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77
35. 식인 식물 (1)
2왕자 미하엘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내가 만약 남작의 허무맹랑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아쉬웠을 겁니다.”
미하엘 왕자는 굉장히 계산적인 사람이다.
그는 내 말을 ‘허무맹랑’하다 표현했지만, 계산적인 사람이 말이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왕자는 처음부터 내가 꺼낼 패가 마땅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보력에서 그가 나보다 못할 리 없으니 말이다.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추후 내 힘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굴하게 구걸하지 않고, 지금이 아닌 미래를 건, 당당한 거래.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이 제안은 자신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뢰도가 부족해도 공수표를 날리는 것보다 낫다.
괜히 빌빌 대면서 사업체를 가져다 바치거나 머리를 굴리는 짓은 오히려 반감을 샀을 것 같다.
아마 미하엘 왕자 입장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그게 끝인가? 나를 설득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안 하고?”
“다른 무슨 말로 설득하겠습니까. 2왕자 전하라면 분명 알아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말투는 공손해도 내 눈빛엔 다 알면서 괜히 떠보지 말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왕자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만족스런 기색을 보였다.
“대충 남작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군.”
“송구합니다.”
다만 왕자 뒤에 시립한 부탑주 랜디 자작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하엘 왕자는 그런 랜디 자작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나는 날카로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아공간에서 선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2왕자 전하께선 차를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래, 조든 크리스의 홍차는 나도 애용하고 있지.”
“이건 약소하지만 제 선물입니다. 아직 시중에 판매되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음료입니다.”
그는 차를 좋아하지만 차 이상으로 새로운 지식,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생김새로군.”
“홍차의 뒤를 이을 야심작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회에서 취급하는 홍차의 종류가 굉장히 많아졌다.
얼그레이처럼 다른 향을 더한 홍차도 있고, 아예 산지의 특징을 살려 지역별로 분류하거나, 제조 방법에 변화를 주는 등 다양성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건넨 것은 새로운 종류의 홍차가 아닌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전하 독 검사를.”
“되었다.”
왕자가 내가 건넨 유리병의 뚜껑을 열려 하자 부탑주가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스윽 바라본 그는 여유롭게 손을 내저었다.
-뽕.
밀봉되었던 병이 개봉되고 홍차 이상으로 강렬한 향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달콤하면서 중후한 향이로군. 이것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커피였다.
미드랜드 남부의 프리우스 왕국은 열대기후를 가진 국가다.
프리우스에는 카밀라란 산맥이 있는데, 그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과실이 바로 커피 열매였다.
피곤을 쫓고 집중력을 돕는다 하여 인근 지역 농사꾼들이 씨앗 채 갈아서 과실차로 끓어 먹을 뿐 타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식품이었다.
하지만 내겐 황금이나 다름없는 보물.
안 그래도 커피나 카카오 등 고부가가치 상품을 찾고 있던 나로선 기쁘기 그지없는 발견이었다.
“커피라. 예쁜 이름이군.”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자리를 기념하여 커피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내 제안에 미하엘 왕자를 흥미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홍차처럼 향을 즐기는 기호 음료지만, 준비하는 과정도 상당히 재밌는 식품이죠.”
나는 아공간에서 여분의 커피와 도구들을 꺼냈다.
-드르르륵.
우선 글라인더에 커피빈을 넣고 곱게 갈았다.
커피가 갈리면서 향이 더욱 진해지고, 미하엘 왕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 향을 즐겼다.
그리고 드리퍼에 융 필터를 깔고 곱게 간 커피를 얹었다.
이어서 입구가 좁은 핸드드립 전용 포트를 마법으로 가열한 후 물을 따르니 보글보글 거품이 피어났다.
필터를 거친 연한 갈색의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커피는 같은 원두를 사용해도 추출방식에 따라 맛이 완전히 바뀌게 되죠.”
총 3~4잔 정도의 양을 핸드드립으로 뽑아낸 나는 자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랜디 자작께서도 함께 자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자작도 앉지.”
“소, 송구합니다.”
나는 지구에서의 삶 때문인지 왕자를 앞에 두고도 두렵다는 감정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하엘 왕자를 대하는 자작의 모습에선 은근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나는 커피를 찻잔보다 입구가 좁은 잔에 따라 건네주었다.
