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88
40. 뇌물 (2)
하지만 S전자의 부회장은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조심히 다가와 작게 귓속말을 건네왔다.
“아시겠지만, 우리 S전자는 세계 최고의 첨단 연구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전기 관련 연구도 분명 크게 빛을 볼 겁니다.”
S전자의 정보력이 국정원 수준이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건 청와대 핵심부에 끄나풀을 심어놨다고밖에 볼 수 없다.
대통령이 직접 알려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D-DAY 이후 몬스터의 등장과 함께 첨단 산업이 종말을 맞이하게 되면 어차피 이들의 가치는 크게 떨어져 나갈 테니.
“안 그래도 반도체 때문에 고민이 많긴 합니다.”
안개 속에서 전자제품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다름 아닌 반도체.
당혹스럽게도 반도체가 뮤대륙의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부도체에 가까울 만큼 전류를 차단하기 때문에 장비를 먹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시군요. 그런 거라면 전문가가 옆에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S전자 부회장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는 자신들이란 표정으로 웃어 보였으나, 이어진 내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굳이 남의 배를 불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차라리 그 연구진을 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성과를 달성한다면 어느 정도 지분을 인정해드리지 못할 것도 없는데.”
덕분에 차가운 그의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나도 태연하게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차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안개 속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조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저뿐이거든요.”
아무래도 뮤대륙의 환경(안개, 던전)에선 몇 가지 원료에 이상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다.
흔히 반도체로 많이 쓰이는 소재도 그렇고, 원자력발전에 필요한 우라늄, 플루토늄도 그렇고.
마치 뮤대륙과 지구의 파워밸런스를 맞추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거야 원…….”
S전자 부회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의외로 거절하지 않고 한번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이 나가고 난 다음에도 응접실을 나서지 않고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정우와 김선아에게 물었다.
“제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김선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올바른 대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변하는데 굳이 기존기득권자들을 품을 필요는 없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란 거군요.”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국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굳이 권력을 분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내 생각을 짚는 김선아의 이야기.
하지만 정우는 조금 시선이 다른 듯 보였다.
“그런데 D-DAY 이후로 완전히 전자 산업이 죽는 거야?”
아무래도 기존 반도체를 대체할 소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지구의 기술은 자연적으로 기계공학 시절로 돌아가게 되는 것.
하지만 반도체를 대체할 소재를 발견하거나 개발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 지구의 수준을 생각하면 빠르게 기술적 피해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살짝 회의적인데.
요즘 들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만큼, 신이 지구의 현대 기술을 고스란히 돌려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거였으면 빼앗질 않았을 것 같달까?
“뭐, 전자 산업이 죽더라도, 저들이 마음먹고 기계 산업을 대비한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건 이미 정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방위산업체 설비를 기계화하여 꾸준히 무기를 만들 수 있게 하고, 수동 차량, 엔진 비행기 등 마치 2차 세계 대전을 연상시키는 장비들의 설계도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기업이 아닌 국가 주도로 운영할 생각을 하고 있다.
“몬스터로부터 국민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선 정부의 힘이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괜히 독재체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걱정이 드네. 재벌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권력을 분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국가의 권력을 분산하는 세력으로 연맹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가 나서도 현대 장비 속에 보호받는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런 우리가 억제제가 되어 나라 문제를 잘 조율하면 되는 것 아닐까?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지 않나.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도 정우는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수행자들의 리더인 네 의중에 따라 나라가 움직일 거 아냐. 그것도 별로 좋진 않을 것 같은데.”
정우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나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확실히 재벌들의 세력 보전을 내켜 하지 않으면서.
정작 나는 위로 올라가려는 모양새가 이기적으로 보일만 한다.
‘상관없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나는 세상의 미래보다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안전할 수 있다면 정적을 밟아서라도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불어 굳이 재벌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국가기관의 힘만으로 충분히 이 좁은 땅덩어리의 산업 인프라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무역, 경제보단 식량과 생존이 우선시되는 시대가 올 테니.
