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76
34. 대응 (3)
뮤대륙의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바보라서 수행자들의 존재를 손 놓고 지켜보는 게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신탁 때문이고, 신전에서 수행자를 공증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구의 중세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뮤대륙에서도 종교가 가지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더구나 뮤대륙은 기적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가.
신전의 사제들은 신성력을 사용하여 병마를 치료하고, 성기사는 악귀를 물리치니 뮤대륙의 종교는 사람들의 신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런 신전에서 신탁이라며 수행자에 대한 간섭을 자제해달라고 하니, 귀족들도 내키진 않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식으로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작위 갱신은 고민해 봐야겠네요.”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는 법.
신전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들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왕족과 귀족들이다.
신탁은 분명 수행자의 존재가 위협적일 때는 대응을 해도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악용될 소지가 있는 부분.
귀족들이 수행자를 향해 갖가지 이유를 붙이며 방해를 해온다면 신전이라고 전부 막아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클로이와 상의를 해봐야겠다.’
당연히 계승 작위를 받는다면 나야 좋다.
5서클의 마법사에게 단승 남작위를 주고 6서클의 마법사에게 계승 남작위를 주는 것처럼 같은 남작이라 해도 차이가 크다.
계승 작위는 봉작식을 거쳐 국왕에게 직접 하사를 받으며 반드시 영지가 주어진다.
제한된 구역이나마, 왕이나 다름없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영토가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흥미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영지를 얻게 된다면 그곳은 수행자 연맹의 총본산이 될 터.
어찌 거절하겠는가.
그런데 이를 다른 귀족들이 얌전히 지켜봐 줄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래부터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귀족이라 해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무섭게 힘을 키워가는 수행자가 거슬릴 것 같으니.
“참, 아드님의 병세는 어떤가요?”
나는 화제를 돌리며 그라프를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진 그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왔다.
“주군의 은혜에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라프는 난치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팔리듯이 내게 왔다.
그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선 적어도 성녀의 기적이 필요한데, 성녀의 도움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성녀의 주문을 대체할만한 치료약을 구할 수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포인트 샵에서 판매하는 ‘엘릭서’.
나는 이번에 포인트 샵에서 대량 구매한 엘릭서 중 하나를 그라프의 아들에게 사용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라프는 진심으로 내게 충성을 바치며, 종신서약을 했다.
겨우 1000포인트에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인물을 고스란히 나 자신을 위해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덤으로 급여도 백금화 50개에서 15개 줄고.
“다행이군요.”
“언제 한번 아들과 함께 찾아와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미 그에게 감사하단 말을 셀 수 없이 들었지만, 굳이 그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연맹 본부로 사용 중인 저택 내부에 들어선 나는 버릇처럼 마법을 사용했다.
‘클린, 드라이.’
끈적거리는 몸을 마법으로 씻고, 축축한 옷을 뽀송뽀송하게 말렸다.
그리고 집무실에 들어서니 자신의 방처럼 내 책상을 차지하고 있던 클로이가 일어나 내게 자리를 양보했다.
“경들은 옆방에 대기하고 계세요.”
“네!”
국왕도 아니고 상급 익스퍼트와 최상급 익스퍼트를 문지기로 쓸 수는 없는 노릇.
상급 익스퍼트만 해도 단승 남작위를 받을 수 있는 위치인 만큼, 이들이 내 기사라곤 해도 예우해줄 필요가 있었다.
네 명의 고위기사 외에 수습 기사(오러유저) 수준의 사병을 다수 고용했는데, 저택의 경비는 이들이 전담하고 있다.
기사들은 바로 옆방에서 차라도 마시며 대기하다가 이상이 생기면 그때 달려오면 된다.
“바빠?”
나는 책상 대신 소파를 고수했고, 클로이는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차를 건네주었다.
뮤 대륙의 체류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처지에도 없던 차의 맛에 눈을 떴다.
클로이가 건네준 홍차에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를 탄 나는 깊은 향을 느끼며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아뇨,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케일론인의 생김새는 우리 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클로이는 특이하게 붉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이 붉은 눈은 그녀의 부모나 조상 중에 외국인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순수 케일론인에 가까운 증거라 한다.
지금에 와선 고위 귀족과 왕가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극히 낮은 확률로 평민 사이에서도 붉은 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고 들었다.
나는 루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프 경이 내게 작위를 갱신하라는데.”
“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 갱신을 해도 문제가 없겠냐는 의문.
그에 클로이는 내가 선물한 개인 아공간에서 서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지훈 님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뮤대륙의 권력자들입니다.”
