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꿈 속 퀘스트 보상은 현실에서 065
29. 4서클과 두 번째 던전 (2)
“케일론 왕국 남단에 프리시아 호수라는 거대 호수가 있습니다. 중심에는 카라스 마을 3배 크기의 섬이 있는데, 어부들의 쉼터로 사용되던 곳이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접근할 수가 없다는군요. 마치 섬이 사람들을 거부하듯 다가오지 못하게 미는 것처럼요.”
지난번에 클리어했던 망자의 던전 때와 같은 현상.
클로이의 말에 나는 그것이 던전임을 확신했다.
내가 던전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포인트 샵에서나 얻을 수 있는 물건이나, 보상카드로 쉽게 구하기 힘든 히든 스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중급 던전에서 얻은 마석 분해 스킬은 다른 수행자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내게 아이템빨이라는 날개까지 달아줄 보물이 아닌가.
지난번과 같은 수준의 던전이면 간단하게 혼자서 클리어가 가능하다.
더구나 지금은 서클이 한 단계 상승한 데다가 사고 가속의 적응도가 높아진 덕분에 더욱 높은 난이도도 충분히 혼자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 까란 생각이 들었다.
“해당 지역을 탐사할 때 문제 될 게 있나요?”
“그곳은 국왕령이지만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방치된 땅입니다. 해당 지역의 행정관이 왕실에 사실을 알렸음에도, 돌아온 대답은 다가가지 말란 것이 끝이었죠.”
안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무시를 한단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처였다.
“수행자만 입장 가능한 땅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끌긴 하지만, 이미 그 섬은 사전 탐사를 통해 아무런 자원도, 가치도 없는 땅이라고 알려진 상태죠. 그래서 문제 될 건 전혀 없습니다.”
귀족이 되고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것은 좋지만, 요즘 여기저기서 빨대를 꽂으려는 녀석들이 나타나 문제다.
그래서 혹시라도 트러블이 발생할 가능성은 사단에 차단하고 싶어서 조심하는 것이다.
“좋군요.”
내가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자, 클로이는 마사지를 멈추고 다가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이브닝드레스를 즐겨 입기에 새하얀 허벅지가 유혹하듯 드러났다.
“제 정보가 도움이 된 걸까요?”
“도움이 되다 뿐이겠습니까. 정보길드에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수행자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가 정보 길드와의 관계다.
내가 가진 바에 비하면 정보길드는 거대해도 너무 거대한 철옹성 같은 조직.
이제는 단순 고객 관계를 넘어 동업자가 된 데에다가, 내가 수행자 연맹이라는 성장 가능성이 큰 세력의 수장이 된 덕분에 무시 받을 일은 없지만, 정보길드와는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클로이는 내 무릎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남작님께서 믿어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당신의 도움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답니다.”
알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과 내게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파악된 부분이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하는 이유를 몰라 가만히 지켜봐야 했다.
“남작님께서 저를 사주시지 않겠습니까?”
“…….”
사달라니, 그녀는 노예 같은 것이 아니다.
벌이도 꽤 좋은 상위 정보원.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했던 나는 이내 그것이 은유적인 표현임을 알아채곤 진지하게 반문했다.
“그 말은 클로이양을 영입해 달란 소립니까?”
“어떤 형태든 상관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관계가 아닌 분명한 남작님의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이걸 구애 활동으로 봐야 하는 건지.
나는 턱을 괴며 클로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겁니까?”
그녀와 내가 알고 지낸 기간은 이제 두 달 정도.
기억에 따르면 그녀가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표현한 건 거의 처음부터다.
김선아의 경우 목숨이 구해지고 이후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호감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그녀와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를 이어온 사이다.
지금이야 내가 귀족도 되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수행자 단체의 리더도 맡고 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난 지금보다 훨씬 별 볼 일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내 물음에 클로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모습이요.”
“네?”
“누구도 쉬이 믿지 않고,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시나 퍼지지 않는 붉은 기운.
나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녀는 옷차림을 정돈하며 내 옆에 섰다.
“수행자들이 뮤대륙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수행자들이 둘 이상 모이면 자신도 모르게 지구의 이야기를 내뱉는데, 정보 길드의 수집 능력을 생각하면 알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라는 식으로 바라보자 클로이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세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뮤대륙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죠. 하물며 저 같은 평민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 위해선 더러운 꼴도 참 많이 겪는답니다.”
신분을 중시하는 뮤대륙의 체제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
그녀가 말한 더러운 꼴이라는 것도 지구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인권유린 수준의 문제일 게 분명했다.
“저는 제 외모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뚫을 정도죠. 그래서 오히려 남작님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결코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무거운 이야기를 클로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남작님과 함께하다 보니, 관심이 호감으로 바뀌는 건 당연한 절차였던 것 같습니다.”
