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28
57. 내전 (3)
테라시아 후작은 동요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모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군, 수행자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이라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다니.”
“천방지축에 제 멋대로인 녀석이죠. 수행자를 제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입니다.”
케일론 왕국은 로엘제국의 오랜 우방.
더불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알기에 제국의 후작이라 해서 변경백인 하인츠 백작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를 폄하할 뿐인 그를 보면서 어째서 뮤대륙에 진입한 지 10개월밖에 안 된 이에게 밀리고 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전형적으로 권위만 내세우는 허울뿐인 귀족이었다.
일종의 자수성가형 귀족이라 볼 수 있는 소드마스터 테라시아 후작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성향이다.
오히려 성향을 따지면 담담하게 자신들을 살피는 지훈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각하, 베르트 백작이 부대를 둘로 나눴습니다.”
“둘로 나누다니?”
“기병 3000에 기사 100을 후방으로 돌리려는 모습입니다.”
일반 병력의 수는 비슷할지 몰라도 기사의 숫자는 같은 변경백임에도 지훈 쪽이 2배는 많았다.
더불어 기사들의 등급도 익스퍼트 중급 이상만 받아들이면서 기사단의 질이 굉장히 높았다.
“설마 싸울 생각인가?”
황당함이 가득 담긴 테라시아 후작의 반응에 하인츠 백작은 자신의 생각을 더했다.
“후방을 빠르게 정리하여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이런 귀찮은 방식이 아니라 전 병력을 후방으로 후퇴시켰을 것이다.
누가 봐도 후방을 정리하여 포위 공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
“베르트 백작의 군대가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지훈은 몸을 사리지 않고, 가장 최전선에 서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왔다.
테라시아 후작은 늠름한 지훈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어쩌면 쉽지 않을 수도 있겠소.”
하인츠 백작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테라시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베르트 백작이 생각보다 강한 듯하오. 그를 상대하며 다른 곳을 신경 쓰긴 힘들 것 같소.”
그 말은 소드마스터의 지원 없이 적들의 병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
후방에서 두 남작의 병력 5천이 기병3천과 맞붙는 동안 그는 1만 8천의 병력으로 1만 2천을 상대하면 된다.
하지만 무려 5할이 더 많은 병력임에도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하긴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적 1만 2천 중 무려 7천이 중장 보병이란 기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럴 수가.”
케일론 왕국의 중장 보병은 방패에 창을 사용하고, 난전에선 창 대신 날길이 65cm의 숏소드를 사용한다.
갑옷은 일반적으로 철투구에 브레스트 아머를 착용하지만, 돈이 넘쳐나는 것을 자랑하듯 지훈의 중장보병은 방어구 수준이 기사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브레스트 아머에 창과 방패를 쥔 일반 보병이 다른 영지로 가면 중장보병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더구나 단순한 장비빨이면 희망이 있겠지만, 중장 보병단의 10인 대장은 익스퍼트 초급의 기사나 다름없는 병사였으며, 일반 병사들도 용병 출신의 노련한 전사들뿐이었다.
쪽수가 많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계산 착오군. 포위 섬멸도 좋지만 안전하게 공성전을 선택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오.”
정신줄을 놓은 건지 소드마스터를 앞에 두고도 겁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지훈의 군대를 보며 하인츠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에 테라시아 후작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최대한 버티는 싸움을 하시오. 반드시 베르트 백작을 처리하고 돕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습게 보던 존재였는데, 갑자기 커버린 지훈의 모습에 하인츠 백작은 괜히 수치심이 밀려왔다.
“적이 속도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지훈과 기사단을 선두로 한 병력이 속도를 높여 달려오자, 하인츠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령관!”
백작의 외침에 영지군 사령관이 궁수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그때.
지훈이 아공간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쥐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그것을 북 찢자, 하인츠 백작의 진영 곳곳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대마법 스크롤!”
테라시아 후작도 기겁하며 외쳤다.
“산개!”
