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100
45. 성녀 (2)
아무래도 중세 배경을 한 판타지 세계를 떠올리면 종교는 부패하여 속이 고름으로 가득 차 있고, 사제는 신자들을 현혹하여 돈을 뜯어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뮤대륙의 교단들도 어느 정도 부패와 권력다툼은 있지만, 그 수준은 결코 심하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을 떠올리면 오히려 청렴하다고 생각이 될 정도.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절대 권력을 쥔 가이아 교단의 성녀 때문이다.
성녀는 혈통이나 전략적 가치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주신 가이아의 선택에 의해 정해진다.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며 성녀가 부패의 길에 접어든다면 바로 힘을 잃기에 신념을 관철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주신 가이아는 성녀 한 명만 제대로 관리하고 나머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녀에겐 소드 마스터급의 수호자 3명을 만들 수 있는 권능이 쥐어지는데, 이 힘은 성녀가 언제든지 다시 거둬들일 수 있기에 수호자들은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다.
최고위 성직자인 성녀와 마스터급의 성기사인 수호자 3명의 조합이면, 전설 속 그랜드 마스터나 9클래스급의 마법사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이런 4명이 교단의 머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먹겠는가.
때문에 뮤대륙의 종교는 비교적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수행자 지훈 님.”
나는 눈앞의 아름다운 성녀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뮤대륙의 예법에 맞춰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리엘 예하.”
신성 이타루스 왕국 주신전.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건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일전에 드워프 촌장인 쿠루스는 오리하르콘 무기를 만들 때, 성녀가 옆에서 거들면 최고의 무기가 만들어질 거란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성녀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의 위치는 제국의 황제와 동급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비록 수명이 짧고 권력을 오래 유지 못 한다지만, 미드 랜드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단의 성녀는 황제 이상으로 우러러보는 존재였다.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소녀와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성녀의 눈부신 미소에 주책스럽게 가슴이 뛰었지만, 특유의 포커페이스는 변함이 없었다.
10대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성녀는 저래 보여도 36살이다.
뮤대륙에선 16살이 성인이니 빨리 결혼했으면 할머니 소릴 들을 나이.
아무래도 그녀의 미소엔 어떤 힘이 담겨 있을 것 같다.
마음을 추스른 나는 애써 무심한 눈빛을 띄우며 답했다.
“설마 이리도 갑자기 존귀하신 분을 뵐 수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해서…….”
예상치 못한 성녀와의 만남.
케일론 왕국 수도의 대신전에서 의외로 쉽게 대주교를 만난 나는 현 상황에 대한 상담을 했고, 그가 전문가를 소개해준다며 보낸 곳이 바로 이타루스 왕국의 주신전이었다.
내 대답에 그녀는 다시금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슬쩍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선 두 남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호 기사단 단장 크리드 추기경, 이타루스 왕국 총 사령관 다르닐 추기경.’
그들이 바로 이타루스 성왕국과 교단을 수호하는 마스터 팔라딘으로 성녀가 죽으면 힘을 잃는 기간 한정 마스터였다.
하지만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막강한 힘은 진짜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마치 태산을 마주한 것만 같았으니.
“교단에선 수행자들의 리더인 지훈 님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행하신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죠.”
당연히 내가 행한 일이란 걸림돌이 될 수행자들을 제거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수행자는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졌고,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습니다.”
“반대 세력을 척결하여 억지로 만든, 단일 세력이 아닌가? 힘으로 수행자들의 무릎을 꿇려 그 위에 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총사령관인 다르닐 추기경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못 미쳐도 익스퍼트 최상급 중에서도 상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다르닐 추기경의 기세에 위축될 것 없이 소신을 밝혔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 처리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며, 수행자들은 더욱 힘든 생활을 이어갔을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이 없었다곤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로 인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내켜서 리더 역할을 하는 줄 아나.
엄연히 따지면 이것도 효율을 위한 선택이지, 바래서 수행자들의 우두머리가 된 게 아니다.
