 구입해준 친절한 상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시장을 살폈다.
[사과 5개 10루트 / 1동화]
[밀주 1병 20루트 / 2동화]
[강철 장검 1,000루트 / 1금화]
그리고 그는 상거래에서 루트화가 빈번히 사용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거트는 수도에서 하루를 묵기 위해 외곽의 싸구려 여관으로 향했는데.
“1박에 50루트요.”
문명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관의 주인조차 루트화로 가격을 말했다.
“아, 동화 5개란 뜻이죠?”
역시 수도라 그런지 값이 어처구니없이 비쌌지만, 그는 별수 없이 요금을 지불했다.
“응? 상인 아니시오?”
행색이 영락없는 행상인이었으니, 직업을 눈치채는 것이 당연.
보거트는 돈을 잘 받아 놓고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는데, 여관주인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아니, 요즘 상인이 주화를 들고 다니는 게 흔치 않아서 말이오. 근래 들어 루트화만 취급하는 상회가 부쩍 많아져서 불편할 텐데.”
“제가 지나온 경로에선 아직 루트보다 주화를 주로 사용해서요.”
수도에선 공용 주화가 아닌 루트화가 기본 화폐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덕분에 자연히 은행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보거트는 대출이 더욱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한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대출받겠습니다.”
“네, 대출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계좌를 개설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따로 개설 비용은 들지 않습니다.”
“네.”
결국, 다음 날 보거트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자본금이 두 배로 늘어난 보거트는 행복한 표정으로 돈이 될만한 것을 찾아 며칠 동안 시장을 배회했다.
모피를 구하기 위해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모름지기 상인이라면 돈을 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맨손으로 돌아가기보단 시세차익이 적더라도 고향에서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물품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백금화 10개로 그는 중부지역 특산품인 향신료와 설탕을 구입했고, 슬슬 고향인 남부의 소도시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수도를 떠나기 직전 그는 의외의 소식을 어깨너머로 듣게 되었다.
“뭐? 전쟁?”
“그래, 베르트 대공국에 우리 슈엔다르트 왕국이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라더군.”
“베르트 대공국이면 새로 만들어진 케일론 왕국의 속국이 아닌가?”
“맞아, 말이 대공국을 향한 선전포고지, 이는 케일론 왕국과의 전쟁이나 다름없어.”
그건 바로 전쟁 소식.
놀랄만한 이야기지만, 전쟁은 잘만 이용하면 상인이 크게 한몫 거둘 기회의 시간이었다.
“잠깐, 그럼 은행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은행이 왜?”
“드라이덴 은행이 베르트 상회 소유인 거 몰라?”
“어? 그랬어?”
“우리나라가 케일론와 사이가 안 좋아서 베르트란 이름을 뗀 거지, 현재 영업 중인 모든 은행이 베르트 상회거야.”
“헉, 베르트 대공령에 문제 생기면 내가 맡긴 예금은 어떻게 되는 건데?”
“글쎄?”
돈을 빌린 입장에서는 은행이 망해준다면 땡잡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돈을 맡긴 입장에선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앙심을 품고 은행에서 돈을 모두 빼돌리는 것 아닐까란 걱정도 들었다.
“은행은 베르트 대공국이 멸망해도 그대로 운영됩니다. 대공국의 멸망이 베르트 상회의 멸망은 아니니까요.”
그건 미리 대비하고 있던 슈엔다르크 상인 길드의 길드장이 밝힌 내용이었다.
대공국의 멸망을 예로 말을 하는 게 웃기지만 가장 쉽게 은행에 대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비유였다.
“은행이 소속된 베르트 상회는 대공국의 것이 아닌 대공전하 개인의 소유입니다. 상회 본부도 작년 중립도시 발테르로 이전했죠. 만에 하나 이번 전쟁으로 대공 전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예정에 따라 소유주가 변경되어 운영될 뿐 상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길드장의 말을 무시하며 예금을 되찾았고, 슈엔다르크에 위치한 은행에선 매일같이 출금을 위한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사태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정보 길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과 상인 길드, 베르트 상회와 연관 있는 단체뿐이었다.