꼭 작위 때문만이 아니라 해도 철두철미한 클로이는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재 내 관심은 오로지 같은 수행자들과 개인능력 강화에 쏠려 있는 만큼,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역시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경계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일단 케일론 왕국으로 한정한다면 내무대신 타일러 백작이 수행자의 국외 추방과 재산 몰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신이면 거물 아닌가?
내가 알기론 왕국군 총사령관과 재상을 빼면 가장 높은 직위로 알고 있는데…….
“다른 수행자들의 재산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으니 대놓고 지훈 님을 털어먹겠다는 심산이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귀족에게 죄를 물을 순 없으니 실행으로 이어지진 않고 있지만, 내무대신은 재상의 심복인 만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재상이 움직이면 끝이란 거군.”
“아직 재상이 이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그라면 얼마든지 폐하를 움직일 수 있거든요.”
내가 지구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것처럼, 수행자 연맹 내부에도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어제도 만난 유이다.
그녀는 로엘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주요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가게까지 갖고 있으니 말이다.
유이가 취급하는 물품은 여성의 속옷이다.
기능적인 부분에 지구의 디자인을 더한 그녀의 속옷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클로이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트루스 클랜 소속일 때부터 장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군이기에 건들진 않았다.
그 외 뮤대륙에서 낮은 가치를 지닌 열매나 식물의 씨앗으로 향신료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스승의 연줄을 이용해 마탑과 손을 잡고 편리상품을 만들어내는 사람.
다양한 레시피로 음식장사를 하는 사람까지.
수행자들은 무력만큼이나 재산도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한들 지금의 나와는 비교하기 힘들다.
상품 독점.
대대적인 자금 투입.
공장형태의 생산라인을 구축해 지구처럼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고 있으니.
더구나 새로운 상품개발도 잊지 않고 있는데, 현재 미드랜드 남부에 위치한 프리우스 왕국의 변방에서 커피와 비슷한 열매까지 발견해냈다.
장담컨대 뮤대륙에서의 내 재산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커져갈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왕실과 문제가 생기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곤란한데, 내 재산 상당 부분이 케일론 왕국에 묶여 있으니.”
또한 나는 최종적으로 은행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에서 아무 이유 없이 사업을 도둑질한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진행할 사업은 중립도시 발테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클로이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업체는 확실한 기반을 잡기까지 분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럼 당장 작위 갱신은 힘들겠네.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하면 더 난리를 칠 테니. 그런 거물이 난리 칠 정도면 그 밑은 말 다한 거 아냐.”
대답 없는 클로이를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단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실은 이것에 대해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했습니다.”
“제안?”
클로이는 나의 것이다.
진실의 눈이 그녀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이 사태 지켜보면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흥미를 보이자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왕실과 직접 연을 가지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확실히 밑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왕실에서 나를 싸고돈다면 반역이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내 안전은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실은 2왕자 미하엘이 수행자란 존재에 큰 흥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속국의 국왕이나 자신의 격을 낮춰서 전하라 칭하지, 케일론 왕국은 독립된 자주 국가이기에 국왕은 폐하로, 국왕의 후계자는 태자라 칭했다.
현 케일론 왕국의 국왕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인데, 왕태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꼽히는 것이 바로 1왕자와 2왕자이다.
1왕자는 지배자의 성품을 지닌 존재.
부하를 아끼고 호탕하며 사소한 것에 목을 매지 않는다.
더불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왕국군 총사령관인 크리산트 공작을 외조부로 두고 있어서 지지기반도 튼튼했다.
다만 문제라면 왕비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국왕에게 그다지 인정을 못 받고 있었다.
2왕자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인물로 굉장히 계산적인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며 부하라도 실수를 용납지 않는 완벽주의자.
덕분에 잡음이 끊이질 않지만, 업무적으론 나무랄 데 없는 일 처리를 보여준다.
더불어 2왕자는 정실인 왕비의 소생이었다.
국왕은 2왕자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으며, 군권에 지지기반을 둔 1왕자와 달리 재상을 포함한 정통 귀족들과 마탑의 지지를 받고 있다.
왕비는 변방의 백작가문 출신으로 중앙정계와는 연이 없는 가문인지라 외척의 득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 행정 관료들의 지지가 두터웠다.
나이는 1왕자가 28살, 2왕자가 21살로 제법 차이가 난다.
“아아, 정치에 개입하고 싶진 않은데.”
내가 한숨을 내쉬자 클로이는 쓴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선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거든요.”