“그렇긴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야지. 연맹이 잘못 나간다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세력이 없게 되잖아.”
“그건 그렇지.”
정우의 이야기에 수긍한 나는 한번 이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은 D-DAY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나 그 뒤의 일도 무척 중요하다고 볼 수 있으니.
나는 고맙다며 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녀석의 이야기에 긍정을 하고 나서니 이번엔 김선아가 뭔가 불만이 있어 보였다.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대충이나마 그녀의 생각이 예상되었다.
내 열렬한 지지자인 그녀는 나라면 권력이 집중되어도 그른 일은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게 뻔했다.
***
오늘은 부천과 인천을 탐색한다.
여전히 은신을 쓴 채로 길을 따라 날아다니면서 마력 탐색을 사용하는데, 나를 포함한 수행자 21명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던전을 발견하지 못했다.
던전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보상을 생각하면 살짝 아쉽지만, 또 안전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그렇게 얼마나 날아다녔을까?
-지이잉.
갑자기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에 무슨 급한 소식이 있나 싶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는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예전엔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주의였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서 중요한 용건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만큼, 상가 옥상에 내려서며 전화를 받았다.
“네, 조지훈입니다.”
-수행자 연맹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ST그룹 회장인 한영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건네온 거물의 전화에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귀찮게 하네.’
그는 국내 대기업 총수 중에서도 가장 꺼려지는 인물이었다.
이유는 바로 전에 내가 다니던 대기업이 ST통신이었으니.
“죄송합니다. 용건만 알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외부에 나와 있는데 꽤 바빠서요.”
-실례했습니다. 실은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서요.
“저는 딱히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ST그룹은 세계 최고수준의 통신 기술과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현재 고민을 해소하는 데 충분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자기들끼리 정보라도 공유하는 걸까?
S전자 부회장을 떨쳐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전화가 걸려오니 황당했다.
그래서 나는 S전자 부회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정 도움을 주고 싶으면 연구진과 설비만 내놓으라고, 그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낸다면 조금의 지분은 인정해주겠다고.
그에 ST그룹 회장은 고민하는 듯한 추임새를 넣더니, S전자 부회장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고 대답했다.
괜히 시간만 빼앗겼단 생각에 전화를 끊으려 했는데, 한 회장이 급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
-회장님께서 이전에 우리 회사를 다니셨더군요.
“네, 최악의 형태로 쫓겨났죠.”
-그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대신이라기에 뭐하지만, 그 일에 관련되어 있던 관계자들은 모두 해고처리를 했습니다. 더불어 연맹 회장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이것저것 조치를 하고 있죠. 조금이라도 분이 풀리셨으면 합니다.
뜬금없이 뭔 소린가 했더니, 박상호 팀장을 비롯한 간신배들이 잘렸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운 데다가, 지금은 별다른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도 꼬리 자르기가 분명한데, 고마워할 이유도 없고.
“그러시군요. 바빠서 이 이상 용건이 없으시면 먼저 끊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황하며 이야기를 더하자는 한 회장의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잘렸다고?”
평생 상부에 꼬리를 흔들며 버틸 것 같던 인물이 나와 불편한 관계란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내쳐지고 말았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약 5시간 동안의 탐색을 마치고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천은 생각보다 넓어서 아직 다 돌진 못했지만, 내일 인천을 마무리하고 김포부터 시작해 경기도 북부지역을 시계 반향으로 돌 예정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탐색 시간이 월등히 빨라서 아마 경기도 전역은 내가 담당하게 될 것 같다.
-이야기 들었네. 오늘 여러모로 바빴다지?
나는 집 앞에서 하성훈 대통령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시죠. 결국 10대 그룹과 모두 이야기를 나눠 본 것 같습니다.”
-미안하네, 회의 중에 이야기가 빠져나간 것 같아. 아무래도 내 측근 중에 재벌가의 개가 있는 것 같군.
“원한다면 걸러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이건 나의 일이야. 청와대에서 처리하지. 불편함을 줘서 미안하네.
