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69
78. 일본 정부의 만행
결의 가득한 히로시의 모습에 김선아는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히로시의 이런 반응은 나와의 계약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란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대신, 충실한 내 사람이 되기로 약속을 했고, 나는 그를 김선아 수준으로 대우해주고 있었다.
이제 김선아가 내 반려가 된 만큼 완전히 똑같은 대우를 받긴 힘들겠지만, 내 친구들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내 지지에 힘입어 그는 라이벌인 김선아와 함께 다음 단계에 한발 걸치고 있는 상태이며, 조금만 더 디딤발에 힘을 준다면 온전한 최상급 익스퍼트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자칫 매국노로 낙인 찍힐 수도 있을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나라가 저를 등진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망명하죠.”
히로시는 소드마스터를 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자질을 가진 인물이다.
나는 운 좋은 특이 케이스일 뿐 재능은 히로시가 위라고 생각한다.
분명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그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수행자 중에서도 특출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히로시를 버린다?
그가 뭐가 아쉬워 그런 나라에 붙어 있겠는가.
상식적으론 그런 일이 발생할까 싶지만, ‘왠지 요즘 일본 정부라면 가능할지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지금의 일본 정치계는 제 자리 챙기기 급급한 인물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총리는 가장 최악의 인물이었고.
“당연히 우린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지만 바로 제거하기보다. 한번은 기회를 줘보도록 하죠.”
일본 정부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총리를 제거하겠단 그의 의지도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히로시를 위한 제안이다.
히로시도 내 생각을 알기에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일단 연맹의 이름을 앞세워 확실하게 항의토록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히로시의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말이 존중이지 그의 등을 떠민 건 나였다.
* * *
8월 20일, 일본 도쿄.
히로시는 차가운 표정으로 1회차 수행자인 유이와 나츠오를 대동한 채 총리관저의 지하 벙커를 방문했다.
“연맹의 전투 총괄님이 아니십니까? 바쁘신 분께서 이곳을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국 대통령과 달리 나츠오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총리를 직접 마주한 게 손에 꼽을 정도다.
웃는 모습으로 자신들을 반겨주지만, 총리의 눈빛엔 바빠야 할 너희가 왜 여길 찾아오냐는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일본은 한국보다 규율에 엄격한 나라다.
연맹의 총괄이란 위치 때문에 만나야 했지만, 국정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인물을 한창 신경 쓸 거 많을 때 만나야 한다는 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더구나 히로시가 불만을 토하러 왔다는 사실도 뻔히 예상이 되었다.
이미 한차례 자위대 사령부의 유선전화로 설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제가 많이 귀찮은 모양이군요.”
어제 통화상에선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더니, 직접 마주하니 거침이 없다.
그에 총리는 애써 불편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수행자 여러분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면서 총리는 히로시 일행이 왜 찾아왔는지 안다며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성난 시민들과 정부가 싸우는 사태가 벌어져선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한국과 한국에 있는 연맹 회장님께 돌린다는 거군요. 그로인한 재일교포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태연한 히로시의 반문에 총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책임을 돌린다기보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죠.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연맹 회장님을 비난한 적은 없습니다.”
[안타까운 희생. 한국인들로 구성된 연맹의 지도자들 정말 이 사태를 몰랐나.]
[가장 피해를 적게 본 국가는 바로 한국. 왜 우리 일본만 이렇게 당했는가.]
“이 내용이 비난이 아니라고요?”
히로시는 아공간에서 꺼낸 신문을 테이블에 ‘쿵’ 내려놓았다.
그것을 힐끔 본 총리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답했다.
“첫 번째 기사는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두 기사를 연결해서 보면, 누가 봐도 회장님이 일본을 망가뜨린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게 의도 되지 않은 거라고요?”
“뭐, 확실히 그런 의도가 없다곤 할 수 없죠. 그런데 이게 그렇게 문제일까요?”
“…….”
“이는 사람들의 착각에 의한 것이지 정부가 직접 비난을 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니 사과를 하겠다는 거고요.”
“그 사과도 당장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일단 사태가 진정되고 난 다음에…….”
히로시는 총리에게 길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행자 연맹 전투 총괄로서 일본 총리께 경고합니다. 당장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실수를 해명하는 기사를 만들어 피난처에 배포하세요.”
차가운 히로시의 눈빛에 총리는 움찔 놀라면서도 자신이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총리를 향한 위협에 경호실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챙!
그러나 경호실장은 히로시의 손에 들린 검에 움직임이 굳어버렸다.
“끼어들 생각 마세요. 죽기 싫으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졌다.
히로시의 막나가는 행동에도 동행한 유이와 나츠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이들의 행동이 사전에 협의된 것임을 알아챘다.
“연맹 회장님의 지시가 있던 모양이군요.”
히로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보고는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제 독단이죠.”
총리는 히로시의 행동에서 상상 이상으로 회장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뮤대륙을 여행하더니, 쓸데없는 기사도라도 배운 걸까?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라 생각했다.
“제 경고는 결코 엄포가 아닙니다. 최후의 통첩인 거죠.”
그리고 히로시는 할 말만 하고 검을 아공간에 수습한 채 지하 벙커의 임시 총리실을 벗어났다.
* * *
히로시 일행이 나서자, 임시 총리실 한구석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비서관이 분을 감추지 못하는 경호실장을 진정시키며 총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연맹 회장이 이 일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걸 쪼르르 달려가 바로 보고를 하다니, 저 인간 일본인이 맞긴 한 건가?”
