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34
61. 빠른 성장(2)
전쟁에서 사기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명분’이라 볼 수 있는데, 지금 자신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 정당한지, 무기를 들이미는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번 전쟁의 명분은 2왕자에게 있다.
1왕자는 어디까지나 왕위찬탈을 목적으로 한 반역을 저지르고 있으며, 2왕자의 정당성은 가이아 교단에서 증명해주고 있는 만큼 수 많은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다만 전력상 내전의 승리 확률이 1왕자 측이 높았기에 탈영병은 발생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력상 우위가 깨져버리게 되면 거대한 덩치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대대적인 병력 이탈과 함께 힘을 보태고 있는 귀족들 또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반란군은 와해가 된다.
대의명분이 분명한 혁명이 아니라면 반란은 어디까지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때나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즉, 1왕자 측의 팔 하나만 잘라내면 내전은 의외로 쉽게 끝이 날 가능성이 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수도를 향해 진격 중이던 크리산트 공작과 1왕자는 수도 방위 라인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델피네 요새가 하루 거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받았다.
테라시아 후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소식을 전달했는데.
“더는 두 분을 돕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 1왕자 전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군요.”
1왕자 측에서 애매한 위치를 갖고 있지만,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
로엘 제국의 소드마스터인 테라시아 후작이 전장에서 이탈하게 되면 전력상 우위가 단숨에 뒤집히게 된다.
사실 테라시아 후작이 없다고 해도 전력은 비슷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후작을 상대로 분전 중인 지훈을 마스터 급으로 치부하다 보니, 객관적인 평가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오? 일방적으로 약속 깨다니!”
로엘 제국에서 1왕자를 지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북방영토 일부를 이양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양하기로 한 북방영토의 면적은 케일론 왕국령의 1할에 달하는 크기였고 온대기후에 속한 데다가 많은 호수가 포함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비옥한 땅이었다.
“미하엘 왕자 측에서 도미니크 왕자님과 같은 제안을 해왔다고 합니다.”
애초에 제국에선 이번 내전에 승률이 1왕자 측이 높다고 생각했고, 그 와중에 이런 제안을 해오니 덥석 받아든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로엘 제국은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2왕자 측에서도 같은 제안을 해오니, 더는 1왕자 측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허…….”
크리산트 공작과 1왕자는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크리산트 공작은 뒤늦게 이 사태의 무서움을 깨달았는데.
“자, 잠깐. 그 말은 테라시아 후작께서 2왕자 진형으로 이동한다는 뜻이오?”
그에 두 눈을 부릅뜬 1왕자가 테라시아 후작을 노려보고, 후작은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군이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전에 2왕자 측의 행동을 알아챘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 길드가 지훈의 손에 떨어지면서 1왕자 측은 대략적인 정보 수집밖에 못 했고, 이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영토를 더 내어주면 되는 건가?”
긴 한숨과 함께 내뱉은 1왕자의 물음에 테라시아 후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흥정을 이어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뭐?”
그때.
크리산트 공작이 급히 검을 뽑아 들고, 테라시아 후작도 거의 동시 검을 뽑아 들었다.
-콰아아앙!
오러블레이드와 오러블레이드의 충돌.
전투 능력은 더욱 오래 검을 휘둘러온 크리산트 공작이 위일지 모르지만, 같은 마스터를 상대해본 경험은 테라시아 후작이 많았다.
“폐하! 대마법입니다! 어서 목걸이를!”
갑작스런 상황에 벙찐 표정을 짓던 1왕자가 급히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크리산트 공작이 내어준 그 보물엔 무려 8서클의 방어 마법이 깃들어 있었고, 야전 천막을 뚫고 들어온 새하얀 빛 수백 가닥을 막아냈다.
-콰직!
그런데 새하얀 빛은 마치 빗물처럼 계속 쏟아졌고, 8서클의 방어막에 금이 가고 나서야 멈췄다.
“8서클만 해도 방어력이 막강하군요. 7서클 대인공격 마법을 7개나 사용했는데, 모두 막아내다니.”
“네, 네 녀석!”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남성의 감상에 1왕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침입자는 다름 아닌 지훈.
1왕자 입장에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존재였다.
“도미니크 왕자! 투항하라!”