“2왕자의 지지층이 전통귀족과 마법사, 행정 관료들이라면 자금 때문에 수행자들을 원하는 게 아니겠네.”
“네, 빠르게 강해지는 수행자들의 무력을 원하는 것이죠. 2왕자가 1왕자에게 크게 밀리는 것이 그 부분이니까요.”
하긴 내 재산이 많다고 쳐도 아직은 이름 높은 대귀족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여자 문제는?”
“1왕자는 부인만 5명이며, 대부분 친교로 엮인 가문의 여식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여자를 좋아해서 밖에서 낳은 자식이 셋이나 되죠. 반면 2왕자는 아직 미혼입니다. 여자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죠.”
왜 1왕자가 지배자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난봉꾼 아닌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2왕자가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서 2왕자 측과 손을 잡으면 안전을 꾀할 수 있다는 거지?”
“네, 더구나 내무대신도 2왕자 측이니 아군 진형을 털진 못할 겁니다.”
수행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좋은데, 관심이 협력관계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은 아닌지.
“마탑을 통하면 2왕자와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클로이의 물음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별수 없지, 만나 보는 수밖에.”
포인트를 위해 돈은 벌어야겠고, 그 돈을 벌기 위해 권력자를 등에 업어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그리고 왕권 싸움에서 2왕자가 패한다면 다른 나라로 튀면 그만이다.
그 경우 홍차 독점권을 빼앗기게 되겠지만, 국왕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왕위 다툼 1~2년 만에 끝나진 않겠지.
이는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덤으로 작위 갱신으로 영지도 얻고.
***
클로이의 말대로 2왕자와의 접촉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우리 수행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만큼, 흔쾌히 내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도 카르디아의 케일론 왕립 마탑 본부.
나는 그곳에서 왕립마탑의 부탑주인 랜디 자작과 함께 케일론 왕국의 2왕자인 미하엘과 대면했다.
“반갑소, 베르트 남작.”
클로이처럼 흑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져서인지 2왕자는 차가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왠지 친밀하게 느껴졌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2왕자 전하.”
“앉지.”
하지만 2왕자의 뒤로 자작의 작위를 가진 부탑주가 서 있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의외군, 자네 쪽에서 먼저 만남을 요구하다니.”
2왕자 미하엘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다.
“작위 갱신을 신청하기 위해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던 중 내무대신께서 수행자들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사업기반이 케일론 왕국에 있는 만큼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감 없이 사실을 털어놓는 내 모습에 그는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수행자가 빠르게 성장한다곤 들었지만, 벌써 작위 갱신을 할 정도인가?”
“제가 이번에 얻은 가신 중에 최상급 익스퍼트의 기사가 있습니다. 그가 제안을 하더군요.”
“놀랍군. 아니 이건 수행자로 치부할 게 아니라 자네가 특별한 것이라 봐야겠지? 다른 수행자들과의 차이가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운이 좋았습니다.”
미하엘 왕자는 나와 성향이 비슷한 인물이다.
클로이의 분석에 의하면 그에겐 미사여구보단 거짓 없이 심플하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럼 만남을 청한 이유는 뻔하군. 내 그늘이 필요하단 것 아닌가.”
“맞습니다.”
간결한 대답.
2왕자는 미간을 좁혔지만, 눈빛에 깃든 이채를 숨기지 못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관심을 사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그럼 내게 무슨 이점이 있지?”
그의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를 비롯한 수행자들의 지지입니다.”
“협력이 아닌 지지?”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협력은 말 그대로 왕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뜻하는 반면, 지지는 의사 표현 정도라 볼 수 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힘이 부족한지라, 권력 싸움에 끼어들 여력이 없습니다.”
“이거야 원…….”
짧게 혀를 차는 왕자와 그런 왕자의 뒤에 서 있는 부탑주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나는 최대한 비굴해 보이지 않는 선에서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보잘것없는 지금의 수행자들을 보고 관심을 표하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의 미래를 높게 평가하신 거죠.”
“…….”
“지금 제게 빚을 쥐어두시면 추후 큰 득이 될 것이라 장담합니다.”
패기 있게 자신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다.
물론 말뿐인 약속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공수표를 날리다가 신뢰를 잃으면 아군이 적군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권리를 보장받고 싶지만 당장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미래에 투자를 하라?”
나는 묵묵히 긍정했다.
그에 미하엘 왕자는 차가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다른 세상 사람이라 그런가? 진지하게 잘도 그런 요구를 하는군. 왕자를 우롱하냐고 성을 내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럼 왕자의 안목이 거기까지인 거다.
수행자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니, 협상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리 없다.
내가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2왕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