이렇게 이야기가 잘 새어 나간다면 오래지 않아 국민들에게 현 상황을 들키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데 자네에겐 이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죠.”
-10대 재벌가에서 기부금을 내놓더군, 한 곳도 빠짐없이.
기부금?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헛웃음을 흘렸고 대통령은 내 예상이 맞다며 말을 이었다.
-연맹 운영에 써달라면서 단 하루 만에 모인 돈이 1조가 넘어. 그리고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주 정기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겠다는군.
좋게 말해 기부지 이건 누가 봐도 뇌물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 재벌이라 해도 1조란 돈을 잡음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걸까?
-그냥 받아도 될 거야. 어차피 모두 은닉자산이라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돈이거든. 그런 돈으로 떳떳하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지.
해외도피 자산이란 건가?
하긴 나중에 가선 그 돈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미리 회수해놓는 편이 낫겠지.
그런데 그 돈을 기부라며 내놓는 것이 참…….
우리나라 재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알겠습니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굳이 ‘기부금’이란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돈은 모자란 것보다 당연히 많은 것이 좋다.
당장 돈에 쪼들리는 건 아니지만, 확실하게 전 세계 수행자들을 지원할 수 있을 테니.
“제가 알기론 우리나라의 해외 도피자산이 수백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철두철미한 재벌가라면 미리 돈을 회수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에 수백조를 옮기는 것은 무리여도 꾸준히 옮겼다면 그 금액도 무시할 수 없을 터.
내 물음에 대통령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정부도 상당한 기부를 받긴 했지.
그럼 그렇지.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재벌들의 모습이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진다.
***
계승 귀족이 되면서 내게 내려진 바리스 영지.
그곳은 이제 내 이름을 따서 베르트 영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지의 수도인 바리스 시 역시 베르트 시가 되었다.
그런 베르트 시 중심에는 훌륭한 영주성이 위치 해 있는데, 새로이 기사와 사병이 대거 추가되면서 제법 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지를 가진 계승 작위 남작이 보유할 수 있는 기사의 수는 20명.
기존에 보유한 기사가 5명이었으니, 추가 15명을 임명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클로이의 도움으로 상급 익스퍼트 4명, 중급 익스퍼트 11명을 기사로 맞이했다.
보유 최대치가 5천 명인 사병은 500명 정도밖에 못 채웠다.
그래도 영주 성과 베르트 시의 치안을 유지하기에 500명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어디까지나 치안이 아닌 군사력을 위한 병력이었으니.
실제로 남작이 1천 명 이상의 사병을 보유한 가문은 몇 되지 않았다.
“회장님, 데려왔습니다.”
영주 성 내성엔 옥좌를 연상시키는 영주의 좌가 있고, 그보다 눈높이가 낮은 단상 아래 기사들이 2열로 줄 맞춰 서 있다.
기사들의 자리에는 김선아도 위치해 있었는데, 그라프가 오른쪽 선두, 김선아는 좌측 선두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내 기사긴 하지만, 연맹의 부회장이기도 한 만큼 이럴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자신이 빠져버리면 짝이 안 맞는다면서 굳이 기사들과의 동석을 자처했다.
어째 점점 내 충신이 되어가는 느낌의 김선아였다.
아무튼, 그렇게 기사들을 2열로 도열시킨 채 영주의 좌에 앉아 있던 나는 남성 둘을 내려보았다.
“의외네요, 끌려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찾아오다니. 사지가 될 수도 있다는 거 모릅니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는 나츠오와 니콜라이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츠오와 니콜라이는 어스클랜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시간 모순 퀘스트 당시 대량 암살을 주저하지 않던 내 행동에 위기감을 느끼고 내게 대응하기 위한 세력인 어스 클랜을 구성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를 지지하고 나선 세력, 즉 김선아의 트루스 클랜과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만 힘을 써왔는데, 이들과 나의 격차는 좁혀지긴커녕 훨씬 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어차피 우리의 생사여탈은 지훈 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래서 추하게 끌려오느니 떳떳하게 따라가는 것을 선택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