“재밌군. 자네의 고향에서 즐기는 차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임에도 비슷한 식물이 자란다는 거군.”
“저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미 우리가 다른 세상 사람인 건 알 사람은 다 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설탕을 꺼내며 말했다.
“기호에 맞춰 설탕을 한두 스푼을 추가하는 것도 좋습니다.”
미하엘 왕자는 일단 마셔보겠다며 커피잔에 입을 가져갔고, 랜디 자작은 설탕을 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감히 손을 뻗을 용기가 없는지 묵묵히 잔을 들었다.
“이거 참…….”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미하엘 왕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모양이다.
다시금 한 모금 마신 그는 진심 어린 감탄사를 표했는데, 옆에 있던 랜디 자작도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뮤대륙의 커피는 신맛이 강하다.
그래서 조금 더 강하게 로스팅을 했는데, 스모키함 속에서도 달콤한 향이 죽지 않는 뛰어난 풍미를 갖고 있었다.
이어서 왕자는 반 정도 남은 잔에 설탕을 한 스푼 넣고, 랜디 자작의 잔에도 한 스푼을 넣었다.
왕자가 자신의 잔에 설탕을 넣어준 게 그렇게 감격스러울까?
영광이라며 고개를 조아리는 랜디 자작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설탕을 넣으니, 향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별미의 음료가 되는군.”
이 정도면 커피 사업도 대박이라 보면 되겠지?
커피가 마음에 든 왕자를 위해 두 잔을 더 즉석에서 뽑아내고, 아직 장비가 마련되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마법으로 뽑아내 카페라테까지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커피향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
나는 커피를 만들면서 왕자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는데, 성격이 비슷해서인지 커피 때문인지 나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이거 말이 잘 통하는 친구를 얻었어.”
친구라니, 나는 별로 왕자와 친구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왕권 다툼에 관여하더라도 그건 나중의 일이지, 지금은 그다지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내게 시간을 투자한 왕자는 커피와 드립세트를 개인 아공간에 잘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오늘 왕자는 커피를 너무 마셔서 잠에 못 들지도 모른다.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지. 베르트 남작 언제고 왕궁으로 초대하도록 하겠네.”
“영광입니다.”
“작위 갱신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야.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성공적인 만남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지만, 왕자의 호의에 조금 지나치게 나댄 것 같다고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
35. 식인 식물
드디어 중급 익스퍼트로 향하는 실마리를 잡았다.
물론 실마리를 잡는다고 바로 중급 익스퍼트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이 보이는 산을 오르는 것과 정상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것은 심리적인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오러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다.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오른 것도 시스템에 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상황은 현재 사용 중인 전투 교범의 효과 덕일 것이다.
이 전투교범을 꾸준히 얻을 수 있다면 더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투 교범이 상급 던전의 보상으로 얻어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상급 보상카드에서도 나오면 좋겠지만, 역시 그건 힘들겠지.
지금까지 느낀 바에 의하면 같은 상급이어도 기여도 때문인지 던전의 보상이 훨씬 좋았으니 말이다.
“역시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니 빡세긴 하네.”
나는 눈앞의 거대한 회색 덩어리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우거]
그건 숲에 제왕이라 불리는 몬스터의 사체인데, 나와의 드잡이질 끝에 결국 패하고 저리 쓰러진 것이다.
[퀘스트 발생]
등급: 상
내용: 오우거 20마리
보상: 상급 보상카드, 스킬업 포인트 2개
드디어 진입한 일반 퀘스트 상급 구간.
어스웜 3마리를 잡는 게 중급 마지막 퀘스트였고, 이후 받은 퀘스트가 바로 이 오우거를 일반 몬스터 마냥 사냥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오우거는 어스웜과 비교해 살짝 떨어지는 몬스터였지만, 쪽수가 쪽수인 만큼 상급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주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걱정마세요. 안전장치는 갖추고 있으니까요.”
나는 지금 오우거를 상대로 수행을 하는 만행을 지르고 있다.
마법과 스킬 사용을 최대한 줄였을 뿐 아니라, 스턴 효과가 있는 베이모스 건틀릿과 실드 기능이 있는 안개코트, 모든 방어에 반발력이 깃드는 일리스 링까지 해제했다.
