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113화 (113/247)

# 113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13

51. 신수 봉봉 (3)

“백금화 180개가 구멍 난 건 아무것도 아니란 건가?”

타밀 자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영업을 재개한 베르트 은행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일반 상회에서 백금화 180개가 갑자기 사라지면 차질이 생길 법도 한데, 이 영지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영업을 하는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신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상회에게 신뢰는 아주 중요한 덕목이니까요. 더구나 베르트 남작의 상회 규모를 생각하면 이해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나날이 무섭게 덩치를 키워가는 조든 크리스 상회와 베르트 상회.

두 상회는 지훈의 소유이며, 모두 왕국의 5대 상단으로 칭해질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최근 지훈이 관리를 위해 두 상회를 통합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다양한 사치품으로 큰돈을 쓸어 담고 있는 조든 크리스와 화폐 유동이 왕국 최고라는 베르트 상회가 합쳐진다면, 당장 왕국의 제일 상단인 ‘협동 상회’를 바짝 뒤쫓게 된다.

그리고 이대로 순조롭게 상회가 성장하게 된다면 왕국 제일 상단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수행자들의 활동을 제한해야 해. 녀석들의 존재가 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타밀 자작은 지훈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수행자가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상계에 진출한 수행자들은 크건 작건 투자 대비 높은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수행자 중에서도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여기저기서 돈을 쓸어 담더니, 왕국의 정치에도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적대 세력인 2왕자 진영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지훈에게 악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타밀 자작은 행정관리인 가신의 걱정 어린 물음에 짧게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였다.

“증거가 없는데, 뭘 할 수 있겠나.”

윌리엄 백작의 부채질에 막상 저지르긴 했지만, 솔직히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은 자신들의 일 처리를 믿었으며, 뒤를 버티고 있는 윌리엄 백작을 믿었다.

하인츠 백작가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소영주에게 잘못이 있는 만큼 지훈에게 분명한 명분이 있었지만, 이번 일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

또한 증거조차 없으며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자작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말했다.

“괜한 내색하지 말고, 남작과 은행의 동향이나 잘 살피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며칠이 지나갔다.

덕분에 타밀 자작은 껄끄러워서 쓰지 않고 있던 백금화 180개를 제 돈마냥 써댔고, 영주성 곳곳에 새로운 미술품이 추가되었다.

아주 만족스런 돈벌이였다고 생각하며, 타밀 자작은 은근히 다시금 은행에 관심을 두었다.

도둑질이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두 번째는 쉽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귀족의 체면이 있다고 해도 눈앞에 거액의 공돈이 있는 데, 그걸 방치하면 욕심 많은 귀족이라 부르기 힘들었다.

하지만.

“영주님!”

“어딜 감히 노크도 없이 들어오느냐.”

갑자기 집무실에 들이닥친 행정관리를 보며 타밀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어진 부하의 이야기에 멍청하게 눈만 껌뻑여야 했다.

“사, 상인들이 영지를 떠나고 있습니다.”

잠시 행정관리의 말을 쉬이 이해 못 하던 타밀 자작은 차갑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며칠 사이 영지의 물가가 마진을 남길 수 없는 수준으로 폭락하는 바람에 손을 떼고 다른 영지로 떠나고 있습니다.”

물가가 마진을 남길 수 없는 수준으로 폭락했다?

그러고 보니 영주는 며칠 사이 식료품과 생활용품의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다만 타밀 자작령과 같은 소규모 도시의 시장은 8할 이상이 외부 상인들에 의해 운영이 되는 만큼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자작은 직접 상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닌 데다가 영주입장에선 세금만 제대로 걷으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설마 이런 상황이 발생할 줄이야.

“이거 혹시.”

그때서야 타밀 자작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영주인 자신이 가만히 있는데 물가가 이렇게 요동칠 이유가 없었다.

마진을 남길 수가 없다는 뜻은 상품의 시장가가 원가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이건 누군가가 대놓고 장난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확신하긴 힘들지만, 작정한 듯 시장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베르트 남작이 관여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녀석들이 대체 어떻게?”

