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79
36. 폭풍 전의 고요 (1)
정우와 인식은 연맹 일로 친해진 태영, 은우와 함께 반포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일식집을 찾았다.
“요즘 지훈이랑 어울리기 되게 힘드네.”
“지훈 선배께선 바쁘시니 어쩔 수 없죠. 그런 분이 같은 한국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 수행자들은 엄청 고생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 사람들도 도와주긴 해야 하는데.”
마검사로서 지훈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은우는 사석에선 지훈을 회장님이란 호칭 대신 선배님이라 칭하며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은우는 지훈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겼다.
판 전체를 살피는 뛰어난 식견과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력, 때로는 목적을 위해 냉혹한 면을 보이지만, 누구보다 같은 수행자들을 위하는 인물.
청와대까지 쳐들어가는 배짱과 사람을 이끄는 천성적인 리더쉽을 지닌 존재.
그것이 바로 은우가 생각하는 지훈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약간의 오해와 과대해석이 더해진 평가지만, 의외로 많은 수행자들이 연맹의 회장인 지훈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더불어 현재 제자인 태영 못지않은 전폭적인 자금지원을 받게 되면서 은우는 마음 깊이 지훈을 따르는 충실한 심복이 되어버렸다.
“그건 그렇지.”
“아마, 우리가 모르는 데서 엄청 고생하고 있을 거야.”
“그만한 능력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태영은 정우, 인식과 동갑이며, 은우는 두 살이 어리다.
그래서 사석에선 은우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세 사람이었다.
네 사람은 인당 30만 원이 넘는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중급 퀘스트를 수행 중인 태영과 은우의 벌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훈이 건네준 계약금으로 주식을 굴려 매일 수백만 원씩 벌어들이는 인식과 정우에게도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었다.
“술은 어떻게 하실래요?”
“차 있는데?”
“에이, 대리 부르면 되죠.”
“그럼 한잔할까?”
어차피 D-DAY까지 남은 기간은 두 달 남짓.
앞으로 큰 혼란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보니, 수행자들도 그렇고 인식이와 정우도 그동안 못 즐긴 인생을 지금이라도 즐겨 보자는 마인드가 강했다.
그래서 네 사람 모두 비싼 음식뿐만 아니라 비싼 옷에 비싼 시계, 억대의 수입차를 끌고 다녔다.
사실 할부라는 꼼수를 쓰고 있기에 예상보다 큰 목돈이 들어갈 일은 별로 없었다.
남들이 보면 허영심이 가득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이들만의 불안감을 떨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정신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게 네 사람은 음식과 술값만 금세 300만 원을 넘겼고, 그럼에도 아무도 가격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의 손님과 가게 직원들도 그들을 잘나가는 집안의 자식들로만 생각했다.
비싼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다고 모두가 부자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씀씀이는 절대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돈으로 이렇게 사치를 즐기는 20대가 사회에 얼마나 되겠는가.
“지훈 선배, 선아님과 사귀는 걸까요?”
“선아씨 좋지. 아마 연맹원 중에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 꽤 될걸? 선아씨는 확실하게 지훈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데, 지훈이는 조금 태도가 애매하긴 하지?”
“그런가요? 얼핏 보면 사귀는 것 같던데.”
술자리의 단골 소재인 이성 이야기.
조미료로 빠지지 않는 인물이 지훈이었다.
“어? 인식아, 정우야.”
그렇게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을까?
자신들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3명의 여성들이 서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친구라고 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남이라 하기에도 뭐한 그냥 아는 사람들.
그도 그럴 게 자신들과 친했던 초희의 친구들이었다.
“어…….”
얼떨떨하게 인사를 나눈 인식이와 정우는 그녀들의 시선이 빠르게 자신과 테이블을 훑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값비싼 차키들로 시선이 고정되며 갑자기 친한 척 사근사근 웃음을 흘렸다.
“와, 너희 되게 멋있어졌다.”
“그러게 길 가다가 마주치면 못 알아볼 것 같아.”
태영과 은우는 속 보이는 그녀들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보다 먼저 인식이가 말했다.
“우리 이제 초희랑 안 어울리거든. 초희한테 우리 만났다고 해도 그다지 좋은 반응 안 나올 거야.”
에둘러 말했지만,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명백한 거부반응.
그에 세 여성은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래? 그런데 여기서 초희랑 우찬이 만나기로 했는데?”
일반 직장인이 오기엔 부담스러운 가게.
