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07
49. 거상 (1)
“제길! 두고 보자!”
며칠 사이 볼이 핼쑥해진 하인츠 백작가의 소영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또 오진 마라.”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며 부들거리는 소영주.
가신들에게 끌려가다시피 영주성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녀석들이 두고 간 백금화 천 개가 든 상자를 옆에 있는 클로이에게 넘겼다.
“이걸 왜 저에게.”
선물로 주는 게 아니다.
점점 상대해야 하는 인물들이 거물이 되어가는 만큼, 정보망 구축에 더욱 힘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뿐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벌이도 커진 만큼 앞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야. 케일론 정보길드 내에서 최대 세력을 만들어 봐. 아예 정보길드를 사유화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지금도 꾸준히 자금을 대고 있지만, 엄연히 따지면 클로이가 요청할 때에만 투자하고 있다.
지금까지 정보길드의 사용처는 대부분 업무와 관련이 있었기에 모든 정보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국내의 권력다툼이 발생하면 정보 길드 내에서도 파벌에 따라 활동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때 원하는 정보를 못 얻거나, 위조된 정보를 얻게 되면 큰일이니, 더욱 이쪽을 크게 키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분명 옳은 말씀이시지만, 상회를 키우는 게 더 급한 것 아니신지요?”
“당장 1천 골드 없다고 흔들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그러하시다면…….”
결국 그녀는 내가 건넨 백금화 천 개를 아공간에 수납했다.
나는 그런 클로이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클로이.
홍차를 좋아하는 그녀는 세신 용품도 홍차향을 쓰는지, 살결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클로이 말이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않아?”
그런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물음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클로이가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내겐 진실의 눈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혼자서 고민을 안고 있는 건 날 너무 무시하는 거 같은데?”
똑바로 눈동자를 응시하는 내 모습에 클로이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는 이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길드에 저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대충 분위기로 보아 직감적으로 어떤 문제인지 알아챈 나는 짧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군.”
“네…….”
“누군데?”
짜증이 담긴 물음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정보길드의 남부총괄 자일롯입니다.”
“남부총괄?”
꽤나 높아 보이는 직급이다.
“정보길드 서열 7위에 해당하는 특급 정보원이죠. 저도 서열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아직 30위 정도일까요.”
30위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근래 활발한 활동이 영향을 준 모양.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서열이 아니다.
내가 자세히 설명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횡설수설하며 설명했다.
“제가 예전에 자일롯 밑에서 일을 했었거든요. 음……. 저는 그때 위로 올라가기 위해 필사적이던 때였고, 자일롯는 그만한 힘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서…….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는 그를 이용했을 뿐이지. 애정 같은 것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손을 떼게 만들었고요.”
“그런 거군.”
애초에 클로이는 내게 영입을 청해왔을 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이 뮤 대륙에서 여자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었다고.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존문제였기에 나는 과거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전 남친이라 해야 하나?
자일롯인지, 자일리톨인지, 정보길드에 소속된 인물이 클로이가 내 것이라는 걸 모를 리도 없다.
이건 누가 봐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클로이의 머리에 손을 얹은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죽일까?”
참고로 이건 애인의 전 남자에 대한 질투가 아니다.
아마도?
“네?”
내 물음에 그녀는 절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자일롯은 정보길드의 고위 간부 중 한 명입니다. 그런 인물을 건드렸다간 자칫 역풍을 맞으실 수도 있어요. 왕족도 정보길드와의 반목을 원치 않는다고 할 정도인데요.”
“그렇다고 지켜만 볼 수도 없잖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자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비명횡사하면 지훈 님이 의심받을 게 뻔하잖아요. 다른 길드를 이용하면 사전에 알아챌 가능성도 있고, 녀석을 증거 없이 처리할만한 실력자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짧게 혀를 차자 클로이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녀석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부끄러운 과거를 직접 정리하겠습니다. 지금의 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지훈 님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시금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잘 알고 있네.”
***
케일론 정보 길드 남부총괄 자일롯.
그는 정보 길드보다 도둑 길드가 더욱 어울릴 스타일의 인간으로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보다 위의 사람을 떨어뜨리고, 능력이 되는 아랫사람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스타일이다.
