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75
82. 베르트 대공국
피 냄새와 내장이 튀는 살풍경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장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에 나는 이들을 이끌고 운동장으로 나섰다.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구제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악인들 틈에 끼어 피떡이 되어 죽었을 수도 있던 일반인들이 완전히 기가 죽어 나와 피해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물었다.
“청주캠프로 모셔 드리면 될까요?”
구해놓고 무책임하게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이들을 끝까지 책임을 지기로 한 나는 그렇게 물었다.
“…….”
하지만 쉬이 답을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무래도 피해자들은 청주를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이는 청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상황으로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해당 지역이 문제인 게 아니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각자 원하는 곳으로 일일이 안내해 드릴 순 없지만, 일단 청주캠프에 들렀다가 서울로 향하겠습니다.”
가족들이 청주캠프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모두 악인들과 몬스터에게 가족이 죽었는지 청주에 남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피해자들에게 구제받은 일반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선택사항이 없습니다. 아무리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곤 해도 악인들의 행동을 묵인했던 만큼 피해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다른 도시에 머물게 될 겁니다.”
괜히 그들이 기존 피난민들과 섞여 소문을 낸다면 피해자들은 피난처에서도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당연한 조치.
당연히 그들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동 경로가 정해지자 이수연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서울까지 어떻게 이동하실 건가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도보로 이동하긴 힘들고, 나도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문제 될 것 없다며 손으로 뒤를 가리켰다.
-드드드드드.
그에 구름을 뚫고 웅장한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떠한 장면보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저걸 이용하면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죠.”
“무, 무슨?”
“제 성입니다.”
처음 천공성을 얻을 때만 해도 비상 피난처로만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공성의 가치를 재인식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으악!”
나는 천공성에 이들의 출입을 일시적으로 허락했고, 하늘에서 내려온 빛에 의해 UFO에 끌려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대체 당신은?”
청공의 성은 말이 성이지 작을 숲을 끼고 있는 부유 섬이다.
새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지는 숲을 등지고 높은 성벽을 마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 * *
나는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왜 계속 자기 아들을 그렇게 보는 거야?”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내게 아이가 있다는 게 볼 때마다 신기해서요.”
어머니께선 신기하기로 따지면 아무렴 자기들만 하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세계에서 결혼하지 않나, 그 세계에서 왕이 되질 않나.”
그것도 그렇다.
이 상황 자체가 상식을 넘어섰으니.
손가락을 뻗자 아이는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렇게 내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데.
“전하!”
업무 중이던 클로이가 다급히 나를 찾았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고 덩달아 아이가 울자 클로이는 잠시 무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진지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슈엔다르크에서 선전포고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그에 나 역시 심각해져 얼굴을 굳혀야 했다.
그 이유는 슈엔다르크에서 전쟁을 한다면 북쪽을 노릴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어딜 향한 선전포고?”
중부의 경제 대국 슈엔다르크 북쪽에 위치한 국가는 다름 아닌 케일론 왕국이었으며, 두 국가는 예로부터 사이가 좋지 않는 전통적인 적대 국가였다.
“우리 베르트 대공국입니다.”
우린 독립국이 아닌 케일론 왕국의 속국이었으니.
대공국을 향한 선전포고는 케일론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다.
대공국 건립 100일 기념 축하치곤 지나치게 악의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왕실에도 알렸어?”
“네.”
이쪽은 아직 대공국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보기 힘든 상황인 데다가 본토는 내전이 끝나고 겨우 8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해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그러니까 녀석들이 쳐들어오는 거겠지만.
“아마 이 이상 시간을 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수행자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아직은 감당 가능한 수준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베르트 대공국과 케일론 왕국은 단단해진다.
이는 적대국의 입장에서 좌시하기 힘든 위협일 것이다.
더구나 내전에 로엘 제국이 끼어들어 케일론의 북방영토를 가져가는 바람에 오랜 우방이던 두 국가의 관계가 깨진 상태다.
여러모로 지금이 아니면 칠 기회가 없다고 생각될 법했다.
“군대는?”
“집결하고 있습니다. 군사력은 케일론이 조금 더 우위라 볼 수 있지만, 슈엔다르크가 선전포고를 한다면 그들의 우방인 크로스비 왕국도 참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구 대국 크로스비 왕국은 케일론 왕국과 함께 미드랜드의 2대 대왕국으로 손꼽히는 국가다.
정작 전쟁의 주체인 슈엔다르크 역시 대왕국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국가인 만큼, 위급 상황이었다.
더구나 선전포고를 해온다는 것은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좀 자리를 잡아가나 했더니.”
나는 이마를 짚었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모님의 얼굴에도 근심이 어렸다.
* * *
케일론 왕국과 슈엔다르크 왕국은 단 한 번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전통적인 적대국이다.