무슨 기념일 같은 걸까?
“언제 오는데?”
“아마 금방 올걸.”
인식이와 정우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끝내자.”
사정은 몰라도 태영과 은우는 별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단적인 두 사람의 반응에 초희의 친구들은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는데, 정우는 미안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먼저 갈게.”
“그, 그래.”
그리고 인식이가 서로 계산하겠다는 친구들을 만류하고 계산을 끝냈다.
“우리가 왜 도망가듯이 자릴 피해야 하지?”
문득 인식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정우는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단 반응을 보였다.
“걔들이랑 안 엮이는 게 최고야. 분명 귀찮게 굴걸?”
지훈 이상으로 초희와 우찬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기를 사람들이 바로 정우와 인식이었다.
일전에 초희와 우찬이 술자리에서 대놓고 지훈을 무시한 후, 이 두 사람은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추하고 불쾌했으며, 인식이와 정우가 다시는 초희와 우찬이를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웃긴 건 취직에 고전하던 지훈이 투자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관계회복에 도움을 청해 왔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인식이와 정우에게 초희와 우찬이는 배신감을 넘어 더러운 존재로 낙인이 찍혔고,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아이 씨.”
하지만 드라마와 영화 등이 대개 그러하듯 이런 상황이 되면 꼭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피하고자 했던 상대를 마주하게 된다.
주차장 입구에서 우찬, 초희와 딱 마주친 정우와 인식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웬일이야. 이런데서 만나네.”
“정우야, 인식아, 오랜만이다.”
지훈은 스스로를 계산적이라 평가하지만, 적어도 인식이 생각하기에 가장 계산적인 인물들은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오는 모습이 무서울 정도.
“쯧.”
혀를 찬 인식이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비켜.”
그리고 그대로 이들을 지나쳐 보란 듯이 자신의 차 키를 눌렀다.
그에 흰색의 포X쉐 파나메라가 깜빡였다.
이어서 정우 또한 어울리지 않게 자랑하듯 자신의 차키를 누르자, 람보르X니의 SUV차량인 우르스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주인을 반겼다.
우찬이와 초희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것을 본 두 사람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술기운을 빌려 분풀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창들에게 있는 말 없는 말 꾸며서 사람 하나 병신 만들더니, 이제 와서 실실 쪼개고 싶을까.”
“여긴 너희 월급으로 오기엔 너무 비싸지 않냐? 돈들 모아야지.”
조롱 가득한 모욕에도 우찬이와 초희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다가왔다.
하지만 인식이와 정우는 그 두 사람이 다가온 만큼 뒤로 걸음을 물렸다.
“야, 너희들 말이 심하다. 우리가 한두 해 알던 사이도 아니고, 진짜 평생 안 볼 거냐?”
이어진 것은 다 보는 사람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유치한 말씨름이었다.
“아아아, 안 들려. 뭐라고?”
“어디서 개가 짖나?”
귀를 막고 실실 웃는 모습이 꼭 초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인식이와 정우를 잠자코 바라보던 태영과 은우는 괜히 자신들이 창피해져서 괜히 슬금슬금 거리를 벌려야 했다.
결국, 짜증과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진 초희와 우찬이가 욕설을 내뱉으며 주차장을 벗어났다.
“물리쳤다 악귀들.”
인식이와 정우는 후련하단 반응을 보였으나.
이내 자신들의 추태를 떠올리며 죽고 싶단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순간 정떨어졌었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태영과 은우.
하지만 이어진 인식이와 정우의 대답에 두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두 놈이 지훈이를 뒤에서 욕하고 다니거든. 더구나 루머로 동창들 사이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어.”
“요즘엔 나랑 인식이를 다단계에 끌어들였다는 소문까지 퍼트리는 것 같더라.”
“미친놈들이네요?”
태영은 동갑이지만 지훈을 진심으로 스승이라 생각하고, 은우는 우상이자 흠모에 가까운 감정을 지닌 상대가 매도당하는 것을 감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저, 복통 일으키는 마법 있는데.”
은우의 이야기에 세 사람은 솔깃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아! 가자.”
그리고 예상대로 자신들에 대해 온갖 악담을 퍼붓는 우찬이와 초희에게 복통 마법을 사용하곤 네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도망쳤다.
세기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모처럼 통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
마력 탐색의 범위는 나를 중심으로 약 300미터, 반지름이 150미터다.