최근 그런 자일롯의 레이더에 걸린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오래전에 똘똘해서 잘 애용했던 클로이란 여성 정보원이다.
그녀는 수집된 정보로 진실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뛰어났으며, 우월한 외모를 갖고 있어서 곁에 두기 좋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할 줄 알았으나,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으며, 그녀를 품기 위해선 정말 많은 것을 양보해줘야 했다.
그런 성향 때문에 능력이 있음에도 자일롯이 제풀에 지쳐 클로이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놓은 게 아니라 클로이가 일부러 놓게끔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롯의 밑에서 기반을 다진 클로이는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여 여성 최연소로 1급 정보원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왕국의 신성 베르트 남작의 총애를 받으며 무서운 기세로 자일롯의 영역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몇 달만 더 시간이 흐르면 남부총괄이란 자리를 클로이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천운이라 해야 할까?
위로 치고 올라온 지금의 클로이에게 있어 자일롯의 존재는 약점이자 오점이었다.
‘이야, 우리 클로이 결국엔 제대로 된 남자 물었네? 역시 그 출세욕은 누구도 이길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자일롯은 다시금 클로이에게 손을 뻗었다.
‘베르트 남작이 네 과거를 알게 되면 불쾌하게 여길 텐데?“
처음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베르트 남작의 이름을 들먹이자 자신의 돈줄이 떨어져 나갈까 걱정이 되었는지 클로이도 조금씩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우리 예전에 좋았잖아? 괜히 얼굴 붉히지 말고 잘 지내보자고. 너하고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자일롯은 클로이에게 우린 공범이란 전술을 사용했고, 결국 못 버틴 클로이가 넘어올 것처럼 보였다.
‘후, 11시까지 엘클로 바(Bar)로 오세요.’
‘하핫! 좋아. 그래야지.’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함락되었다는 생각에 근래 들어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희열을 느꼈다.
아무래도 지금의 클로이가 꽃이 만개한 듯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군침을 흘릴법한 미모와 특유의 분위기는 자일롯의 이성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자일롯은 유쾌하단 표정으로 엘클로란 이름의 ‘바’로 향했다.
“뭐, 뭐야?”
“일어나셨군요. 자일롯 님.”
분명 클로이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분위기 좋은 바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도시 밖의 어느 폐가에 사지가 결속된 채 오크통에 들어가 있었고, 클로이는 그런 자일롯을 내려다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년이 단단히 미쳤구나!?”
자일롯은 심장이 요동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애써 호기롭게 외쳤다.
“미친 건 너고. 쓰레기 새끼.”
그러나 클로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휘둘렀다.
-짜악!
“큭!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나 지역 총괄이야. 감히 상사를 담그려 하다니. 창관에 팔려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협박이 통한 걸까?
클로이가 채찍을 접고 팔짱을 낀 채 자일롯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런데 그녀의 옆으로 귀족처럼 보이는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장로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그는 바로 정보 길드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장로였다.
장로는 손에 쥔 지팡이로 오크통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주제 파악이라도 해야지. 넌 너무 나갔다. 현재 베르트 남작은 길드의 아주 중요한 재원. 감히 이를 흐트러뜨리려 하다니.”
“오, 오해십니다.”
“베르트 남작 건만이 아니다. 과거의 저지른 온갖 패악 짓을 클로이가 아주 보기 정리해 놓았더구나. 이는 하루이틀 만에 모은 자료가 아니었다. 네 녀석의 목을 조를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지.”
자일롯은 악에 받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 헤픈 년의 말을 믿습니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도 아무렇지 않게 굴리던 년입니다!”
그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클로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끼고, 장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이가 헤프다니, 그렇지 않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안겨 오지 않는다고 손을 뗐던 녀석이. 물론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서 성장한 것은 맞다. 하지만 네놈과 달리 능력은 진짜지.”
“큭.”
자일롯은 클로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차갑게 자일롯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 행복을 위해 이제 꺼져 주셔야겠습니다.”
“뭐, 행복?”
그녀와 너무도 안 어울리는 단어.
“네년 설마 베르트 남작에게 진심인 게냐?”
