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43
66. 베르트 공작(2)
뮤대륙인에게 우리 수행자는 외지인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리고 둘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데, 일부 귀족들 사이에선 점점 힘을 불려가는 수행자에게 위기심을 표하며 우리를 침략자로 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는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걱정해 귀족들이 수행자들을 매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행자의 공증인이 다름 아닌 신이 아닌가.
자기 살기 바쁜 평민들은 수행자들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지만, 귀족들의 견제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이는 곧 제재로 이어졌고 수행자들을 자신들의 전력으로 여기고 있는 주제에 나라에선 일반 자국민과 차별을 두었다.
바로 영주가 될 수 없는 작위로 말이다.
원래 익스퍼트 상급의 고위기사, 5서클의 고위 마법사에겐 국가에서 단승 남작위를 부여했다.
즉, 1회차 수행자들은 모두 단승 남작이 되어야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행자들에게 부여되는 단승 남작위는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문턱이 높아졌으며, 소드 마스터가 된다 해도 단승 백작위가 주어질 뿐 영주가 될 수가 없다.
수행자들도 각자의 성향이 있는 만큼 뮤대륙을 꿈, 또는 게임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수행자는 현실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뮤대륙에선 5일을 보낸다.
어찌 가볍게 어기겠는가.
심지어 수행자 중엔 현실보다 뮤대륙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지금의 대우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더 뮤대륙의 귀족과 왕족들이 넓은 마음으로 수행자를 포용하면 좋겠지만, 제 잇속 챙기기 바쁜 이들에게 변화를 바라긴 힘들 것이다.
수행자들이 마음대로 국적을 옮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놈의 퀘스트 때문에 국적을 마음대로 옮기기도 힘들었다.
김선아의 경우만 하더라도 내게 기사 작위를 받은 만큼 2중 국적자나 다름없는 상태지만, 퀘스트 수행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로엘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케일론 왕국의 국적을 가진 1회차 수행자는 나뿐이다.
뭐, 이런 케일론 왕국도 머지않아 다른 국가들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컸다.
새 국왕은 나를 등용했지만, 나를 제외한 수행자들의 득세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니.
“재밌는 말이군요.”
영지 시찰을 돌고 난 다음날.
나는 응접실에서 마주한 한 무리의 귀족들을 보며 흥미를 표했다.
어차피 지금의 나를 찾는 귀족들의 속내야 뻔하기 때문에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찾아온 귀족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다른 누군가를 시켜 내쫓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했는데, 이들이 흥미로운 제안을 해왔다.
이들의 제안은 나를 중심으로 한 파벌을 만들고 싶다는 것.
그리고 파벌의 활동 목적은 수행자들의 차별 방지와 국력향상을 위한 적극적인 수행자 지원에 있다고 한다.
설마 뮤대륙의 귀족들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수행자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베르트 공작 전하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데 지금 미드랜드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귀족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수행자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죠. 심지어 우리 케일론 왕국도 타국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서서히 수행자들을 제한하려 하지 않습니까?”
“베르트 공작 전하가 계신데, 어처구니없는 짓이죠.”
마치 성토를 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나는 용건만 말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에 찾아온 귀족들을 대표하는 서부의 대영주 아인트 백작이 답했다.
“수행자의 특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귀찮게 이것저것 해달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저희가 공작님의 이름을 빌려 파벌을 만드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여기 공작님의 사람이 되길 바라는 가문의 명단입니다.”
아인트 백작이 건네온 두터운 서류를 받아든 나는 망설임 없이 내용을 살폈다.
영주 19명(백작 1명, 자작 7명, 남작 11명)에 왕성에서 근무 중인 단승 남작 22명.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대부분이 서부와 남부의 귀족들.
대충 면면을 보면 주류에서 밀려난 귀족들이지만, 이만한 수가 한데 뭉쳐 내 이름을 팔고 다닌다면 더 이상 비주류라 볼 수 없었다.