그들 입장에선 합리화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시 과거에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르닐 추기경 그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예하.”
“따로 그 건에 대해 책잡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가이아 님의 큰 뜻이겠죠.”
내 입장에선 수행자들을 굴리는 성격 나쁜 신이지만, 굳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급하신 듯하니, 서론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감사합니다.”
“상황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지구의 환경에 대해선 숙지하고 있으니, 배경설명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성녀답게 그녀는 우리 수행자들에 대한 이해도가 일반인과 전혀 달랐다.
“그럼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이어서 나는 이란 사태부터 시작해 이형구와 패러사이트 사태까지 말했다.
이야기는 간추렸기에 10분 만에 끝이 났지만, 그녀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성녀가 답했다.
“패러사이트가 맞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른 추측.
하지만 그녀는 확신 어린 표정으로 단정했다.
“패러사이트는 감염 즉시 부화할 수가 없습니다. 패러사이트는 무마력의 공간에서도 부화까지 3일이 필요하며, 마력이 존재하는 곳에선 부화까지 약 2주의 시간이 걸리죠. 즉, 그 남성분은 이미 감염된 상태에서 패러사이트를 준성체까지 키웠고, 안개 속에서 부화를 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책에서도 패러사이트가 마력에 약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수행자에게 시련을 주기 위함이라면 신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희망을 담은 내 말에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발상이 재밌군요.”
내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하지만, 성녀는 신에 대한 의심 자체가 없다 보니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신기해할 뿐이었으나 양옆에 선 두 수호자는 ‘이게 감히?’란 표정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역시 광신도는 무섭다니까.’
성녀는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줬다.
나라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성녀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을 보며 새삼 그녀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볼까요?”
“직접 말입니까?”
내가 의문을 표하자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패러사이트와의 전투에 사용한 무기를 보여주시겠어요? 그 무기에 남은 마기의 잔재로 과거를 살피겠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괜히 성녀가 아니랍니다.”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확인 법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나는 큰 고민 없이 네비노스트를 소환하려 했는데.
이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오리하르콘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신기로 칭해진 장비를 생각 없이 꺼내도 될까란 걱정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봐선 수행자와 반목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리고 도움을 청하러 온 입장에서 이 이상 그녀를 불편하게 해서 좋을 게 없다.
결국, 나는 침을 쓰게 삼키며 ‘네비노스트’를 소환했다.
“여깄습니다.”
당연하지만 창이 등장하고 건네지는 순간부터 성녀를 포함한 수호자 두 명의 표정이 재밌게 변했다.
“허…….”
“세상에.”
“지훈 님께서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신기의 주인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신기는 운이 좋아 얻어지는 것이 아니죠. 하물며 오리하르콘은 주인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오리하르콘을 얻은 게 우연이 아니란 건가?
“신기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오리하르콘이 지닌 신성력 때문에 마력의 잔재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무기 말고 체액이 묻었던 다른 장비가 있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건틀렛을 꺼낼 걸 그랬다.
얼떨결에 무기 자랑을 하게 된 나는 얼른 네비노스트를 수습하곤 카르디스의 건틀릿을 건네주었다.
“신기에 이어 이번엔 왕가 보고에나 있을 법한 건틀릿이군요.”
이어서 성녀가 건틀릿 위에 손을 포개고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은은한 새하얀 빛이 건틀렛에 머물렀다.
그렇게 10여 초가 흐르고.
스르륵 눈을 뜬 그녀는 건틀릿을 건네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 남성의 형제에게 감염된 겁니다.”
나는 작게 침음을 토했다.
성녀가 허튼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으니, 의심은 사실로 바뀌게 되고 자연히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갑지기 불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성녀.
그리고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말을 이었다.
“지훈 님께 사살된 패러사이트는 지시를 받아 움직인 흔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패러사이트 퀸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은 거죠.”
진짜 왜 걱정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말까.
신기의 덕택인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호감이 느껴지는 성녀가 걱정 말라며 위로하듯 말했다.