은행은 고객들이 출금을 하면 고스란히 돈을 돌려주었다.
이후 고객 수가 극감하고 여론이 안 좋음에도 은행은 한결같이 영업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모르는가? 웬만해선 주화로 거래를 하고 싶은데?”
“그건 그쪽의 사정이고 우린 공증 수표나 루트화 아니면 거래 안 합니다. 은행가서 루트화로 바꿔 오세요.”
그런데 세계적인 공룡이 된 베르트 상회 또는 이들과 연관된 주요 상회에선 여전히 루트화로만 거래를 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교역상들 역시 편리한 루트화를 고집했다.
여론이 한 방향으로 흘러서 그렇지, 지성인들은 전쟁이 상회 운영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은행은 각국 상인 길드, 정보 길드와 연계되어 있는 만큼, 지훈이 마음먹는다고 은행의 돈을 한 번에 빼돌릴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었다.
덕분에 혼란도 잠시, 슈엔다르크의 선전포고가 예정대로 진행되었음에도 은행은 조금씩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슈엔다르크 왕국의 주요 산업이 다름 아닌 교역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대단하네.”
전쟁 소식에 손해를 감수하면서 향신료와 설탕을 되팔고 값이 크게 오를 군수품을 구입한 보거트는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베르트 대공이란 인물을 대단한 상인이라 생각했다.
“무, 무슨?”
하지만 베르트 대공을 향한 그의 감탄은 머지않아 저주로 바뀌게 되었는데…….
“대, 대출금을 상환하라뇨?”
갑자기 은행에서 대출금을 조기 상환하라는 명령이 상인 길드를 통해 날라온 것이다.
“대출 당시 긴급 상환 제도에 안내받으셨죠?”
“네?”
“잠시만요, 서류가……. 아, 여기 보시면 분명히 확인하고 지장을 찍으셨잖아요.”
보거트는 해당 내용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긴급 상환 제도(조기 상환)]
분명 그가 확인하고 지장을 찍었던 내용.
당시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곳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해당 지점의 운영이 어려워지거나 보유 예금이 최고치에서 5할 이하로 떨어질 경우.
그땐 전혀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그 내용에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10일 치 이자까지 더해서 50,145 루트를 상환하시면 됩니다. 긴급 상환 유예는 일주일입니다.”
전쟁 소식에 갖고 있던 물건을 급히 처분해서 2할의 손해를 감수했는데, 갑자기 돈을 상환하라고 하니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보거트는 거대한 은행에 비하면 한없이 힘없는 개인이었고, 앞으로도 상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큰 이득 없이 손해만 안게 된 보거트가 대출금을 상환하고 나니 재산은 대출 전 백금화 5개에서 2.5개로 줄어들었다.
“씨발.”
절로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은행 긴급 상환으로 피를 보는 것은 보거트 뿐만이 아니었다.
대출금 한도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컸으며 그에 따른 이자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대출 당시에 긴급 상환제도를 안내받았다고 해도 이를 계속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 짧은 상환 기간에 수도 드라이덴의 상계가 휘청거렸다.
덕분에 시장엔 급히 처분한 물건들이 대거 풀리면서 일시적으로 값이 떨어졌지만, 그 물건들은 베르트 상회에서 고스란히 사들이면서 금세 값이 원상복구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수표는 발급 중지 상태이며, 루트화가 부족하여 환전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출금은 공용 주화로만 가능하십니다.”
그 많던 루트화가 다 어디로 간 건지, 슈엔다르크 왕국에 지폐가 풀리지 않으면서 교역을 위해 웃돈을 주고 루트화를 구입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덕분에 물건 대신 슈엔다르크에 루트화를 팔러 가거나 루트화를 수입해오는 상인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은행에서 지폐가 슈엔다르크로 이동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루트화의 가격 상승은 지속적적으로 이어졌다.
공용 주화 본위제라는 존재 가치를 무색케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야금야금 루트화를 비싸게 판매하는 상회 중 가장 많은 거래량을 보인 것이 베르트 상회 휘하의 조든 크리스 상회란 점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