비로소 그녀의 생각을 이해한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이란 점과 잘난 외모를 무기로 삼아온 제가 이런 소녀 같은 감상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행동일까요?”
강한 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
클로이는 지금 내 마음을 얻기 위한 승부수를 던지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이야기 속에 거짓말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흔들리는 일이 없었겠지만.
클로이도 내 성향을 잘 알기 때문인지, 거짓보단 진실로 다가왔다.
갑자기 선택을 강요하는 그녀의 행동에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고민하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게 휘둘리는 일이 많을 겁니다.”
“심심풀이로 사람을 막 대하는 분이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나를 이렇게까지 잘 이해해줄 여성이 또 있을까?
결국, 나는 졌다며 두 손을 들어 올렸고, 클로이는 기쁜 표정으로 다가와 내 뺨에 입맞춤을 했다.
***
클로이와 함께 6명의 기사와 인터뷰를 가진 나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떤 것 같아요?”
그녀의 물음에 도리어 반문으로 답했다.
“클로이는?”
이제 사적으로 엮인 관계다 보니 나는 클로이를 편하게 불렀고, 클로이는 나에게 남작님 대신 지훈 님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편하게 말을 놔도 된다고 했으나, 그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사코 존댓말을 고수했다.
뭐, 뮤대륙엔 뮤대륙의 규칙이 있는 것이니.
“이 사람은 별로인 것 같습니다. 주군이 될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계속 제게 관심을 보이더군요. 언제고 사고를 칠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성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더구나 이목을 끌 정도의 미인이라면 두말할 것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자리를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클로이의 의견은 지극히 타당했다.
나는 클로이가 말한 사람과 인터뷰 중 붉은 기운을 수시로 풍기던 인물의 서류를 가리켰다.
“그럼 이 두 사람 탈락.”
내가 선택한 4명은 1년에 백금화 600개란 말도 안 되는 연봉을 외친 최상급 익스퍼트와 상급 익스퍼트 3명이다.
마법사의 나라 위스워드 제국 출신의 최상급 익스퍼트 ‘그라프’.
가장 연장자로 전장 경험이 풍부한 용병 출신의 상급 익스퍼트 ‘빌리엄’.
영지 전에서 주군을 잃고 가족과 함께 망명한 ‘마르티스’.
슈엔다르크 왕국 수도방위 기사단 출신으로 줄을 잘못 선 덕분에 축출되고만 ‘프리드’.
각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진실의 눈을 앞세운 인터뷰에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최상급 익스퍼트 그라프의 경우 이미 위스워드 제국에서 단승 남작위를 받은 경력이 있지만,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에 귀족의 권리를 팔아 넘겼다.
작위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지 몰랐는데, 작위 자체를 넘기는 것은 안 되지만 귀족의 이름과 권리를 사서 사업을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일종의 차명계좌처럼.
덕분에 그는 나와 같은 단승 남작이면서도 귀족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반쪽짜리였다.
그래서 최상급 익스퍼트가 되었음에도 다른 나라로 향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상급 익스퍼트면서 명예와 이름까지 팔고 나라까지 버리다니.
정말 부성애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들은 월급이 백금화 10개로 책정되었다.
아무리 익스퍼트 상급이라 한들 사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녹봉은 연간 백금화 30개를 넘기기가 힘들다.
그들도 내가 제시한 금액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괜히 흥정하려 들지 않고 얼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계약금으로 한 달 치 급여를 선지급해드리죠.”
더불어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계약금까지 챙겨주니, 매우 기뻐했다.
비록 우리의 관계는 신뢰보다 돈으로 엮여 있지만, 처음부터 뭘 바라겠는가.
이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이들의 급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월급으로 백금화 50개를 지불해야 할 그라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다시금 그라프와 면담을 가졌다.
“그라프 경의 요구를 받아들이죠. 매달 백금화 50개를 지급하고, 계약금으로 한 달 치 급여를 선지급해드리겠습니다.”
“후우,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그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이 난치병에 걸렸다죠?”
“네.”
어두운 표정으로 답을 하는 그라프.
“하지만 많은 돈을 받고 그걸로 포션을 구입한다 해도 현상 유지밖에 되지 않습니까? 다른 대안은 있나요?”
대안이 있을 턱이 있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고, 팔짱을 낀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그라프 경의 아들을 치료해 주도록 하죠.”
“네?”
“솔직히 매달 한 사람의 급여로 백금화 50개가 빠져나가는 건 나도 부담스럽거든요.”
그라프는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그보다 제 아들을 치료해 주신다는 게 무슨 말이죠?”
“혹시 수행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네, 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남작님께서도 그 수행자라고.”
“그럼 이해가 쉽겠네요. 우리 수행자들은 신께 보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목록에는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엘릭서도 있죠.”
