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42
66. 베르트 공작(1)
휴식을 권하는 클로이의 모습에 지금도 쉬고 있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킬 창에서 미래시의 활성화를 껐다.
나는 이제 클로이의 남편이다.
그녀는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도 정보 길드 운영하고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는데, 내가 너무 자신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쉬어야 그녀도 쉬는 거고, 변변한 데이트 한번 없이 내 좋을 대로 휘두르다가 부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클로이는 그런 내가 좋다고 말하지만, 그녀도 여자인 이상 가끔은 연애다운 연애를 꿈꾸지 않을까?
미래시의 효과가 사라지자 두 명으로 보이던 클로이 중 하나가 잔상처럼 사라지고, 눈을 비비며 스스로에게 힐을 사용한 나는 클로이에게 물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
내 물음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흘리며 테라스로 안내했다.
남작령일 때부터 꾸준히 확장을 거듭한 베르트 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도시였던 배르트시는 이제 완전한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확장이 멈추지 않았는데, 이대로 가면 남부에 제2의 수도가 생기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 땅과 이곳에 사는 영지민들은 모두 지훈 님의 것입니다. 가끔은 내가 키운 정원을 살피며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영지를 살펴보자는 건가?
그리 휴식다운 느낌은 아닌데.
하지만 클로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걸 권할 인물이 아니었기에 한번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가끔은 괜찮겠지.’
다른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 상대가 클로이라면 져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좋아, 그동안 너무 방치하긴 했지. 대신 같이 가는 거야.”
“물론이죠.”
그렇게 나는 클로이의 제안대로 영주가 된 뒤 처음으로 시찰에 나서기로 했다.
***
나는 그리 착한 영주는 아니다.
수행자들은 자신이 영주가 된다면 이렇게 할 거라는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세율을 낮춰 영지민들의 소득을 높이겠단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세금을 낮추는 게 우선 과제라 생각하지 않았다.
케일론 왕국 국민의 세율은 영지별로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50~70% 정도라 볼 수 있다.
공제금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세금은 소득에서 일괄적으로 책정이 되며, 그 외에 영주 탄신일, 영지 건립일 등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비 명목으로 돈을 걷는다.
그래서 평민들이 돈을 모으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베르트 공작령의 인구는 약 30만.
이중 경제활동을 하는 5만여 명에게 한 달 동안 세금을 걷어봐야, 상회에서 내게 지급하는 하루 수익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나는 영지민들의 몇 푼 되지 않는 세금에 연연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지만, 결코 선심 쓰듯 세금을 인하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행사비는 걷지 않을 뿐, 베르트 공작령의 세율은 국왕령과 동일한 50%다.
한국을 기준으로 무지막지한 비율일지 모르지만, 뮤대륙에선 표준보다 조금 낮은 정도.
세금을 크게 인하하면 영지민들의 환호를 받을 순 있겠지만, 그래봐야 잠깐의 만족일 뿐이다.
나는 억지로 기존에 이어오던 방식을 뒤바꾸기보다 영지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지훈 님께서 자신의 영지가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잘 모르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베르트 공작령의 중심인 베르트 시를 육중한 팔두마차를 타고 살피던 나는 클로이의 말을 긍정했다.
“그렇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니까.”
베르트 공작가의 공식 문장은 푸른색의 원형 마법진을 바탕으로 하여 검과 창이 교차한 문양이다.
깃발로 만들 때는 백금화를 상징하는 은색 바탕의 천을 사용해서 공작령 곳곳에 배치된 가문기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우리가 탄 마차에도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영지민들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처음엔 이 풍경이 너무 보기 안 좋았는데, 이젠 익숙해져서 신경쓰지 않았다.
“황금의 도시. 그게 베르트 공작령의 별명입니다.”
“너무 거창한 거 아냐?”
“그렇지 않습니다. 베르트 공작령의 영지민은 희망하면 누구나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죠. 그리고 평민의 수익이 크게 늘어나면서 그야말로 돈이 넘쳐 흐른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영지가 되었습니다. 베르트 시의 시장 규모는 인구수 차이가 두 배나 나는 나머지 두 공작령(엠브리오, 크로이센)보다 큽니다.”
클로이의 부연 설명에 나는 흥미롭단 표정으로 영지를 살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각자의 걸음걸이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며, 평민을 상대로 하는 시장엔 먹을거리로 넘쳤다.
“클로이를 비롯한 가신들의 덕이지.”
우리 공작령의 특이점은 인구가 두 공작령의 절반이지만, 행정관의 수는 거의 30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나는 영지의 행정구역을 현대식으로 잘게 쪼갰고, 곳곳에 동사무서와 같은 소행정청을 만들었다.
소행정청의 보고사항은 도시의 대행정청으로, 대행정청의 보고사항은 영주성으로 올라오는 형태다.
덕분에 내가 할 일은 획기적으로 줄어 일이 많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지훈 님이 있기에 유지가 되는 겁니다. 영지민들은 모두 지훈 님께서 자신들의 주인인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클로이가 손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시장 곳곳에서 상인과 영지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북한도 아니고.
아니 봉건제 중세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걸까?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클로이가 나를 왜 데리고 나왔는지 알겠네.”
아무래도 내 기를 살려주기 위함인 모양이다.
쓸데없는 사탕발림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칭송에도 무감각하기란 힘들었으니.
클로이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지민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나는 비싸기로 유명한 마차의 유리 창문을 열었고, 만세를 부르던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오오오!