“히로시 씨의 가문은 대대로 가와사키의 대지주로 지냈습니다. 정계에 발을 담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교육계와 법조계로 많이 진출한 것 같더군요. 히로시 씨의 친부는 JAL과 이온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지금 상황에 대주주가 무슨 소용이겠냐만, 히로시가 어중간한 집안의 인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그런 사람이 혼란에 빠진 정국에 기름을 부으라고 하는 것 아닌가.
총리가 혀를 차자 비서관이 조심히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하겠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면 끝일세.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어.”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단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을 향한 분노가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에 비서관은 턱을 괴더니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그래도 이대로 연맹과 틀어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방금 찾아온 수행자들만 봐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고요.”
총리는 ‘아무렴 죽기야 하겠냐’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비서관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챘다.
“사과는 하되 굳이 모든 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는 거군.”
“네.”
“하긴 모름지기 외교라는 게 그런 거지.”
현재 일본은 주요 영토인 4개의 섬중 3개가 궤멸되고 본토인 혼슈만 남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총리는 사람들과의 눈치 싸움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 * *
[한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연맹에서 강한 항의를 보내오다.]
[의도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있다며 연맹에서 사과를 요구. 이에 대해 총리는 깊은 사과의 뜻을 전해…….]
[총리: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연맹 회장께 직접 찾아가 사과를 전하겠다. 앞으로의 안전을 위해선 수행자들의 도움이 필수. 연맹과의 관계는 결코 틀어져선 안 된다.]
히로시는 이마를 짚었고, 유이와 나츠오 역시 분노를 표했다.
“나만 내용이 이상하게 보여? 어째 연맹의 압력에 굴해서 억지로 사과하는 모양새인데?”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쓰여 있지 않으니, 오히려 총리가 피해자가 된 느낌이야.”
그뿐 아니라, 한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 더욱 혐한을 부추길 수도 있다.
연맹 회장을 향한 총리의 이야기는 정중해 보이지만,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말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리해야겠네.”
히로시의 마음도 정리가 되었는지, 큰 고민이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해봤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아니면 따로 믿는 게 있을 수도 있지.”
“믿는 거? 설마 능력자?”
능력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이는 실소를 흘렸다.
3회차 수행자 수준인 능력자에게 한국 다음으로 질 높은 수행자 전력을 자랑하는 자신들이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종합적인 전투능력이 그렇다는 거지, 한 가지에만 특화된 능력이라는 점이 귀찮을 수도 있어.”
유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히로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히로시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태연하게 답했다.
“다른 인물을 지도자로 앞세워야지.”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앞세워 총리를 정리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따른다는 보장은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세네 명만 구워삶으면 되니까.”
“어떻게 구워삶게?”
“제 목숨만 귀한지 아는 사람이 많아. 그 바람을 이뤄주면 되지.”
유이는 히로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알겠다며 말했다.
“수행자 지정권?”
“맞아. 수행자가 되는 순간 여분의 목숨이 생기는 거니까. 이것에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들었어. 내색을 못 할 뿐이지.”
“하긴, 각국 고위 인사들이 연맹원들에게 은밀히 청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마음을 먹었으면 이제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 * *
“무, 무슨 짓인가?”
총리는 갑옷 차림을 한 채 쳐들어온 히로시를 보며 당황했다.
하지만 히로시는 길게 생각할 것 없다는 듯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총리에게 검을 휘둘렀다.
-쾅!
그런데, 히로시의 검은 투명한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히로시의 시선이 유리로 된 임시 총리실 옆방으로 향하고, 그곳에 양손을 든 채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 새끼가 진짜로 날 죽이려고!”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총을 빼들려 하자, 히로시의 뒤를 따르던 2회차 5서클 마법사가 슬립 마법을 사용했다.
그에 경호원들은 맥없이 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마법? 어떻게 허가도 없이 기어 들어왔나 했더니…….”
히로시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능력자는 순식간에 파괴되는 자신의 방어막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총리는 당하지 않았다.
총리의 목 앞에서 검이 멈춰 섰기 때문이다.
“대체 능력자를 몇 명이나 끌어들인 거야.”
히로시 뿐만 아니라, 마법사 역시 움직임이 굳었다.
마치 전신을 옮아 메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기운에 포박된 것.
총리는 너무 놀라 굳어 버렸고, 히로시의 의문에 답을 하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임시 총리실에 들어섰다.
“국민을 위해 휘둘러져야 할 검이 왜 총리에게 향하는 거죠?”
“저 새끼 저거! 재일이 분명해!”
방탄유리 너머에 숨어 방어막을 사용하던 능력자까지 더하면 총 5명이었다.
그런데 히로시는 언제 포박을 당했냐는 듯 자세를 곧추세웠다.
“뭐야? 분명 염력이…….”
염력 능력자로 보이는 남성이 당황하며 물러났고, 그 앞으로 전기와 불, 바람을 사용하는 능력자가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하고, 검등으로 후려치는 히로시의 타격에 가볍게 제압을 당했다.
“말도 안 돼.”
덕분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능력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멍청하게 마지막 기회를 그런 식으로 날려 버리다니. 전 분명 경고했습니다.”
“자, 잠깐. 잠시 이야기를.”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히로시는 등을 돌려 총리의 목을 날려 버렸다.
“정말로 총리를 죽였어.”
능력자 중에 사람을 죽여본 자가 있을까?
총리를 죽이고도 무덤덤한 히로시를 보며 능력자들은 말을 잃었다.
“수행자는 너희와 걸어 온 길 자체가 다르거든.”
그러면서 히로시는 총리의 사체를 아공간에 담은 채 마법사와 함께 유유히 그곳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