“데른 상회에서 생필품과 식료품의 가격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결국 가격 경쟁에 밀린 상인들이 떠나게 된 것이죠.”

데른 상회라면 큰 규모는 아니어도 왕국 중부에선 나름 역사가 있는 중견 상회다.

오랫동안 자작령과 거래를 맺어온 인연 깊은 상회인데, 그런 곳에서 뒤통수를 치다니.

“그런데, 문제는 상인들이 떠나고 반독점 상태가 된 시장의 물품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데른 녀석들이 베르트 남작의 개가 되었군!”

타밀 자작은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데른 상회를 영지에서 내쫓도록!”

그에 행정관리는 곤란하단 표정으로 자작을 만류했다.

“하지만 데른 상회마저 떠난다면 당장 내일부터 시장은 텅텅 비게 됩니다.”

“우리가 직접 인근 영지에서 물품을 사와서 유통하면 되는 것 아니냐!”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인근 영지의 시장 시세 역시 상승하게 되니 우리도 그만큼 비싼 물건을 사오게 되죠. 물류의 이송시간과 추가 비용을 생각하면 데른 상회에서 푸는 것보다 비싸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짜증이 나는 상황이라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행정관리의 말이 맞았다.

“일단은 데른 상회에 가격을 낮추도록 경고를 주고, 상업 길드에 현 상황을 알리면서 중재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상회를 끌어들여야 합니다.”

가격을 낮추란다고 낮출 이유가 없다.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면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니.

애초에 데른 상회에선 내쳐져도 상관없으니, 이런 짓을 벌인 것 아니겠는가.

“빌어먹을!”

데른 상회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 아니꼽긴 하지만, 완전히 시장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보다야 낫다는 것이 씁쓸한 상황이다.

덕분에 데른 상회의 물품을 강제로 징수할까도 생각했지만, 내쫓으면 내쫓았지 물건을 강탈하는 짓을 벌이면 선례가 되어 앞으로 상인들의 발걸음을 막게 될 것이다.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현실적인 판단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밀 자작과 행정관리는 이게 겨우 시작이란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토르말린 값이 폭락하다니?”

아티팩트 제작 시 마법진 가공에 쓰이는 영지의 특산물을 판매하려 하니, 해당 물품의 시장가가 폭락하고.

“장인들이 떠나?”

군사력과도 연결되는 대장장이와 각종 공산품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영지를 도망치듯 떠났다.

“드디어 데른 상회를 쫓아내는군. 그 빌어먹을 자식들.”

그리고 드디어 다른 상회를 영지에 들이면서 데른 상회를 추방했더니.

“여, 영주님. 세일런 상회가 데른 상회와 같은 짓을!”

“…….”

그 상회는 데른 상회의 시즌2였다.

“베르트 그 자식! 제길! 세일런 상회의 지부를 압수한다!”

“하지만…….”

“영주를 기만한 녀석들이다! 이 이상 넘어갈 수는 없다!”

결국 폭주한 타밀 자작은 영지군을 움직여 세일런 상회를 털었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영지에서 고용한 관리 빼고는 아무도 상회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덩달아 몰수한 식료품과 생필품도 생각보다 양이 적어 그다지 돈이 되지 않았는데, 이 사태에 대해 상업 길드의 공식적인 항의가 이어지면서 중소 상인들이 타밀 자작령을 꺼리게 되었다.

결국 타밀 자작은 자신의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아 윌리엄 백작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제법 규모 있는 상회를 보유한 백작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윌리엄 상회가 파산 직전이라뇨?”

“으득! 모든 거래처를 베르트 상회에 빼앗겼네! 더 낮은 가격에 좋은 조건을 들이미는 바람에 벌써 며칠째 상품을 돈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마침 3일 후가 크로이센 상회에 융자금을 갚는 날인데…….”

“그, 급한 대로 손해를 감수하고 싼 가격에 풀어버리시면.”

“왜 안 해봤겠나! 그러면 귀신처럼 베르트 상회가 달라붙어서 밀어버리는데!”

윌리엄 상회에서 취급하는 것은 고급원단.

사치품의 일종으로 판로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융자금이 많습니까?”