덕분에 만세를 부르던 영지민들의 숫자가 더욱 많아지고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클로이는 겉보기엔 영락없이 화려하고 기가 센 아가씨지만 알면 알수록 귀엽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은 이렇게 여유를 즐기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래, 그래야지.”
한국에선 남녀 할 것 없이 결혼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많이 다르다.
이렇게 무조건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심적인 안정과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우린 이후로 흔들림이 거의 없는 마차로 영지 곳곳을 살폈다.
나는 어딜가나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새삼 이들이 내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케일론 왕국의 내전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누구인가.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1왕자를 물리치고 국왕이 된 2왕자?
단 한 명의 소드 마스터를 파견한 것만으로 케일론의 북방영토를 손에 넣은 로엘 제국?
아니, 둘 다 아니다.
케일론 왕국의 귀족들이 한데 모이면 하나같이 물고 뜯기 여념이 없는 존재.
바로 베르트 공작, 지훈이었다.
케일론 왕성, 귀족 전용 휴게실.
“이야기 들었는가? 협동 상회가 3개로 분리가 된다는군.”
“뭐? 왜?”
“협동 상회의 중심인 대부업이 망해가고 있거든.”
“베르트 은행 때문인가?”
“그래, 은행의 현금 보유고가 협동 상회가 보유한 현금에 수십 배에 달한다네. 그런 은행에서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니 어찌 경쟁이 되겠나.”
“나도 들었네. 듣기로 베르트 은행에서 빌린 돈을 대신 갚아주고 있다지?”
“낮은 이자를 제공하는 자신들에게 갈아타게 하는 거야. 덕분에 아무도 협동 상회에서 돈을 빌리지 않게 된 거지.”
“협동 사외가 3개로 나뉘면 누가 베르트 상회와 경쟁한단 말인가?”
“없지.”
협동 상회는 베르트 상회가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 케일론 왕국의 첫번째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거대 상회다.
하지만 그 거대 상회가 베르트 상회에 밀려 흔들리고 있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출금이 상환되었으면 현금은 많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상회가 세 개로 쪼개지는 거지?”
“베르트 상회가 커지면서 협동 상회에서 취급하는 품목에 손을 뻗기 시작했거든. 문제는 가격을 크게 떨어뜨려 이득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거야.”
“윌리엄 백작을 상대로 고급 원단을 싸게 풀던 것과 같은 건가?”
“그래, 그게 덤핑이란 거네. 두 상회가 서로 덤핑 대결을 하면 구경꾼으로선 볼 만 하겠지만, 결국 협동 상회 자체가 뜯겨 나가겠지. 그래서 아예 상회를 분야별로 나눠 특화시킬 계획이라는군. 그런데 사실 말이 특화지 상회 재산을 분할시키려는 속셈이 뻔해.”
“한곳이 망해도 다른 곳에 영향이 가지 않게끔 할 생각인 거군.”
휴게실에 중심에 둘러앉아 지훈의 이야기를 나누던 내무부 소속 4명의 귀족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공작이 되더니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어. 앞으로 베르트 상회는 더욱 공격적으로 영역을 키워 나갈 거야.”
“케일론 왕국의 경제가 한 사람에게, 그것도 수행자란 영문 모를 존재에게 좌지우지되다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군.”
“어디 그뿐인가. 정보 길드도 이젠 그의 수중에 있지 않나. 베르트 공작은 세력을 이루지 않았을 뿐, 단독으로 가장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어.”
“너무 커져 버렸군.”
요즘은 어디서든 귀족들이 둘 이상 모이면 지훈의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수행자인 지훈에게 지나치게 밀집된 권력을 걱정했으며, 나라와 왕가를 위한다는 핑계로 이를 제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이 직접 건의되는 일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지훈에게 시비를 걸었던 귀족들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작 때도 무서운 것 없이 변경백과 드잡이질을 벌였는데, 공작이 되면서 덩치가 월등히 불어난 지금 예전처럼 반격해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생각만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새 국왕은 벨도 없는지 지훈을 싸고돌았으며, 지훈 개인의 무력 또한 마스터급으로 평가되고 있는 만큼 자살에 취미가 있지 않은 이상 건드릴 수는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들이 나누는 대화도 정보길드를 통해 전달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한 귀족이 말했다.
“그런데 굳이 베르트 공작을 적대할 필요가 있을까?”
그에 모두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는 표정을 지었고, 그 남성은 태연하게 답했다.
“우리가 베르트 공작의 파벌에 들 순 없는 걸까?”
“자네 제정신인가?”
“문제 될 게 뭐가 있는가? 그도 분명한 폐하의 신하인데. 더누나 뮤대륙인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갖지 않았는가.”
“그는 수행자야. 뮤대륙인이 아니지. 베르트 공작은 이 모든 상황을 유흥으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도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의 이름을 빌려 힘을 키우기만 하면 되니까. 주류에서 밀려난 우리들이 앞장서서 그의 심복임을 자처하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나?”
“음.”
현재 내전이 끝나고 케일론 왕국의 정치 구도는 재상과 마탑주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마탑주는 대표적인 국왕파의 인물이라 볼 수 있고, 재상은 정통 귀족들의 대표하는 존재다.
아직 두 공작의 사이가 좋아서 문제가 벌어지지 않고 있지만, 주변에서 바람을 넣는다면 마냥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때문에 이미 세력을 형성된 두 공작에 속하는 것보다 모두가 적대시하며 가까이 하지 않는 지훈에게 손을 내밀어 한자리 차지하는 것도 방법이긴 했다.
괜찮은 발상.
하지만 선뜻 행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