더불어 넝마가 된 천막 너머로 유유히 허공에 떠있는 대마법사 엠브리오 공작까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젠장.”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할 만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테라시아 후작의 배신 한 번에 목숨을 보전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폐하 텔레포트 스크롤을!”
지금 이곳에서 달아난다고 해도 크리산트 공작과 병력을 잃는다면 1왕자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
내전을 빠르고 확실하게 종전시키기 위한 방법을 2왕자에게 제시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귀족들의 비난이었다.
하지만 재상은 내 말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 판단하고 지지해 주었다.
더구나 2왕자 역시 내전을 길게 끌면 끌수록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만큼, 간신배들의 첨언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협상은 어려울 수가 없었다.
현재 내전 상황에 로엘제국 황실은 몹시 당황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2왕자가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다면 로엘 제국과 케일론은 적대국으로 돌아설 확률이 컸다.
로엘 제국에서 바라는 그림은 절대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추가 지원 없이 애매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2왕자가 로엘 제국의 과오를 용서하며 1왕자와 같은 조건으로 손을 내밀어 온다면 안 잡을 이유가 없었다.
테라시아 후작을 데리고 겨우 동등한 전투를 이어간 1왕자 측과 달리 2왕자 측에 테라시아 후작을 붙여준다면 내전은 신속하게 끝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국제 사회에 영원한 적이 어딨고, 영원한 아군이 어딨겠는가.
모두 국가의 손익에 따라 손을 잡고 적대하는 것이지.
‘어쩔 수 없지.’
결국, 2왕자는 현실적인 판단을 선택했고, 이 상황으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방어막 속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1왕자와 테라시아 후작과 검을 맞댄 채 악을 내지르는 크리산트 공작.
나는 그 두 사람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네 녀석만 없었다면.”
화가 날만 하다.
패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1왕자에게 가장 큰 엿을 선물해준 것이 나였으니.
만약 내가 없었다면, 전쟁은 이들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이다.
“항복하세요. 어차피 졌습니다.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시죠.”
내 물음에 도미니크 왕자는 이를 악물며 스크롤을 꺼내 들었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엠브리오 공작이 디스펠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내 1왕자는 스크롤을 내려놓으며 포기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크리산트 공작은 포기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번 전쟁에서 주체는 1왕자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1왕자는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명분이고, 내전의 주체는 이 크리산트 공작이었다.
1왕자가 죽더라도 크리산트 공작은 2공주 소피를 앞세워 전쟁을 계속 진행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1왕자보다 중요한 게 크리산트 공작이었다.
나는 도무지 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크리산트 공작을 처리하기 위해 오리하르콘 단검을 소환했다.
“스승님, 교대하죠!”
내 외침에 테라시아 후작의 깊은 빡침이 느껴졌으나 거부하지 않았고, 나는 크리산트 공작에게 몸을 날렸다.
“죽인다.”
-콰아앙!
이제 마스터를 상대로 버티는 것은 자신이 있다.
나는 바스타드 소드로 내려찍는 크리산트 공작의 공격을 단검 두 자루를 교차해 막아냈다.
그 사이 뒤로 물러난 테라시아 후작이 강력한 기술을 준비했다.
1왕자의 천막은 이미 날아 간지오래.
뒤늦게 튀어나온 기사와 마법사들이 경비병들과 함께 우릴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1왕자가 엠브리오 공작에게 구속당한 상태이다 보니, 누구 하나 달려들지 못했으며 모두 구경꾼이 되었다.
“뭣들 하나! 공격해!”
중간중간 얼굴이 창백해진 귀족들이 소리를 내질렀지만.
“다가오는 순간 모두 불탈 것이다.”
화려한 로브 차림으로 근엄하게 내뱉는 엠브리오 공작의 엄포에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이이이익!”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지만, 크리산트 공작이라고 해서 테라시아 후작 때와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비켜!”
그리고 뒤에 물러나 있던 테라시아 후작의 준비가 끝났는지 쌀쌀맞은 목소리로 외쳤고.
내가 고개를 젖히는 순간 날카로운 바람이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고 가속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눈으로 좇기 힘든 순살의 검.
“큭!”
-까아아앙!
크리산트 공작은 용케 그 공격을 막았으나,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서걱!
바로 이어진 내 공격에 두 눈을 잃었다.
“끄아아악!”
졸지에 배신자가 된 테라시아 후작은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할 일을 했다.
-푹!