“백금화 3000개 정도네.”

“허…….”

“일단은 가문의 재산을 투입하는 수밖에.”

타밀 자작은 더는 백작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그리고 윌리엄 백작의 상황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아무도 자작을 위해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건 같은 1왕자 진영에 소속된 귀족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때 서야 타밀 자작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건드릴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밀 자작령은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구조다.

때문에 영지민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량의 5할은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영지를 오가는 상인이 전무 하다시피 하니 직접 수송단을 꾸려 필요품을 들여올 수밖에 없다.

본인이 돈으로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타밀 자작 본인이 병력을 움직여 직접 필요품을 공수해 온다면, 반드시 어디선가 도둑을 맞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한 것처럼 지훈도 같은 짓을 벌일 것 같다고.

아니, 분명 그럴 게 뻔하다.

“영주님…….”

행정관리의 씁쓸한 표정에 타밀 자작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급한 불을 끈다고 해도 이 상태가 지속 된다면 어떻게 되지?”

행정관리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윌리엄 백작이 1왕자 측 카렌 자작의 상회에 고급원단을 위탁 판매하려 해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차단했습니다. 판로를 찾지 못해 1왕자 측의 귀족들이 십시일반 사주고 있다는군요. 하지만 이번 일로 본 손해는 최소 백금화 2천 개는 될 것으로 보입니다.”

윌리엄 백작은 타밀 자작을 부채질하고 섣불리 도와줬단 이유로 백금화 2천 개를 손해 보았고.

“타밀 자작이 만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은행의 피해를 보상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밀 자작은 영지의 경제체제가 초토화되었으며 끝내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굽혀야 했다.

아마 이번에 타밀 자작과 윌리엄 백작이 돈에 얻어터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중간한 판단으로 나를 건드리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그들이 나를 무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 피해를 보는 것은 무조건 자신들이라고 말이다.

“경제 부분에 강제조항이 거의 없다 보니, 생각보다 편하네.”

더불어 자금 손해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마진을 남기지 않고 팔고 때론 손해를 감수하기도 했지만, 타밀 자작령의 물가를 폭등시켜 이윤을 크게 본데다가 윌리엄 상단과 경쟁을 하면서 새로운 판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덤핑도 상술의 일종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퀘스트나 수련 등 할 것을 하면서 클로이의 보고에 따라 상회에 지시를 내릴 뿐이었으니, 힘든 것도 없었다.

“클로이가 복이네.”

내 말에 클로이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지난번 정보길드의 남부총괄이라는 자이리톨인가 뭐시기를 제거하고 녀석의 세력을 상당 부분 흡수하면서 공석이 된 남부총괄의 후보자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클로이에게 길드 내 서열을 매긴다면 무조건 10위 이상.

아직 공식적인 서열은 아니지만, 곧 1급에서 특급 정보관이 될 인물이다 보니, 윌리엄 백작과 타밀 자작과의 정보 교란전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덕분에 더욱 편하게 경제 부분에 제재를 가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클로이였다.

“뭐 원하는 거 없어? 상을 주고 싶은데?”

이미 많은 것을 주고 있는 내가 이런 말까지 한다는 것은 어떤 어리광이든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그에 클로이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나중에 상을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편한대로 해.”

어차피 그녀는 내게 피해를 줄 리가 없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시간이.”

귀찮은 일이 마무리되었단 생각에 나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마도 시침(시계)을 꺼내 들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네.”

쩐의 전쟁도 중요하긴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중대한 약속이 있다.

내가 외출준비를 시작하자, 클로이가 옷매무새를 살피며 물었다.

“성녀님을 뵈러 가십니까?”

“응.”

이제부터 성녀를 만나기 위해 이타루스 왕국의 주신전에 향한다.

약속이란 가이아 교단에 의뢰했던 패러사이트 탐색 방법에 관한 답변을 듣기 위함이다.

“분명 원하는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마워.”

패러사이트 사태가 시작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퇴치 상황은 답보 상태.

하지만 대주교가 통신으로 귀띔해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란 말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다녀올게.”

부디 지구의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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