“본 교단과 휘하 17신의 교단이 전력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
[성수 제작 각인]
-대량의 성수를 만들 수 있는 신성 마법이 깃들어 있다.
-1회성 스킬
나는 손등에 새겨진 각인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당장 패러사이트를 퇴치할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패러사이트를 탐색할 방법은 마련했다.
성녀가 직접 만들어 준 이 각인을 사용하면 수백 톤의 물을 일시에 성수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수를 패러사이트의 숙주에게 뿌리면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인 것처럼 고통스러워한다.
물론 패러사이트는 몸속에 있기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숙주의 반응으로 패러 사이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탐색 능력을 손에 넣었지만, 패러사이트의 처리에 대해 생각하면 또 골치가 아파진다.
아직 유충 단계의 패러사이트라면 숙주에게 성수를 먹이기만 하는 것으로 소멸시킬 수 있지만, 발견이 늦어지면 조기 부화를 하게 될 것이다.
패러사이트는 부화한 즉시 처리하지 못하면 지난번처럼 순식간에 완전한 성체가 되어버린다.
성체인 패러사이트를 제거할 수 있는 수행자는 나뿐이고, 군대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못해도 전차나 자주포 이상의 화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보 통제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아마 아직은 패러사이트의 개체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 거겠죠.’
패러사이트에게 시간을 주면 줄수록 상황이 안 좋아진다.
때문에 잡음이 발생하더라도 초반에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성녀가 대주교들을 통해 모든 수행자에게 1회용 성수 제작 스킬을 내려준다고 했으니, 지구에서의 물량은 충분할 것이다.
어째 모든 것이 순조로운 뮤대륙보다 지구에서의 일 처리가 더욱 빡세진 느낌이다.
성녀가 교단 차원에서 이번 사태의 해결 방법을 알아봐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보면 더 나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 무식한 방법을 고수 할 수밖에 없다.
전 국민에게 성수를 뿌려야 하는 것이니, 머리를 잘 굴려 봐야 할 것 같다.
***
[충격! 메르스 사태와 비교할 수 없다. 치사율 50%의 강력한 전염성을 지닌 생물학병기 FYP가 국내에서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같은 상황! 세계 32개국 정부가 협력하여 비밀리에 토벌 중이던 악질 테러 단체의 소행으로 밝혀져!]
[해당 테러단체는 ‘커크’란 종교에 소속된 극진 단체. 커크는 지구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종교로 정화를 위해 인간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각국 지하조직 상당수가 커크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보유한 자금 규모 역시 상당한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정부, 오늘부터 당장 전국에 방역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며 예방할 수 있는 약품을 배포할 예정이다.]
국가는 잠시 혼란을 겪겠지만 패러사이트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나는 효과적인 성수의 사용법을 고민해야 했고, 결국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사에 참여를 하게끔 공포감을 조성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게 거짓말인 만큼 대국민 사기극이라 볼 수 있지만, 이 방법 외에 효과적으로 패러사이트를 조사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패러사이트가 퀸의 명령을 받으면 이 조사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은데?”
서울 용산구 고등학교에 마련된 패러사이트 검사센터.
조사가 진행 중인 각 교실의 창문은 밖에서 볼 수 없게 가려져 있으며, 한 명씩 밀실에서 조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모든 교실의 풍경을 살필 수 있는 CCTV실에 앉아 인식이의 물음에 답을 했다.
“오히려 좋지, 검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패러사이트일 확률이 높은 거니까.”
주민등록이 확실한 대한민국에선 바로바로 용의자를 좁힐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전 국민의 검사가 이뤄진 다음의 이야기지만.
“협력하지 않는 국가도 있지 않아?”
“이란을 포함한 중동 몇 개국이 있긴 해. 일단 FYP를 이유로 주변 국경을 봉쇄하고 있어.”
다소 강압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국가의 지도자들도 패러사이트 사태가 세계적인 위기라 판단하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