이들은 싫어하는 수행자의 편을 들어줘서라도 위를 향하려는 것이다.
나름 발상의 전환이라 볼 수 있지만, 참으로 귀족다운 면모.
내가 봤을 때,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타국의 앞잡이가 되고도 남을 인물들이었다.
실소를 흘리며 서류를 덮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제가 활동지원금을 보태드리도록 하죠.”
“오오!”
말하는 내내 반응이 애매해서인지, 큰 기대를 않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새 국왕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중심을 잡아달라는 국왕의 요구를 달성하기에는 좋은 방법이라 판단했다.
파벌이 두 개인 것보다, 세 개인 것이 조금 더 균형이 잘 맞을 테니.
더구나 바쁜 내가 정치판에 기웃거릴 수는 없는 노릇.
이들이 내 대리인으로 중심을 잡아주면 될 것 같다.
이 정도 세력이면 충분히 대리인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
“잘 부탁드립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들은 하이에나입니다.”
내 이름을 빌릴 뿐만 아니라 자금지원까지 약속받은 귀족들은 고무된 모습으로 나에게 기사처럼 충성 맹세 비슷한 짓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맹세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간신배들의 무릎만큼 가벼운 것이 어딨겠는가.
걱정 어린 클로이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정보 길드가 곁에 있는데, 그들이 어찌 배신하겠어.”
“그렇지만, 그들이 지훈 님의 이름을 팔아 악행이라도 저지르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쳐내면 되지.”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내 이름을 이용하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용인해줄 생각이다.
다만 도를 넘으면 가차 없이 쳐낼 것이다.
그것도 그냥 쳐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한 경고성으로 경제적인 제재까지 선물할 예정.
클로이처럼 나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괜히 지훈 님의 세력에 대항해 나머지 크로이센 공작파와 엠브리오 공작파가 손을 잡는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그래도 상관없어.”
“네?”
“어차피 정치로 치고받는 거지 실제로 검을 뽑아 들고 전쟁하는 것은 아니니.”
그들은 결코 나를 상대로 칼을 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케일론 왕국의 상계와 정보 길드를 장악하고 있다.
나와 싸운다는 것은 무력 충돌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단승 남작 포함 40여 명의 귀족을 끌어들이고도 이를 사소하다고 치부하는 내 모습에 클로이가 쓰게 웃었다.
한국과 뮤대륙에서 큰일을 담당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7번에 걸친 죽음을 경험한 덕분인지, 담이 커진 모양이다.
***
베르트 상회는 케일론 왕국의 상권을 무섭게 장악해나갔다.
결국 3개로 분리된 협동 상회 중, 대부업을 담당하던 상회가 무너지면서 더욱 덩치가 줄어들었다.
200여 년 전의 10대 상단 중 5곳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역사 깊은 협동 상회가 베르트 상회에 밀리고 밀려 몰락하는 모습은 케일론 왕국의 상계에선 이로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베르트 상회는 귀족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초콜릿과 홍차, 커피 등 고가의 사치품 취급할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각종 공산품을 대량생산하여 여러 상회의 파이를 빼앗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 상회의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은행의 존재였다.
왕국의 화폐가 은행에 밀집되어, 보유고가 케일론 왕국의 국가 예산을 넘어섰다.
베르트 은행의 수표는 상인들에게 완전히 필수품이 되어 거의 현금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은행 계좌를 가지지 않은 상인은 거래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베르트 은행에서 수표의 소액결제를 대신할 종이 화폐의 생산계획을 밝히면서 상계는 대격변을 예고했다.
“수행자가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권력유지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신께서 내려주신 사도를 침략자 취급하다니요. 제정신입니까?”
그리고 상계가 난리가 난 와중에 정계에선 베르트 공작파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부상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국정 회의실에선 설전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재상인 크로이센 공작이 지훈에게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지훈은 정계의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지훈과 달리 그의 세력은 점점 덩치를 불려갔고, 대세에 따른 중앙의 귀족 몇이 전향을 하면서 두 공작에 밀리지 않는 거대 세력이 되었다.