그에 하인츠 백작은 급히 팔찌를 만지작거렸고 직경 50미터의 거대한 방어막이 펼쳐지며 주변을 보호했다.
하인츠 백작가의 주인을 지키기 위한 오랜 보물 중 하나로 그레이트 쉴드가 내장된 팔찌였다.
-콰콰콰쾅!
그리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뇌우와 불의 폭풍.
“으아아악!”
견고한 그레이트 쉴드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출렁이자 하인츠 백작을 포함한 참모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굳은 표정의 테라시아 후작이 하인츠 백작을 향해 말했다.
“베르트 백작을 치겠소.”
“자, 잠시!”
“이런 공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오!”
후작은 하인츠 백작이 말릴 틈도 없이 간헐적으로 벼락이 쏟아지는 땅으로 나섰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다시 스크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
마법이 그치고 엉망이 된 진영을 살피던 하인츠 백작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2천 이상의 병력이 날아간 것이다
“베르트 백작 미친놈. 대체 공격 한 번에 얼마를 쓴 거야?”
값비싼 7클래스 마법 스크롤을 한 번에 뭉텅이로 찢어 버리다니.
감히 생각지 못한 돈지랄이었다.
마법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범위는 정해져 있고, 실제로 공격을 받은 면적보다 그렇지 않은 면적이 훨씬 많았다.
비록 밀집 대형이었기에, 마법 한 번에 수백 명의 인원이 제거됐지만, 투자대비 효율은 좋지 않았다.
물론, 효율은 극악이어도 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 유효한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지훈이라면 충분히 백금화 수천 개를 쓰레기통에 박을 수 있는 인물이었으니.
-콰아아앙! 쾅! 콰앙!
잠시 후, 지훈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방향에서 요란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그것이 테라시아 후작과 지훈의 전투로 발생한 소음임을 알아챈 백작은 얼른 병력의 재정비를 지시했다.
“젠장.”
테라시아 후작이 참여했을 때까지만 해도 다 이긴 싸움이라 생각했는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
마스터급으로 분류되는 패러사이트와 진정한 마스터와의 격차는 상상 이상으로 큰 듯하다.
공격력, 순발력 등은 엇비슷할지 모르지만, 휘둘러지는 검 끝의 순간 스피드는 총알을 가볍게 넘어서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더구나 테라시아 후작은 에페+망고슈(방어용 단검) 조합을 사용한 스피드 중심의 검사라 상대하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상급 보상카드에서 나오는 능력치 포인트를 모두 민첩에 때려 박고, 오러와 마법, 스킬을 통한 강화를 거쳤기에 최소한 방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블링크.’
그림자 이동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모션보다도 그의 검이 빨라서 거리를 벌릴 때는 5서클의 블링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블링크도 이동에 약간의 딜레이가 있지만, 모습을 감추는 것은 거의 즉시나 다름없어서 조금 더 안전했다.
하지만 블링크를 사용해도 어디서 나올지 안다는 듯, 검을 휘둘러와서 새삼 마스터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큰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휘두르기만 하는 존재와 힘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패러사이트와 소드마스터의 차이였다.
“마검사란 모두 이리 강한 것인가? 6서클도 아니고, 아직 상급 익스퍼트도 되지 못하는 인물에게 이리도 시간을 빼앗길 줄은 몰랐군.”
단정하게 어깨까지 기른 갈색 머리에 여성스런 외모.
1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테라시아 후작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노인네 같은 말투로 내게 물었다.
높게 평가해줘서 고맙지만, 지금까지 전투로 내 자신이 강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의외로 할만해서 깜짝 놀랐네요.”
“재밌는 친구야.”
앳돼 보이지만 테라시아 후작의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
연륜 때문인지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자세를 고치자 쥔 무기 위로 선명한 빛의 검이 솟아났는데, 그것이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블레이드였다.
아마 내 무기가 오리하르콘이 아닌, 미스릴이였다면 그의 공격을 몇 번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창을 고쳐 쥐며 오러를 내뿜었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오러블레이드와 반대로 거친 오러가 불꽃 같은 화려함을 뽐냈다.