클로이가 아무런 답을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자, 이 순간 자일롯이 느낌 감정은 분노보다 허탈함과 질투심이 밀려 왔다.
그녀에게 작업을 걸면서 진심으로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군, 눈에 독기로 가득 차서 위만 바라보던 년이 로맨스라니.”
그녀는 더 이상 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장로를 바라보았고,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클로이가 손가락을 튕기고 뒤쪽에서 나타난 거구의 남성들이 자일롯에게 다가갔다.
***
“고생했어.”
“네?”
뜬금없는 말에 반문하는 클로이.
내가 말없이 등을 두들기며 위로하자 그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해내질 못하겠군요.”
관심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의 감정은 잘 캐치 해내는 편이다.
그녀가 전문가라곤 하지만, 하루 이틀 봐온 것도 아니고 근래엔 가족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클로이의 얼굴만 봐도 현재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일리톨은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어?”
“제거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늑대가 뼈를 핥고 있을 테죠.”
“그래?”
죽음이란 단어가 너무 가벼운 세상.
하지만 지구도 곧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순삭된 엑스트라에 대해 신경을 끄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내 제안을 정보 길드에서 받아들일 것 같아?”
“곧 승인될 것 같습니다. 길드 지도부는 지훈 님의 사업은 무조건 협조하라는 식이라서요.”
“나름 신뢰도를 쌓았단 건가?”
“지훈 님의 사업수완을 높게 평가하는 거죠.”
사업수완이랄 것도 없다.
지구의 지식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니.
단지 다른 수행자들보다 한발 빨리 움직여 고지를 선점하고 황금 탄환을 난사할 뿐이다.
“그런데 신문이라는 게 돈이 되겠습니까?”
“당장은 크지 않지. 그런데 이게 온전히 자리를 잡으면 정보 길드의 특성을 살린 고정수입이 생기는 거잖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물론, 이건 동업이다.
베르트 상회와 정보길드의 동업.
더불어 베르트 상회가 각국 수도에 대형 인쇄소를 갖추고 있는 만큼 이 제안은 케일론 정보길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귀족과 준 귀족, 상인을 중심으로 신문을 꽤 비싸게 판매하고, 주간지와 월간지를 책자로 판매할 생각이다.
“그리고 신문 자체의 판매 수입도 꽤 되지만, 그 신문을 통한 광고 수입도 무시할 순 없지.”
“그렇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서며 잘 가꿔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엔 정원사들이 한참 무언가를 심으며 조경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정원사들이 나를 발견하곤 모두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었다.
가볍게 손을 흔든 나는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댔다.
“2왕자의 제안에 대한 다른 계획은 없으십니까?”
신문은 대형 인쇄소를 차리면서 원래 진행하려던 사업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2왕자가 말한 왕국 제일 상단이 되는 것은 무리.
물론, 많은 돈을 벌게 해주겠지만, 빠르게 수익을 창출하려면 작정하고 돈을 긁어모아야 한다.
은행을 어떻게 굴려보고 싶지만 지금 단계에서 은행을 활용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아직은 예치금도 많지 않고, 그 예치금을 활용할 투자처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은행이 내 상회에 직접 투자를 하는 것도 좋지만, 원래부터 상회는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일단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긴 한데.”
우려 섞인 표정의 클로이는 내 대답에 ‘역시’라며 내용도 듣지 않고 미리 감탄사를 터뜨렸다.
클로이가 그게 뭐냐며 궁금함을 표하자 두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영지 내에 카지노 만들기.”
“카지노라 하시면?”
“대규모 도박장이지.”
“네?”
도박장이라면 대부분의 영주가 금지하고 있는 사업이다.
그래서 범죄조직들이 음지에서 은밀히 활동하는데, 영주인 내가 아예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박장을 육성하면 돈이 꽤 될 것이다.
더구나 내가 그리는 건 상류층을 위한 놀이터다.
“하지만 귀족이 왕국 내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말대로 카지노를 만드는 순간 사방에서 비난이 빗발칠 것이다.
이 세계는 마약에 대한 기준은 없으면서 도박에 대해선 굉장히 깐깐했다.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도박인 듯 도박 아닌 것 같은 시스템을 추가로 생각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클로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