“네?”
엘릭서라면 왕가나 황가에서나 비밀리에 보유하고 있을 법한 귀물 중 귀물.
“제가 그 엘릭서를 구해 드리죠.”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내 이야기에 그라프는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에 클로이가 나를 보호하듯 앞을 막아섰다.
아무래도 입장이 바뀐 것 같은데.
“그 말씀이 참이라면 급여는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아예 종신 맹세를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마주한 희망 때문일까?
그는 쿵 소리가 날 만큼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급여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 수준에는 맞춰드려야죠. 대신 종신 맹세란 것은 구미가 당기는군요. 정말 괜찮겠어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염치없는 부탁이죠.”
그의 반응을 보니, 엘릭서를 통한 돈벌이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최상급 익스퍼트가 완전히 내 것이 된다면 엘릭서 비용으로 지불할 1천 포인트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엘릭서가 아들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이전 계약을 이어가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다만 엘릭서는 120일 정도 후에 얻을 기회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건 이해해주세요.”
“물론이죠.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희망적이니까요.”
험하게 생긴 아저씨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올려보는데, 그 모습이 많이 짠했다.
덕분에 나를 대하는 마음가짐부터가 바뀐 그라프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엘릭서를 팔면 얼마나 할까?”
“못해도 백금화 5천 개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파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네요.”
나는 찰싹 달라붙어 내 의자를 반쯤 빼앗은 클로이의 허리에 손을 걸쳤다.
“클로이도 필요하면 말해.”
“정말요?”
“빈말하지 않는 거 알잖아.”
그녀는 화사한 미소로 답하며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길드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어?”
원래 클로이는 정보 길드를 나와 나를 위한 정보팀을 꾸리려 했으나, 방법을 바꿔 정보 길드 내에서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녀는 정보팀을 새로 꾸리는 것보다, 정보길드 자체를 잠식해가는 계획을 짰고, 나는 그것에 힘을 보태주기로 했다.
“잘 되고 있어요. 일단 여성을 포함해 젊은 길드원들 위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제가 나름 인망이 있었거든요.”
“괜히 위험한 거 아니야? 내가 윗대가리라면 밑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걸 용서 안 할 것 같은데.”
“애초에 길드자체가 여러 세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거예요. 견제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이것을 문제 삼아 축출하진 않죠. 오히려 길드 입장에선 다른 정보단체가 생기는 걸 탐탁지 않아 할 겁니다.”
“흠.”
결론은 지금이 베스트란 뜻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네.”
***
케일론 왕국 남부 국왕령 하메른.
하메른 지역은 어종이 풍부한 거대 호수 프리시아를 중심으로 어업이 활발한 지역이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오지에 속하고 인접 영지도 가난한 남작령뿐이어서 그다지 발달한 지역은 아니었다.
-팟!
“큭,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메른 지역에 유일하게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된 소도시 게일시에 도착하자 강력한 비린내가 우릴 반겨주었다.
아무래도 어시장 빼곤 볼 게 없는 지역인지라 텔레포트 게이트도 어시장 근처에 설치해놔서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 것 같다.
이번에 내 기사가 된 슈엔다르크 왕국 출신 ‘프리드’가 기겁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나머지 세 사람과 기존 호위기사 3명은 대놓고 불쾌함을 표하지 않았지만, 한껏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공기 정화 마법을 사용했고, 비로소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된 기사 7명이 감사함을 표했다.
“베르트 남작님 맞으십니까?”
그리고 어시장을 나서는 우리 앞에 한 남성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더욱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는데, 아무래도 클로이가 섭외한 안내역인 모양이다.
“북부 선착장에 배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함께 가시죠.”
게일 시는 말이 소도시지 카라스 마을보다 아주 조금 큰 수준이었다.
덕분에 기사를 우르르 달고 다니는 내 모습은 공포심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실례합니다. 주군.”
-쿵.
그때 꼬마 아이가 골목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다가 내 옆을 막아선 그라프에게 부딪혔다.
“아, 아젤!”
아이가 바닥에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는데, 골목에서 부모로 보이는 남녀가 기겁하며 튀어나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귀, 귀족 나으리. 부디 자비를…….”
나와 부딪힌 것도 아니고, 정작 철제 갑옷에 몸통 박치기를 날려 아파 보이는 것은 아이 쪽인데, 덜덜 떨며 바닥에 머리를 쿵 찧는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버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뮤대륙에서 귀족을 대하는 평민들의 자세였다.
“어떻게 할까요?”
검에 손을 가져가는 프리드.
여기서 그들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귀족인 나는 아무런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계급사회의 부조리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들먹이는 것도 웃기니,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음부턴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프리드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평민들을 향해 경고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은 우린, 잠시 후 북부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