하지만 단순한 오러는 겉모습만 그럴싸할 뿐 아무리 강화한다 쳐도 오러블레이드에 비빌 수가 없었다.
-지끈.
나는 레벨 8의 사고 가속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휙!
그리고 무심코 눈을 한번 깜빡이니, 방금까지 대치 중이던 후작의 오러블레이드가 코앞에서 등장했다.
“흡!”
-챙그랑.
헛바람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혔음에도, 제때 피하지 못했다.
덕분에 6서클의 오토쉴드가 펼쳐져 그의 검을 막았다.
오토 쉴드는 오러블레이드를 버티지 못하고 바로 산산조각이 났지만, 후작의 검을 아주 잠깐 멈칫하게 만들었고, 그 조금의 틈을 이용해 공격을 피해냈다.
‘당하기만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지.’
나는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창으로 후작의 배를 훑었다.
-캉!
푸른 불꽃을 머금은 투명한 창날이 너무 간단히 망고슈에 가로막혀 소득 없이 튕겼다.
“큭!”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반발력에 자칫 창을 놓칠 뻔했다.
창을 사용하는 나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에페를 사용하는 그는 거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듯 무섭게 접근했다.
-휙!
당연하지만 뒷걸음질이 앞으로 달려드는 것보다 빠를 수가 없다.
공방이 바로 시작되었고, 1타와 2타까진 잘 막았지만, 3타는 도무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 블링크로 자리를 피했다.
“어딜.”
그런데 그는 마법이 발현됨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망고슈를 힘껏 던졌다.
-쾅!
내가 나타난 장소는 전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허공.
하지만 등장과 동시에 푸른 빛줄기가 섬뜩한 소리를 울리며 날아들었고, 오토 쉴드를 부시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검사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공격.
그 푸른빛은 테라시아 후작이 내 동선을 파악하며 날린 망고슈였다.
그리고 뺨에 길게 난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발밑에서 나타난 에페가 반응할 틈도 주지않고 오토쉴드를 부숴버렸다.
6클래스의 오토쉴드가 무슨 유리처럼 너무 쉽게 깨지고 있다.
압도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상황.
나는 허공을 딛으며 달려드는 검사 같지 않은 검사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씨익.
나와 눈이 마주친 후작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표정을 굳혔다.
이어서 반으로 쪼개진 종이 뭉치가 후작의 눈에 들어오고.
“미친!”
패러사이트 퀸을 잡을 때처럼 중첩된 파이어 스톰이 나와 테라시아 후작을 짚어 삼켰다.
-고고고고고!
나는 지난번 대기실에서 25만 포인트를 주고 구매한 카르디스의 절대 방어라는 망토의 내장 스킬을 사용했다.
‘앱솔루트 쉴드.’
용암과도 같은 불꽃에 가려져 후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를 보니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창을 찔러넣었다.
그런데.
“설마 앞선 행동이 지금의 일격을 위한 것이었나.”
내 창을 맨손으로 낚아챈 테라시아 후작이 불꽃을 해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무슨……. 몸이 금강석으로 되어 있습니까?”
“자네만 보물을 갖고 있으란 법은 없지.”
그렇다 나만 특별한 장비를 갖추란 법은 없다.
더구나 제국의 대귀족이라면 뭐라도 갖고 있는 게 당연.
“위험했어. 방금 공격은 맨몸으로 당했다면 즉사했을 거야.”
그의 표정에 깃들어 있던 일말의 여유가 사라졌다.
더불어 나도 사고 가속이란 사기 스킬에 막강한 템빨을 갖추고도 이런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도 괜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죠. 마스터가 그렇게 쉽게 당하면 안 되죠. 제 성장을 위한 발판이 돼주셔야 하니까요.”
“방금 그 말로 자네를 죽여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군.”
어느새 우린 주변을 잊고 상대에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