내가 30미터 높이로 날아다니면서 마력 탐색을 사용하면 지하 120미터까진 탐색이 된단 뜻이다.
그리고 현재 그런 방식으로 5시간 동안 무섭게 서울 곳곳의 길을 따라 날아다니며, 초당 1회꼴로 총 1만8천 회에 달하는 마력탐색을 사용한 결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서울엔 던전이 없구나.”
페가수스 부츠의 효과인 비행에 가속 마법을 더하고, 미친 듯이 탐색 스킬을 사용하니, 마력 소모가 보스 전에 준 할 정도였다.
덕분에 적지 않은 마력 포션을 사용했는데, 나중에 한국 정부에 마력 포션 값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추가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탐색하지 못한 사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 던전이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만큼, 서울엔 던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면적은 서울의 164배.
나 혼자만의 힘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내일부터 수행자들이 전국을 누비게 될 것이다.
탐색 능력이 있다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나와 같은 방법으로 조사할 수 있지만, 탐색 능력이 없다면 일일이 ‘신분증’이나 ‘지도’기능을 실행하는 식으로 노가다를 뛰어야 할 것이다.
던전 일대에선 뮤대륙의 기능이 온전히 사용 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한국은 형편이 좋은 편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지구에 대격변이 일어나면 가장 안전한 곳이 한국이다.
한국은 국토가 작은 데다가, 좁은 땅에 많은 군인을 보유하고 있다.
더구나 대한민국 군대의 무서운 점은 현역이 아닌, 엄청난 수의 예비군에 있다.
농담 삼아 강남 한복판에서 전차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을 찾으면 누군가는 손을 든다고 하지 않은가.
대부분 대한민국 20~30대 남성들은 총만 쥐여주면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여러모로 국토방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불어 수행자도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인구수에 비해 많은 편이고 질도 굉장히 높은 데다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다.
다른 나라 어디를 찾아봐도 한국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이 없다.
참고로 오늘 낮에 히로시에게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드디어 일본 정부에서도 수행자와 협력체계를 갖추겠다는 제안이 왔다고 한다.
당연히 거부할 이유가 없다.
대신 계약은 절대 굽히고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의 계약이 앞으로 점점 많아질 수행자들을 옭아맬 테니 말이다.
‘현재 수행자와 정부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는 한국과 미국, 일본, 캐나다 4개 국가뿐.’
뭐 중국도 강압적이나마 정부의 케어를 받고 있으니 포함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머지 국가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도 미적거리거나,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 종교를 문제로 수행자를 탄압하려는 곳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수행자들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응?”
힘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대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성들과 흰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놔! 놓으라고!”
분위기로 봐선 정장 차림의 남성들은 국정원일 것 같다.
그런데 왜 남의 집 앞에서 이 난리인 걸까?
“무슨 일입니까?”
나는 은신을 해제하며 모습을 드러냈고,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나를 보며 이들은 하나같이 움찔거렸다.
그때, 책임자로 보이는 남성이 다가와 어색하게 웃어 보였는데.
“안녕하십니까, 지훈 님. 국정원입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노인이 그 국정원 책임자를 밀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오오, 당신이!”
하지만 노인은 다시금 국정원 직원들에게 붙잡혔는데, 힘이 어찌나 센지 젊은 요원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였다.
“그분은 누굽니까?”
“앞으로 꾸려질 뮤대륙 관련 연구소 연구원입니다. 원래 국정원에서 연구했던 사람이죠.”
아아, 박성을 가지고 놀던 연구진 중 한 명이고만.
“그런데 왜 남의 집 앞에서 이러는 건데요?”
“그게…….”
국정원 직원이 말을 잇지 못하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노인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그에 책임자가 곤란하단 기색을 보였으나, 내가 빤히 바라보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 노인을 풀어주었다.
“이야, 자네를 만나기 위해 완전히 첩보 영화를 찍었다니까? 반갑네, 나는 P공대 화학과 교수였던 ‘신태화’일세.”
“저를 만나고 싶었다고요?”
내 물음에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국정원에서 수행자들의 힘의 근원인 마력에 대해 연구를 진행해왔지. 물론, 그 과정이 비인륜적이었다곤 하나 큰 성과를 손에 넣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서론이 길다.
나는 용건만 말하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신태화 교수는 자신의 복장을 깔끔하게 고치며 말했다.
“자네가 날 고용해 주지 않겠나?”
“…….”
당연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어진 귓속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력으로 고출력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네. 에너지 대란 사태의 해법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