날카로운 에페가 크리산트 공작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잠깐.”
그리고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검으로 크리산트 공작의 목을 날려 버렸다.
“뭐하는 짓입니까!”
크리산트 공작은 불구로 만들어 1왕자와 함께 끌고 가려 했다.
그런데 테라시아 후작은 아예 그의 목숨을 빼앗았고, 내 차가운 물음에도 아무 대답 없이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같은 소드 마스터인 크리산트 공작이 추한 꼴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용히 다가온 테라시아 후작이 내게 한마디 했다.
“축하하네. 또 성장했군.”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축하해 줘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
“좋겠어. 이제 명실상부한 케일론 왕국의 3공작 중 하나가 되겠군.”
“네, 아주 좋습니다. 스승님.”
그는 더 이상 스승이란 말에 반응하지 않았고, 고개를 내저은 나는 허공으로 파이어 볼을 날렸다.
그에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오고, 2왕자의 병력이 1왕자 진영을 포위하듯 거리를 좁혀 왔다.
또한 허공에서 마탑의 고위마법사 수십 명이 블링크로 나타나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항복을 종용했다.
“새로운 국왕폐하께서 항복하는 이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약속하셨다! 반항하지 말고 항복하라!”
숫자는 1왕자 측이 많을지 모르지만, 지도자를 잃은 이들은 더 이상 싸울 수가 없다.
혹시라도 미친 척 달려드는 인간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모두 순순히 포기하고 항복하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끝났군.’
그렇게 케일론 왕국의 내전은 치열했던 초반 양상과 달리 협상 한 번에 상황이 뒤집히며 끝이 났다.
당연히 전쟁의 1등 공신은 바로 나.
비록 케일론 왕국은 북방영토 일부를 잃게 되었지만, 군사력은 거의 온전하게 보존했기에 큰 내전 속에서도 대왕국이란 칭호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전으로 나라가 망 길에 접어드는 것은 이 세상에서 흔한 일이었으니.
이번 전쟁으로 내가 얻은 소득은 굉장히 크다.
케일론 정보길드를 손에 넣었고.
경지는 익스퍼트 최상급, 6서클을 목전에 둔 5서클이 되었으며.
공작의 작위가 확실시된다.
이제 케일론 왕국에서만큼은 내가 무얼 하든 방해 없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뮤대륙에 진입하고 겨우 300여 일 만에 말이다.
*
차드로 대통령의 폭로 사태는 그의 사과로 일단락이 되었다.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차드로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워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란 태도로 그를 비난했다.
현재 차드로 대통령이 알콜 중독이란 소문이 돌고 있었으며, 대통령궁 내부에서 계속해서 폭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은 조작으로 사실을 가리는 작업의 결과물이지만, 그의 이미지가 워낙 나쁜 덕분에 생각보다 잘 통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현실이 워낙 판타지스러운 만큼 그냥 내버려 둬도 크게 힘을 얻지 못했다.
앞으로는 엑스맨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조금 더 특별 관리를 할 생각이다.
“야, 주아 너무 예쁘지 않냐? 어쩜 사람이 이렇게 인형 같지.”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으로 커져서 무릎 위에 올려놓기가 부담스럽지만, 스킨쉽을 좋아하는 봉봉이는 오늘도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동화책을 읽었다.
나는 무릎에 앉은 봉봉이의 머리에 턱을 올려놓은 채, 계속해서 걸그룹의 멤버이자 수행자인 최주아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인식이에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사귀고 있어?”
인식이와 주아는 같은 마을에서 계속 파티 플레이를 하고 있기에 안 친해질 수가 없었다.
현재 인식이는 주아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녀도 처음 뮤대륙에 입장할 때 인식이의 도움을 받았던 만큼 녀석을 다른 수행자들보다 가깝고 친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들은 주아가 아깝다고 하지만, 내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친구라는 것 하나만으로 인식이의 스펙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잘만하면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인식이가 중요한 순간 겁을 먹는 바람에 좀처럼 진도를 빼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는 소극적인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때면 녀석은 뻔히 좋아하면서도 한걸음 물러났다.
“아주 드라마 찍고 앉으셨어.”
내가 빈정대자 곰 같은 인식이가 삐져서 돌아갔지만,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가와 최주아를 찬양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쉰 나는 이 쫄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재밌는 생각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