원래 국경을 마주한 국가끼리 사이가 나쁜 것은 지구의 많은 국가들을 비교해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케일론과 슈엔다르크는 서로를 혐오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다.
케일론 왕국은 단일 민족 국가인 반면, 중부의 슈엔다르크 왕국은 무역 국가답게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인종 국가이다.
케일론인들은 그런 슈엔다르크인들을 근본 없는 잡종으로 표현하곤 했고.
슈엔다르크인들은 체구가 작은 열성 종족인 케일론인을 보존할 이유가 뭐가 있냐며 조롱했다.
이렇게 근본적인 인종의 대립부터 시작해 경제적, 지형적, 역사적 충돌이 끊이질 않다 보니, 미드랜드를 대표하는 앙숙 국가로 유명했다.
그만큼 두 국가 사이에선 국지전이 끊이질 않고 전면전도 3차례나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4번째 전면전이 일어나려 하고 있는데…….
-슈엔다르크 왕국, 왕성 대전.
슈엔다르크 왕국의 국왕은 군무 대신이 올린 베르트 대공국의 병력 현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잘 정비된 병력 7만에 기사 5백. 정규 기사급 수행자가 1800여 명?”
건립 100일 차인 대공국이 아니라 어느 왕국의 병력 보고를 받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
“거기에 대공은 마스터급의 마검사이고, 수행자 중 100여명은 고위 기사 수준이다?”
“그러합니다.”
슈엔다르크 국왕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군무대신, 짐의 착각인가? 이 전력에 케일론 왕국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크로스비 왕국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가 힘들어 보이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뒤에서 바람을 넣어 놓고 이제 와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는 군무대신의 대답에 슈엔다르크 국왕의 회색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군무대신은 그런 국왕의 모습에도 담담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해도 이번 전쟁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에 한차례 성질을 죽인 슈엔다르크 국왕은 주먹에 턱을 기대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수행자가 감당 가능한 수준일 때, 최대한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이번 전쟁의 목표가 케일론 왕국이 아닌 어디까지나 베르트 대공국이란 말이군.”
“그러합니다.”
국왕은 실소를 흘렸다.
그도 바보가 아닌지라 왜 수행자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현재 수행자들은 케일론 왕국의 속국인 베르트 대공국에 집중되어있는 상태다.
그렇게 수행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나중에 진입한 신입 수행자들도 소속 국가를 떠나 자연히 베르트 대공국으로 향했다.
덕분에 아직도 수행자들의 이탈은 끊이질 않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서서 이 악순환을 끊을 필요성이 있었다.
빠르게 강해지는 수행자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자칫 미드랜드의 심각한 파워 밸런스가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
“이김에 베르트 대공국은 언제든 우리 슈엔다르크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슈엔다르크가 나서서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하냐는 것이다.
국왕은 좀처럼 이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것이었으니까.
“국왕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르트 대공국을 치는 조건으로 각국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면 합니다.”
“뭐라?”
“아마 많은 국가들이 우리의 행동을 지지할 겁니다. 그런 국가들로부터 금전 지원을 받아 대리전쟁을 치르는 것이죠.”
많은 국가들이 베르트 대공국과 케일론 왕국의 행태를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를 이용해 적대국의 전력을 깎고 자금 지원으로 피해를 복구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군무대신이 그린 계획을 납득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에 타국이 어울려줄지는 미지수였다.
“이미 양대 제국으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받은 상태입니다.”
“위스워드 제국뿐만 아니라 로엘 제국까지?”
중서부의 위스워드 제국과 슈엔다르크는 원래부터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로엘 제국은 오랜 세월 케일론 왕국과 우정을 지켜온 국가인 만큼 관계가 좋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하긴 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노선을 변경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로엘 제국에서 케일론 왕국의 내전을 틈타 북방 영토를 손에 넣은 것까진 좋았으나, 케일론 왕국이 갑자기 수행자들로 힘을 키우면서 등에 칼을 꽂으려 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더군요.”
“이해가 일치했다는 건가.”
주도면밀한 군무대신을 보며 국왕은 언제 그를 불신했냐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슈엔다르크 국왕은 군무대신에게 말했다.
“좋아, 그 의견을 채용하지. 만약 자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공작위를 내려 주도록 하겠네.”
“성은이 망극합니다.”
군무대신은 성공을 확신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대리전이 성공하기 위해선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병력 손실을 입는 것은 상관없으나, 전쟁에 완패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다.
수행자를 정리하고자 전쟁을 일으켰는데, 역공으로 나라가 멸망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주변국에서 압력을 가하겠지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었다.
그리고 적군의 지장인 지훈은 이들의 속셈까지 꿰진 못하더라도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