오우거는 절대 익스퍼트 초급이 혼자 쓰러뜨릴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다.
적어도 익스퍼트 상급은 돼야 홀로 싸울 만한데, 아무리 극도로 강화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내겐 사고 가속이 있다.
그것이 있기에 대등하게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확실히 목숨을 노리는 적과의 전투여서인지 그라프와 대련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토실드 링과 신의 효과가 사라지면 이런 아슬아슬한 전투를 끝내겠지만, 아직까지 두 효과가 발동하는 일은 없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그림자 이동으로 자리를 피했으니 말이다.
“도축.”
그렇게 오우거의 사체를 수습하고 다음 목표를 찾아 나섰다.
이후 나는 수련을 목적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한 채 오우거 10마리를 더 사냥했고, 시간이 촉박해져서 나머지 오우거는 전력을 다해 처치했다.
수련을 목적으로 창만 사용했을 땐 한 마리를 잡는데, 30분이나 걸렸지만, 전력을 다하니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우거는 분명 무섭고 강력한 몬스터지만, 이번 일로 확실하게 느꼈다.
지금의 내가 전력이면 한동안 받게 될 일반 퀘스트에선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
어젯밤에 시부야 던전을 클리어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집에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공간확장 아티팩트를 획득했습니다.]
이번 보상카드는 상급이긴 하지만 달랑 한 장이어서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따로 설명을 보지 않아도, 공간확장이 어떤 기능인지 알기에 적용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지하 벙커로 들어섰다.
지하 벙커의 식품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비상식량이 가득 차 있었다.
역시 공간을 확장한다면 식품 창고가 우선이라 생각하여 아티팩트를 설치했는데.
[지하 벙커의 식료품 창고를 확장하시겠습니까?]
식품 창고 전체에 무리 없이 아티팩트가 적용되었다.
[식료품 창고를 5배로 확장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넓은 적용 범위.
나는 혹시 벙커 자체를 확장할 수 있을까 싶어서 스킬을 해제한 후 다시 사용했다.
[지하 벙커를 확장하시겠습니까?]
‘그래.’
[지하 벙커를 3배로 확장합니다.]
놀랍게도 지하 벙커 전체를 확장할 수 있었다.
물론 적용 대상이 커진 만큼 효율은 조금 더 떨어졌지만, 이게 어딘가.
나는 한결 웅장해진 지하 벙커를 둘러 보며 만족했다.
원래부터 안전가옥의 지하 벙커는 가정집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무리를 한다면 100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공간이 확장되면서 족히 배 이상의 인원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심 나 자신을 강화할 수 있는 장비가 나오길 기대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은 보상이었다.
“아예 안전가옥을 더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욕심이려나?
듣기론 연맹 간부 중 독일인 발터도 나처럼 안전가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몇 명이 더 안전가옥을 갖고 있을지 알 순 없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띠리링.
벙커를 나서니, 인식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른 시간에 걸려온 전화에 왠지 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야, 네가 가꾸던 화분 있잖아! 그거 때문에 난리 났다! 빨리 와봐!
다급한 인식이의 목소리.
사무실까지는 5분 정도의 거린지라, 나는 차를 끌고 가기보다 은신을 쓴 상태에서 공중 도약을 이용해 빠르게 허공을 달렸다.
덕분에 집을 나서고 30초도 걸리지 않아 사무실로 쓸 빌딩에 도착했고, 인식이와 태영에게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인식이는 따라오라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고, 태영은 직접 보는 것이 나을 거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새애액!
그러자 집중해야 눈에 들어올 법한 얇은 녹색의 끈이 태영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만큼 태영은 가볍게 그것을 피했지만, 황당한 상황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설마 이게?”
“그래 이 자식아, 너 대체 뭘 키운 거야!”
황당함이 가득 담긴 인식이의 반응에 괜히 무안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직접 화분을 살펴보기 위해 배리어를 펼치고 공격이 날아든 창고를 향해 다가갔다.
“아무 일 없는데?”
그런데 내가 다가가니, 태영 때와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게 주인을 알아보나?”
그리고 창고에 들어선 내 눈에 작은 화분 위로 10㎝ 정도 자라난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