이제 지위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지훈은 케일론 왕국의 최대 권력자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이거야 원.”
새로운 케일론 왕국의 국왕 미하엘은 하루도 빠짐없이 지훈에게 집중된 권력을 줄여야 나라가 안전하다는 상소를 덮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훈이 세력을 일군 것은 그로서도 당혹스런 일이었지만, 크로이센 공작파와 엠프리오 공작파의 공공의 적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왕가는 완전히 무풍지대가 되었다.
더구나 국가의 경제 또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 지훈이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대륙의 금을 쓸어 모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치품을 팔아 무섭게 금을 수입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벌인 덕에 내수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당연히 이는 세금 확대로 이어졌고, 귀족들도 지훈을 성토하면서도 예년보다 자금에 여유가 생겼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무심하게 행동해도 국왕 입장에서 보면 지훈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였다.
덕분에 국왕은 알게 모르게 지훈을 향한 견제를 줄여 주었고, 이는 곧 베르트 공작가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
베르트 공작령 영주성 뒤뜰.
-쾅!
“큭.”
큰 굉음과 함께 나가떨어진 히로시는 있을 수 없다며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모임을 가진 1회차와 2회차 상위 수행자들도 마찬가지.
이들이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모의전투에서 히로시에게 패배를 선물한 상대가 내가 아닌, 바로 김선아였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밑바탕이 깔려있던 김선아는 빠르게 사고가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뮤대륙 시간으로 2주가 되어서 완벽하게 사용해냈다.
둘의 경지 차이는 히로시가 조금 더 높다.
한때 막혀 있던 것이 전투 교범의 도움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익스퍼트 최상급이 된 것은 아니다.
이제 겨우 최상급의 벽을 마주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둘 모두 익스퍼트 상급이었고, 아무리 히로시의 전투 센스가 좋다고 해도 사고 가속을 지닌 김선아에게 이기기란 무리였다.
히로시는 쌍검으로 공세를 펼쳤지만, 방패를 앞세운 단단한 그녀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번번이 위협적인 공격을 허용하다가 빈틈을 찔러온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패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압승.
덕분에 모의전투에 이긴 김선아와 패한 히로시, 관전 중이던 수행자들 모두가 말을 잃었다.
히로시가 김선아의 반응속도보다 빠른 스피드를 내지 않는 이상 결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무, 무슨?”
가장 놀란 사람은 은연중에 김선아를 라이벌로 생각하던, 사지타, 나츠오, 니콜라이 등 1회차 수행자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한 사람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에게 히로시는 꽤 높은 벽이었다.
잠깐 히로시가 부진하는 바람에 많이 따라잡긴 했지만, 경지가 비슷해도 1:1 전투에선 도저히 이기질 못했으니.
하지만 김선아는 그런 히로시를 상대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며 끝내 승리를 취했다.
당황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 번 더.”
정작 패배한 히로시는 김선아와의 전투에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살벌한 눈빛으로 다시금 대련을 청했고, 김선아의 시선이 내게 향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금 전투가 이어졌는데….
히로시는 정교함을 포기하는 대신 공격속도를 더욱 높였다.
적절한 대응법에 김선아는 방어에 애를 먹었지만, 이변 없이 승리했고 나는 패하긴 했으나 히로시의 분전을 감탄했다.
그러나 다른 수행자들에겐 히로시의 분전보다도 김선아의 연이은 승리에 포커스를 맞췄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사지타와 한냐가 숨을 고르는 김선아에게 다가갔고, 남자들도 이유를 묻고 싶은지 김선아의 주변을 배회했다.
나는 그사이 히로시를 일으켜 세웠는데, 그는 의외의 말을 전해왔다.
“스킬이죠?”
작은 목소리.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정확하게 들었다.
참 여러모로 감이 좋다니까.
나는 그런 히로시에게 말없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